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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3650평의 땅 갖게 된 까닭은?

방학맞이 대구경북 역사여행 (6) 원시 종교 유적

등록|2014.07.25 16:25 수정|2014.07.25 16:25

마을을 지켜주는 신울진 온정면 온정리 백암온천마을 마을숲 속에는 사방 돌담 가운데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놓여 있다. ⓒ 정만진


인간의 종교는 신석기 시대에 발생했다. 구석기 시대는 그저 돌아다니면서 주워먹으며 살아간 때였으므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그 무엇이 있지 않나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과학문명의 시대인 현대에도 '새로운' 종교는 출현하기 어렵다. 인간사회를 원천적으로 지배하는 초월적인, 그것도 '새로운'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배운'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전파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신석기 시대만은 종교가 출현하기에 아주 적합한 때였다. 농경의 시작으로 인간 생활에 '혁명'을 일으킨 신석기인들은 농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자연 현상 또는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안간힘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재배했는데 비바람, 가뭄 등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다 쑥대밭이 되었을 때 그들은 '위대한 자연의 힘' 앞에 엎드려 절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신석기인들은 태양과 물 등을 섬기면서 풍작을 빌었다(이를 애니미즘 animism이라 한다). 특정 동식물을 부족의 기원과 연결시켜 숭배하기도 했다(토테미즘 totemism). 인간과 하늘 또는 영혼을 이어주는 존재인 무당과 그의 신통력을 믿기도 했다(샤머니즘Shamanism).

선사 시대인들의 종교관 엿볼 수 있는 암각화들

선사 시대 암각화에 새겨진 동심원고령 양전동 암각화(보물 605호, 왼쪽 사진)와 울산 천전리 각석 암각화(보물 147호)에서 볼 수 있는 동심원은 태양신을 숭배한 당시 사람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흔히 해석된다. ⓒ 정만진


당시의 종교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는 암각화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보물 605호인 고령읍 장기리 532번지의 '양전동 암각화'는 독보적이다. 그 이외에도 기념물 92호인 고령읍 쌍림면 안화리 산1번지 '안화리 암각화', 유형문화재 248호인 영주 가흥1동 264-2번지 '가흥리 암각화', 유형문화재 286호인 영천 청통면 보성리 666번지 '보성리 암각화', 유형문화재 249호인 포항 흥해읍 칠포리 201번지 '칠포리 암각화' 등이 아주 볼 만하다.

고령 양전동의 암각화는 탁본 등을 통하지 않고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감상할 수 있는 선사 시대 그림들이 가로 6m, 세로 3m의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동심원 등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들을 비롯, 방패모양 안에 사람 얼굴을 그려놓은 듯한 문양 등 30여 점의 그림이 감동적이다. 특히 동심원 그림은 태양을 숭배하고 자연을 경외했던 선사 시대인들의 종교적 심리를 읽을 수 있는 유적으로 해석된다.

마을을 지켜주는 거대 고목황목근(왼쪽)과, 황목근 앞의 제단 ⓒ 정만진


커다란 나무를 숭배했던 흔적으로는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696번지의 천연기념물 제 400호 황목근이 대표적이다. 황목근(黃木根)은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의 이름이다. 5월이면 나무 전체에 누런 꽃이 핀다고 하여 성씨는 황(黃)으로 정했고, 이름은 근본있는 나무라는 뜻에서 목근(木根)이라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땅부자'로도 유명한 이 나무는 높이 12.7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5.65m를 자랑한다.

마을사람들은 1939년, 마을 공동 소유 토지 1만2046㎡(약 3650평)를 이 동신목(洞神木) 앞으로 등기 이전했다. 물론, 예나지금이나 변함없이 마을사람들은 이 팽나무를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신목(神木)으로 모시고 있다. 당연히, 나무 아래에는 '黃木根里社之神壇'이라는 제단이 놓여 있다. '마을(里)의 역사(社)를 지켜주는 신(神)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壇)'이라는 뜻이다.

칠곡 신동 입석기념물 29호. 우리나라 최대의 선돌로, (사진에) 사람이 짚고 선 부분에 불교 용어인 "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다. ⓒ 정만진

나무숲 가운데에 제사 시설을 마련해둔 곳도 있다. 울진 온정면 온정리 656번지 백암온천마을의 마을숲 한가운데에 사방으로 돌담이 둘러져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제단이 놓여 있다. 울창한 숲에 신비스러운 안개가 자욱하게 서린 새벽녘,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 숲속을 거닐어보면 선사 시대인들의 신앙심이 어디에서 발로했는지 자연스레 짐작이 된다.

대구시 민속자료 2호인 '신당동 석장승'(계명대학교 박물관 바로 뒤)과 경북도 민속자료 33호인 상주 남장동 산63-3번지 '남장사 석장승'로 찾아볼 만하다. 또 대구시 민속자료 4호인 동구 용수동 420번지 '용수동 당산', 민속자료 5호인 논공읍 북리 462번지 '논공 천왕당' 등도 답사 가치가 충분한 종교 유적들이다. 용수동 당산은 대규모 석탑 모양을 하고 있고, 논공 천왕당은 마을 복판의 동산 꼭대기에 작은 제각(祭閣)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도 실렸던, 칠곡 지천면 창평리 산103번지에 있는 '신동 입석'(기념물 29호)은 특이한 종교 유적이다. 입석은 본래 청동기 유적으로 분류되는데, 높이 약 4.5m, 밑둘레 약 2m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선돌인 신동 입석은 석면 남면에 '南無阿彌陀佛' 글자가 새겨져 있어 원시종교와 불교가 결합한 양상을 보여준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이곳 사람들은 이 선돌을 불교신앙의 대상물로 삼았던 것이다.

논공 천왕당대구시 민속자료 5호. 흔히 '서낭당, 성황당'으로 불려지는 종교시설로 원시종교의 유적이 아직 남아 있는 면모를 보여준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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