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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버나드 쇼'의 묘비명, 오역이었네

[열여섯 살의 아일랜드 여행기6] 더블린 작가 박물관을 찾다

등록|2014.07.31 14:58 수정|2014.08.01 09:13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처녀작 '더블린 사람들'을 읽고 있다. 주인공 '나'가 머피와 함께 건넜던('이상한 아저씨') 리피 강과 도더 강이 보이고, 레너한이 콜린의 뒤를 쫓던 조지 가('두 건달들')를 지난다. 작은 도시 더블린에서 거리와 지형을 따라 책을 읽는 일이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우물쭈물 살다 내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미리 밝히자면, 오역!)

이렇게 멋진 묘비명이라니.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이다.

말 한마디에도 그 사람의 세상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고 하지 않던가. 죽는 순간에도 저렇게 유쾌할 수 있다니. 생을 초월한 사람처럼 조금은 건방지고 도발적인 태도에 그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그가 아일랜드 극작가라는 것, 그것도 그냥 극작가가 아닌, '셰익스피어 이후의 최고의 극작가'라 칭송받는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학이 풍성한 나라 아일랜드. 인구 400만의 작은 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을 예이츠(Yeats), 베게트(Beckett), 헨니(Heaney)를 비롯 4명이나 받았다. 이 사람도 그 중 한 명이다.

1926년에 노벨상을 받은 '버나드 쇼'(아, 물론 노벨 문학상이라는 게 워낙 영미 문학 중심이기는 하지만). 이 작가를 만나기 위해 오늘은 '더블린 작가 박물관'으로 향한다.

▲ '더블린 작가 박물관' 정면. 교회 첨탑과 살림집 사이에 낀 자그마한 건물은 어찌보면 정말 초라하다. ⓒ 류옥하다


▲ 더블린 작가 박물관 입구에서. ⓒ 류옥하다


'우리는 붓으로 정복하겠다' 투쟁의 역사

작가 박물관은 1991년 더블린이 '유럽 문화의 도시'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멀지 않은 오코넬 거리에는 조이스의 동상이 있고, 맞은편에는 아일랜드 자유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위한 '아일랜드 추도 공원(The Garden of Remembrance)'이 있다. 바로 옆에는 자그마한 갤러리'The Hugh Lane'이 있다. 교회 첨탑과 살림집 사이에 낀 자그마한 건물은 어찌보면 정말 초라하다.

교실 한두칸 만한 곳에 시대별로 분류해놓은 작가들과 작품 원본, 그들이 썼던 메모와 편지, 타자기 등을 볼 수 있다. '걸리버 여행기', '드라큘라', '유토피아', '율리시즈', '고도를 기다리며' 등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책들도 있다.

마치 우리의 저항시인 윤동주, 한용운처럼 이들의 수많은 문학적 업적은 아일랜드 800년 식민지 역사에 '영국은 우리를 힘으로 정복했지만 우리는 붓으로서 정복하겠다'는 투쟁이기도 했다고. 워낙 아일랜드 문학의 영향력이 강해 영미 문학에선 아일랜드를 뺄래야 뺄 수 없다고 한다. 조이스의 문학세계에 대한 탐구 옆, 한쪽에 어릴적 '삼국지', '로마인이야기'와 함께 잠을 설치게 했던 '유토피아'의 토머스 모어(Thomas More)에 대한 소개가 반가웠다. 아, 알고봤더니 다른 토머스 모어(Thomas Moore)네.

문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작가 박물관은 필수 코스다. 서구의 교과서에 실려있는 작품들이 총집합해있는지라 교과서를 보고 찾는 대학생들, 인문학도도 많다고. 그런데, 박물관이 작가들의 지성을 담기에는 너무 비좁아보였다. 멀지 않은 곳의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는 잘 팔리는 맥주 덕인지 큼지막도 한데.

▲ 조이스 색션. ⓒ 류옥하다


한쪽에서 버나드 쇼의 섹션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우물쭈물 살다가 이럴 줄 알았지'의 원문을 읽을 수 있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어라, 그런데 아무리 봐도 번역이 이상하다. 어디에도 '우물쭈물'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데? 부모님께 여쭤보니, '우물쭈물~'은 국내 한 통신사의 의도적인 오역이었던 듯하단다고. 'show'라는 브랜드와 버나드 '쇼'가 비슷하다는 데서 착안하여 묘비명을 재밌게 번역, 마케팅에 활용한 것.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은 "오래 살다보면 이런 일(죽음) 생길 줄 내가 알았지!"가 되겠다. 마케팅의 의도는 그렇다 쳐도, 오역이 걸러지지 않은 채 퍼지고 있는건 문제다.

이곳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미 문화에서 인상깊은 것은 문학이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펍에서 만난 사람들도 특별히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도, 사회적 지위가 낮더라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지역 사회에 도서관이 잘 자리잡고 있을 뿐더러 독서가 사람들에게 일종의 '습관'이다.

우리의 책읽기는? 어릴 때는 입시를 준비하기 위한 방편으로 책을 읽다가, 청소년 때는 입시에 치여 수능위주의 독서를 주로 하며, 20대 이후로는 취업서나 이른바 '자기 계발서'나 힐링서를 사서 읽는다. 사회 전반에서 문학, 인문학이 침식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고등학생 이상의 평균 독서량이 일년에 9.5권이라던가. 고등학교에서 '신'급으로 추양(?)받는 유명 온라인 강사가 독서는 사치라고 가르치는 판이니.

가난은 죄악이며 성장과 돈이 '신'이라는 논리를 좇다가 결국 발견한 것은 우리들이 '아파트 속에 길들여진 돼지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한 자본주의 논리와 '합리적 생각'이 우리의 '사유' 능력을 감소시킨 건 아닐까. 과연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었는지, 말 그대로 정말 '부유'해진 것인지, 이 시대의 인간성과 문화의 붕괴를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 사회가 생각할 줄 알고, 고민할 줄 알고, 사색할 줄 아는 능력이 길러졌으면... 책 좀 읽자는 이야기가 길었다.
덧붙이는 글 류옥하다 기자는 열여섯 살 학생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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