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팔할이 한재골이었다
서늘한 계곡 따라 이어지는 숲속 길 '담양 한재골 옛길'
▲ 어린이들이 계곡에서 물놀이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지난 24일 한재골 풍경이다. ⓒ 이돈삼
후텁지근하다. 태양의 기세도 뜨겁다. 산간 계곡이 그립다. '대나무의 고장' 담양 한재골로 간다. 지난 24일이다. 한재골은 병풍산(822m)과 불태산(710m)이 품은 계곡이다. 담양 대치와 장성 북하를 남북으로 잇는 물길이다. 이 계곡을 따라가는 옛길도 지난 봄 복원됐다.
한재초등학교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소재지에 자리하고 있다. 운동장 한켠에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그 품새가 범상치 않다.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뻗었다. 높이 30m는 거뜬히 넘어 보인다.
둘레도 어른 예닐곱이 두 팔을 완전히 벌려야 감쌀 정도다. 나무 한 그루로 숲을 이루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공을 들이면서 손수 심었다고 전해진다. 600년은 묵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존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 한재초등학교와 느티나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 나무'로도 불린다. ⓒ 이돈삼
▲ 600살 넘은 느티나무를 보유하고 있는 한재초등학교 전경. 학교도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이돈삼
그 옆의 은행나무도 병풍산과 어우러져 멋스럽다. 생명의 숲과 산림청이 주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은 학교 숲이다.
초등학교의 역사도 깊다. 1920년 문을 열었다. 100년 가까이 됐다. 이 숲이 학교 졸업생들에게 경외감을 심어줬다. 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코흘리개 때부터 봤던 숲이 자연에 대한 외경심으로 무르익게 만들었다.
한재초등학교에서 한재골로 간다. 길이 화암마을로 이어진다. 길옆으로 대전천이 흐르고 있다. 저만치 대아저수지 둑이 보인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불태산과 병풍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하다.
화암마을에서 만나는 평장사는 광산김씨 제각이다. 홍살문을 앞세운 제각이 위용을 뽐낸다. 문이 열려 있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마당에는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개망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 화암마을에 있는 평장사. 광산김씨의 제각이다. ⓒ 이돈삼
▲ 한재골 계곡. 불태산과 병풍산 사이로 흐르는 계곡이다. ⓒ 이돈삼
대아저수지의 주변 풍치도 아름답다. 군데군데에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저마다 사람과 자동차로 북적인다. 한재골 입구 도로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도로변에 세워둔 차량이 즐비하다. 광주사람들이 많이 찾는 계곡이다.
한재골은 내 어릴 적 단골 소풍장소였다. 그날이 되면 전교생이 초등학교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출발했다. 손에는 평소 구경할 수 없었던 찐달걀 몇 개와 도시락을 들고서.
소풍 때마다 찾는 한재골이었지만 매번 설렘이었다. 계곡이 깨끗하고 숲이 울창한 건 중요하지 않았다. 찐달걀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소풍이었다. 숲에서 보물찾기를 하고 장기자랑을 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어떤 시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바다'였다고 했다. 거기에 빗대서 나를 키운 건 아마도 숲이었지 않나 싶다. 친구들과 뛰놀던 학교숲, 소풍의 추억과 부모를 따라 나무하러 다녔던 한재골 숲 모두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된 것 같다.
▲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사람들. 한재골 계곡 풍경이다. ⓒ 이돈삼
▲ 한재골 옛길. 한재골 계곡을 따라 나란히 이어진다. 오래 전 나무꾼들이 오갔다고 해서 '나무꾼길'로 이름 붙여졌다. ⓒ 이돈삼
한재골은 더위를 피해 온 사람들로 붐볐다. 어린이들은 물장난으로 더위를 쫓으며 신이 났다. 숲그늘 아래에서 잠을 자는 아이의 얼굴도 천진하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학창시절 소풍날이 언뜻언뜻 스친다. 문득 깨복쟁이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한재골 옛길은 이 계곡의 사방댐에서 시작된다. 길 이름을 '나무꾼길'이라 붙여 놓았다. 옛사람들이 땔감을 구하러 다니던 길이어서다. 부모를 따라 나무하러 다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길목이었다. 광주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길은 백양사를 거쳐서 놀라간다. 한재 정상의 잿막에 주막과 약찜을 하는 집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 한재골 옛길에서 만난 대숲터널. 숲속에서 만나는 대숲이 더 청량하게 다가선다. ⓒ 이돈삼
옛길은 사방댐에서 잿막까지 2.47㎞에 이른다. 오가면 5㎞ 가량 된다. 옛길에 들어서자마자 대숲이 반긴다. 산속 계곡에서 만나는 대숲이 더 푸르다.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돌다리도 정겹다. 계곡물이 맑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옛길은 이 계곡을 따라 오른편으로 이어진다. 가슴 벅차게 흐르는 물소리와 내내 함께 간다. 숲길을 걷는 묘미가 쏠쏠하다. 얼굴에 땀이 맺혀도 귓전은 물소리로 시원하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있다. 마을공원에서 흔히 보이는 운동기구도 놓여 있다.
길도 잘 다듬어져 있다. 발걸음이 반기는 흙길이다. 숲은 손대지 않은 원시림 그대로다. 숲을 감도는 나무 내음이 상쾌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도 귓전을 위무해준다.
▲ 한재골 옛길에서 만난 돌다리. 한재골 계곡을 건너는 재미와 운치가 있다. ⓒ 이돈삼
▲ 한재골 옛길에서 만난 나무다리. 그 밑으로 흐르는 물에서도 서늘함이 느껴진다. ⓒ 이돈삼
조그마한 나무다리와 나무계단도 예쁘다. 나무다리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음 속 갈증까지 개운하게 씻어준다.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호젓한 것도 매력이다.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타박타박 걷기 좋다.
숲 사이로 불태산 백운봉이 보인다. 서편 장성읍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오른편 봉우리는 병풍산 투구봉이다. 옛날 한재골의 동쪽과 서쪽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사대통문 가운데 나머지는 한재골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진다.
지명에서 군사용어가 많은 것도 이채롭다. 적에게 항복을 받는다는 수항골이 있다. 군대를 통솔하는 통싯골, 장군의 투구를 닮은 투구봉도 있다. 칼을 든 장군의 손등 모양의 칼등과 막군치도 있다.
▲ 한재골 계곡을 따라 숲 사이로 이어지는 한재골 옛길. 아직 알려지지 않아 호젓함도 묻어난다. ⓒ 이돈삼
▲ 한적한 한재골 옛길. 더위를 피해 거닐며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숲속 길이다. ⓒ 이돈삼
박정희 정권 때는 이 일대의 주민을 분산시키는 소개령이 내려졌다. 간첩의 은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시나브로 주민들이 오가던 옛길도 사라졌다. 이후 작전도로가 뚫리고 여러 해 전 도로 확장과 포장도 이뤄졌다.
한재골 옛길은 이 계곡을 따라 하늘마루정원까지 이어진다. 하늘마루정원은 한재 중턱 계곡가에 들어앉은 찻집이다. 여기서 병풍산 투구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불태산과 병풍산이 펼쳐놓은 숲바다도 싱그럽다.
아래로는 대아저수지가 보인다. 그 너머로 한재벌판이 넉넉하게 펼쳐진다. 계곡물에 담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서늘함이 전해진다. 건강을 챙기면서 더위까지 피할 수 있는 오진 숲길이고 계곡이다.
▲ 하늘마루정원의 잔디밭과 병풍산. 한재골 옛길에서 만나는 찻집 마당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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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담양간 고속국도 북광주 나들목에서 대치·백양사 방면으로 대전면 소재지에 한재초등학교가 있다. 여기서 백양사 쪽으로 대아저수지를 지나면 한재골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