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 회의는 소금강산 표암에서 열렸다
방학맞이 대구경북 역사여행 (12) 삼국 건국 유적
오늘은 삼국 건국의 태실을 찾아보려 한다. 물론 대구경북 역사여행이므로 졸본성, 국내성, 위례성 등 압록강과 한강 유역을 답사하는 것은 아니다. 박혁거세, 탈해왕, 6부 시조 등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대상일 뿐이다.
박혁거세가 최초로 궁궐을 세운 곳인 창림사터, 그가 태어난 나정(사적 245호), 무덤이 있는 오릉(사적 172호), 6부 시조들을 섬기는 양산재, 경주이씨 탄강지이자 화백회의가 열렸던 장소로도 유서깊은 표암(경상북도 기념물 54호), 표암 오른쪽의 탈해왕릉(사적 174호), 양남면 나아리의 탈해 유허지(경상북도 기념물 79호), 탈해가 거짓 증언을 조작하여 당시 국무총리였던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는 설화가 남아 있는 반월성, 고려 초기 실권자 최승로의 설화가 깃든 중생사를 찾아 길을 떠나보자.
우리나라에 철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때는 중국에서 망명해온 위만이 고조선 준왕을 몰아내는 기원전 194년경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망하지만, 이전부터 철기 시대를 누렸던 우리 민족은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왕호(王號)를 사용한 부여 등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작은 나라들을 세운다.
수많은 소국들은 연맹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압록강 일대의 구려국(句驪國), 마한의 백제국(伯濟國), 진한의 사로국(斯盧國)이 두각을 나타내어 각각 일정 지역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성장한다. 강력 소국들이 본격적으로 주변을 정복하면서 나라의 규모를 키워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삼국 중 신라가 제일 먼저 건국되었다?
청동기 시대는 사유(私有)재산의 발생으로 개인 사이, 또 부족 사이에 높낮이가 생겨난 때였다. 그에 비해 철기 시대는 족장(族長)들의 연맹왕국을 뛰어넘어 가장 센 족장이 혼자서 왕(王)이 되는 시대였다.
삼국사기는 초기 철기 시대 말엽인 기원전 57년에 혁거세, 기원전 37년에 주몽,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한다.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건국되었다'식의 역사 기록이 등장한 것은 신라 유학자들이 고려 정치의 실세로 부각된 데 따른 결과였다. 최승로, 김부식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오른쪽 박스 내용 참조)
경주 남산 창림사터는 박혁거세가 처음 궁궐을 지은 곳은 추정된다. 창림사터는 나정 뒤편의 남간사터 오른쪽 구릉이다. 신라의 본격적 궁궐 월성(月城)은 101년(파사왕 22)에 지어진다. 혁거세왕, 알영,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오릉은 경주시 탑동 77번지에 있다.
삼국의 초창기는 아직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았다. 그 때는 고구려가 제가(諸加)회의, 백제가 정사암(政事巖)회의, 신라가 만장일치제로 유명한 화백(和白)회의에서 전쟁 등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한 시대였다. 경주시 동천동 507-7 소금강산 자락에 있는 표암(瓢巖)은 경주이씨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자. 화백 회의가 열리기도 한 신령한 땅으로 여겨지고 있다.
증거조작으로 국무총리의 집을 빼앗다
표암 오른쪽에는 또 하나의 신라 초기 유적이 있다. 탈해왕릉이다. 본래 탈해는 강력한 바다 세력이었던 듯하다. 그는 혁거세왕 39년(기원전 19)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나타난다. 그는 파사왕 22년(101)에 왕궁 월성이 지어지는 지금 반월성 자리의 꽤 괜찮은 집을 탐내었다. 그 집의 주인은 요즘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고위관리 호공이었다.
그런데도 탈해는 아무도 몰래 그 집 아래에 숯을 묻은 뒤 집주인 호공에게 "내 조상들이 살던 집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호공이 돌려줄 리가 없었다. 결국 왕이 주관하는 재판이 열렸다. 탈해는 "나의 조상이 대장장이였으니 집 안에 틀림없이 흔적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땅을 파니 과연 숯이 나왔다. 탈해가 조상을 대장장이였다고 하는 것은 자기 가문이 쇠(鐵)를 다루어 무기를 제작해내는 권력가 집안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쇠를 잘 다루면 권력을 잡았다
김해(金海)는 쇠(金)와 바다(海)를 가진 땅을 뜻한다. (김해 앞 들판은 조선 시대까지 바다였는데 식민지 때 메워서 평야를 만들었다.) 금관(金官)가야의 금(金)도 쇠를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주몽은 '활을 가장 잘 쏘는 사람'이었다.
주몽은 칼 가운데를 부러뜨린 후 반토막을 아내 유화에게 주면서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나거든 이것을 신표(信標)로 삼아 들고 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고 말한다. 김해, 금관가야, 주몽 이름 유래, 반 토막난 칼 등의 사례는 모두 철제 무기를 잘 다루는 자들이 권력도 잡았음을 증언한다.
박혁거세가 최초로 궁궐을 세운 곳인 창림사터, 그가 태어난 나정(사적 245호), 무덤이 있는 오릉(사적 172호), 6부 시조들을 섬기는 양산재, 경주이씨 탄강지이자 화백회의가 열렸던 장소로도 유서깊은 표암(경상북도 기념물 54호), 표암 오른쪽의 탈해왕릉(사적 174호), 양남면 나아리의 탈해 유허지(경상북도 기념물 79호), 탈해가 거짓 증언을 조작하여 당시 국무총리였던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는 설화가 남아 있는 반월성, 고려 초기 실권자 최승로의 설화가 깃든 중생사를 찾아 길을 떠나보자.
▲ 월성이씨의 시조가 처음 나타난 소금강산 표암 위에 세워진 기념비. 이곳은 화백회의가 열린 네 곳 중 한 곳으로 전해진다. ⓒ 정만진
우리나라에 철기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때는 중국에서 망명해온 위만이 고조선 준왕을 몰아내는 기원전 194년경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망하지만, 이전부터 철기 시대를 누렸던 우리 민족은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왕호(王號)를 사용한 부여 등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작은 나라들을 세운다.
수많은 소국들은 연맹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압록강 일대의 구려국(句驪國), 마한의 백제국(伯濟國), 진한의 사로국(斯盧國)이 두각을 나타내어 각각 일정 지역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성장한다. 강력 소국들이 본격적으로 주변을 정복하면서 나라의 규모를 키워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 박혁거세의 최초 궁궐터로 여겨지는 창림사터에 남아 있는 석탑 1기가 경주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사진 위). 박혁거세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오릉(탑동 77) ⓒ 정만진
삼국 중 신라가 제일 먼저 건국되었다?
삼국의 건국 순서 |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로 정한다. 926년 발해 유민들이 망명해 오자 그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도모한다. 936년 후삼국 통일 후에는 북진 정책을 펼쳐 고구려의 서울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는다. 왕건은 심지어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기면서 "임금은 1년에 100일 이상을 서경에 머물러야 한다"고 유언했다. 그러나 성종(982∼997) 이후 신라 6두품 출신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김부식도 신라 계열이었다. 서경 천도를 주장한 묘청의 1135년 반란을 진압한 후 쓴 삼국사기에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건국 시기가 기록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순이 사실일 터이다. ▲ 혁거세가 처음 나타난 나정(경주 탑동 700-1)과 6부 시조들을 제사지내는 양산재(나정 뒤) ⓒ 정만진 |
삼국사기는 초기 철기 시대 말엽인 기원전 57년에 혁거세, 기원전 37년에 주몽,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한다.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건국되었다'식의 역사 기록이 등장한 것은 신라 유학자들이 고려 정치의 실세로 부각된 데 따른 결과였다. 최승로, 김부식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오른쪽 박스 내용 참조)
경주 남산 창림사터는 박혁거세가 처음 궁궐을 지은 곳은 추정된다. 창림사터는 나정 뒤편의 남간사터 오른쪽 구릉이다. 신라의 본격적 궁궐 월성(月城)은 101년(파사왕 22)에 지어진다. 혁거세왕, 알영,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오릉은 경주시 탑동 77번지에 있다.
삼국의 초창기는 아직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았다. 그 때는 고구려가 제가(諸加)회의, 백제가 정사암(政事巖)회의, 신라가 만장일치제로 유명한 화백(和白)회의에서 전쟁 등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한 시대였다. 경주시 동천동 507-7 소금강산 자락에 있는 표암(瓢巖)은 경주이씨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자. 화백 회의가 열리기도 한 신령한 땅으로 여겨지고 있다.
증거조작으로 국무총리의 집을 빼앗다
▲ 신라 육두품 출신들은 고려 성종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시무28조를 만든 최승로. 선덕여왕릉에서 능지탑(문무왕 화장터 추정지)을 지나 조금 더 오솔길을 들어가면 최승로 설화가 전해지는 중생사가 나온다. 사진은 중생사의 마애불(보물 665호). ⓒ 정만진
표암 오른쪽에는 또 하나의 신라 초기 유적이 있다. 탈해왕릉이다. 본래 탈해는 강력한 바다 세력이었던 듯하다. 그는 혁거세왕 39년(기원전 19)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나타난다. 그는 파사왕 22년(101)에 왕궁 월성이 지어지는 지금 반월성 자리의 꽤 괜찮은 집을 탐내었다. 그 집의 주인은 요즘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고위관리 호공이었다.
그런데도 탈해는 아무도 몰래 그 집 아래에 숯을 묻은 뒤 집주인 호공에게 "내 조상들이 살던 집이니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호공이 돌려줄 리가 없었다. 결국 왕이 주관하는 재판이 열렸다. 탈해는 "나의 조상이 대장장이였으니 집 안에 틀림없이 흔적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땅을 파니 과연 숯이 나왔다. 탈해가 조상을 대장장이였다고 하는 것은 자기 가문이 쇠(鐵)를 다루어 무기를 제작해내는 권력가 집안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 탈해가 처음 나타난 경주 양남면 나아리의 유허지 ⓒ 정만진
▲ 주몽은 칼을 반으로 부러뜨린 후 절반을 유화부인에게 주면서 "아들이 태어나면 이것을 들고 나를 찾아오게 하시오. 증거물로 삼겠소."하고 말했다. ⓒ 정만진
김해(金海)는 쇠(金)와 바다(海)를 가진 땅을 뜻한다. (김해 앞 들판은 조선 시대까지 바다였는데 식민지 때 메워서 평야를 만들었다.) 금관(金官)가야의 금(金)도 쇠를 가리킨다. 그런가 하면 주몽은 '활을 가장 잘 쏘는 사람'이었다.
주몽은 칼 가운데를 부러뜨린 후 반토막을 아내 유화에게 주면서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나거든 이것을 신표(信標)로 삼아 들고 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고 말한다. 김해, 금관가야, 주몽 이름 유래, 반 토막난 칼 등의 사례는 모두 철제 무기를 잘 다루는 자들이 권력도 잡았음을 증언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