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서평]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요컨대 그 시대는 현재 시대와 아주 비슷해서, 그 시대의 가장 요란한 권위자들 중 일부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시대가 최상급으로만 견주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고집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이다. 여기서 두 도시는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를 가리키는데, 이 문장에서 좋은 쪽으로 말하는 건 런던이고 나쁜 쪽으로 말하는 건 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배경이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 전후라 그렇다.
이 문장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마지막 부분인데, '그 시대'와 '현재 시대'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프랑스 혁명 전후와 <두 도시 이야기>가 출간된 1850년대가 비슷하다는 얘기다. 찰스 디킨스는 혁명의 불길이 지나가고 오히려 산업혁명으로 노동 계급이 안정을 되찾으며 전체적으로 번영을 추구했던 1850년대의 영국이,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 전후의 프랑스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출간 이후 2억 부 이상 팔린 <두 도시 이야기>는 단행본 소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작품으로 유명하고, 가장 찰스 디킨스답지 않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 두 사실 간의 상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가장 찰스 디킨스답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에, 엄청난 인기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
찰스 디킨스 답지 않은 소설 <두 도시 이야기>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당대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끌어왔다. 그러며 그 역사적 사건 위에 수많은 개개인의 삶을 올려놓는다.
그 삶의 중심에는 복수와 로맨스 그리고 희생과 책임감 등이 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제라는 것은 차치해두고, 사회비판이나 풍자보다 개개인의 삶을 보여주는데 치중하고 있는 것이 그 답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소설가가 사회비판이나 풍자를 아예 버리지 않는 선에서 개개인의 삶을 그리며 그들을 보듬어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두 도시 런던과 파리에 대한 묘사가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프랑스혁명 당시의 프랑스를 1850년대 영국과 빗대며 매우 좋지 않게 그리고 있는 반면, 프랑스혁명 당시 영국의 런던은 매우 '괜찮은' 도시로 그리고 있다.
물론 치안이 불안하고 법이 백성을 억압하며 고루하기 짝이 없는 체제이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프랑스 파리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파리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런던에서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뜻하지 않은 애국주의 반응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디킨스는 이 작품에서 유독 개개인의 삶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정확히는 그들이 보여주는 헌신과 희생, 책임감 등의 지극히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면모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사회가 뒤바뀌며 역사가 요동치는 격변기에 어찌 하나같이 그런 모습들만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생기는 부분이지만, 작가는 이야말로 프랑스 혁명 당시 추구했어야 할 바라고 말하고 있다. 즉, 1850년 당대 영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프랑스 혁명이었어야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더욱이 당대에서 70년이나 전의 다른 나라 이야기인데 말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찰스 디킨스의 기존 소설과 달리 이 소설에서 프랑스 혁명은 큰 의미가 없는 배경에 불과했다. 1850년대 당시 런던을 배경으로 해도 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치밀한 계산에서 비롯된 기획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미있는 소설
그럼에도 프랑스 혁명 전야의 프랑스 파리를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그의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수백 년이 지나도 프랑스 혁명 전야의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굶주림으로 시작되어 "빵을 달라", "자유와 평등을 달라"의 외침이 온 나라를 뒤덮은 프랑스 혁명.
"굶주림은 그에 알맞은 곳은 어디든 머물렀다. 범죄와 악취로 가득한 좁고 구불거리는 길은 다른 좁고 구부러진 길로 갈라지고, 온통 누더기와 나이트캡을 쓴 사람들로 우글거리면서 누더기와 나이트캡 냄새를 풍기고,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병들어 보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또한 쉴새없이 전개되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재밌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가 치밀한 계산을 했던, 이 소설이 그 답지 않은 소설이던, 이 소설을 둘러싼 어떤 해석도 상관없이 마냥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야말로 소설다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재미에 천착해서 보자면 말이다.
<두 도시 이야기>는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끊임없이 재탄생 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그 시대와 현재 시대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18세기 프랑스 혁명 전야의 프랑스 파리와 1850년대 영국 런던과 2010년대 우리나라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금 우린 최고의 시간에 살고 있을까, 최악의 시간에 살고 있을까. 빛의 계절에 살고 있을까, 어둠의 계절에 살고 있을까. 지금은 희망의 봄일까, 절망의 겨울일까.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어서 빨리 잡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영국을 대표하는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이다. 여기서 두 도시는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를 가리키는데, 이 문장에서 좋은 쪽으로 말하는 건 런던이고 나쁜 쪽으로 말하는 건 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배경이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 전후라 그렇다.
이 문장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마지막 부분인데, '그 시대'와 '현재 시대'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프랑스 혁명 전후와 <두 도시 이야기>가 출간된 1850년대가 비슷하다는 얘기다. 찰스 디킨스는 혁명의 불길이 지나가고 오히려 산업혁명으로 노동 계급이 안정을 되찾으며 전체적으로 번영을 추구했던 1850년대의 영국이,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 전후의 프랑스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출간 이후 2억 부 이상 팔린 <두 도시 이야기>는 단행본 소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작품으로 유명하고, 가장 찰스 디킨스답지 않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 두 사실 간의 상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가장 찰스 디킨스답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에, 엄청난 인기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
찰스 디킨스 답지 않은 소설 <두 도시 이야기>
▲ <두 도시 이야기> ⓒ 창비
그 삶의 중심에는 복수와 로맨스 그리고 희생과 책임감 등이 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제라는 것은 차치해두고, 사회비판이나 풍자보다 개개인의 삶을 보여주는데 치중하고 있는 것이 그 답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소설가가 사회비판이나 풍자를 아예 버리지 않는 선에서 개개인의 삶을 그리며 그들을 보듬어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두 도시 런던과 파리에 대한 묘사가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프랑스혁명 당시의 프랑스를 1850년대 영국과 빗대며 매우 좋지 않게 그리고 있는 반면, 프랑스혁명 당시 영국의 런던은 매우 '괜찮은' 도시로 그리고 있다.
물론 치안이 불안하고 법이 백성을 억압하며 고루하기 짝이 없는 체제이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프랑스 파리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파리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런던에서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뜻하지 않은 애국주의 반응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디킨스는 이 작품에서 유독 개개인의 삶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정확히는 그들이 보여주는 헌신과 희생, 책임감 등의 지극히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면모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사회가 뒤바뀌며 역사가 요동치는 격변기에 어찌 하나같이 그런 모습들만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생기는 부분이지만, 작가는 이야말로 프랑스 혁명 당시 추구했어야 할 바라고 말하고 있다. 즉, 1850년 당대 영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프랑스 혁명이었어야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더욱이 당대에서 70년이나 전의 다른 나라 이야기인데 말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찰스 디킨스의 기존 소설과 달리 이 소설에서 프랑스 혁명은 큰 의미가 없는 배경에 불과했다. 1850년대 당시 런던을 배경으로 해도 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치밀한 계산에서 비롯된 기획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미있는 소설
그럼에도 프랑스 혁명 전야의 프랑스 파리를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그의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수백 년이 지나도 프랑스 혁명 전야의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굶주림으로 시작되어 "빵을 달라", "자유와 평등을 달라"의 외침이 온 나라를 뒤덮은 프랑스 혁명.
"굶주림은 그에 알맞은 곳은 어디든 머물렀다. 범죄와 악취로 가득한 좁고 구불거리는 길은 다른 좁고 구부러진 길로 갈라지고, 온통 누더기와 나이트캡을 쓴 사람들로 우글거리면서 누더기와 나이트캡 냄새를 풍기고,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병들어 보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또한 쉴새없이 전개되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재밌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가 치밀한 계산을 했던, 이 소설이 그 답지 않은 소설이던, 이 소설을 둘러싼 어떤 해석도 상관없이 마냥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야말로 소설다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재미에 천착해서 보자면 말이다.
<두 도시 이야기>는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끊임없이 재탄생 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그 시대와 현재 시대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18세기 프랑스 혁명 전야의 프랑스 파리와 1850년대 영국 런던과 2010년대 우리나라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금 우린 최고의 시간에 살고 있을까, 최악의 시간에 살고 있을까. 빛의 계절에 살고 있을까, 어둠의 계절에 살고 있을까. 지금은 희망의 봄일까, 절망의 겨울일까.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어서 빨리 잡아 세워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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