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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세상, 영원하진 않으리

[서평]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등록|2014.08.04 09:27 수정|2014.08.04 09:27
일제 강점기 대표적 친일 문인 이광수. 그의 대표작 무정은 이광수가 변절하기 전, 조국 독립에 몸담고 있던 시기에 집필되어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무정>은 그가 친일로 변절할 수밖에 없었음을 암시하는 듯한 작품이다.

우선 제목을 한 번 살펴보자. <무정>은 당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의미한다.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무정은 이광수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담은 소설이다. 박영채라는 캐릭터에 많은 관심이 갔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입체적 인물이다. 단호히 말하자면 그녀는 구여성이다. 이는 형식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김선형과는 극명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여성이지만 투옥된 아버지 때문에 기생이 되고, 배학감에게 겁탈 당하는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영채의 모습이 작가 본인의 모습 자체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20세기 초, 세계 격변의 시기에 조국이 독립하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조국 근대화밖에 없다고 믿었던 춘원 이광수의 계몽주의적 사상은 번번히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유학의 잔재, 그 마지막 불씨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세력과, 신문물을 받아들이지만 그 본연의 모습은 잊은 채 형식만을 논하는 가짜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광수가 생각했을 조국 근대화의 벽은 한없이 높았을 것이다.

현실에 억압당하는 이러한 모습이 박영채와 이광수의 공통점이다. 처녀성을 잃은 것에 분개해 자신의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 영채. 그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오직 이형식뿐이었다. 영채가 형식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은 이광수의 내면, 즉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고 추억을 곱씹어보고 싶은 속내를 그린 것은 아닐까.

친일파라는 꼬리표는 그의 작품세계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를 떠나 그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것이 그의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정>은 대단히 긴 장편소설이다.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도 있는 분량을 독자의 흥미를 잃지 않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이유는 끊임없이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형식의 모습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형식은 과연 영채에게 진심이었을까. 이형식은 선형과 영채의 차이를 '선녀와 매음녀'라고까지 했다. 그래, 하지만 형식은 분명 영채를 사랑했다.

영채가 혼자 어떤 남자로 더불어 청량리에 가 있어! 더구나 밤이 여덟시나 지났는데!  하고 형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식은 전속력으로 다방골 천변으로 내려온다. '옳다! 청량리로 가자 하였다.' 형식의 귀에 영채가 우는 소리로 '형식 씨, 나를 건져 주시오, 나는 지금 위급하외다'하는 듯하다. 형식은 지금 광충교로 지나가는 동대문행 전차를 잡아탈 양으로 구보로 종각을 향하여 뛰었다.(이하생략)

영채의 처녀성 때문에 그도 많은 고뇌를 했다. 그도 사내인데 왜 안 그러겠는가. 그럼에도 그녀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한편으론 가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책임질 순 없었다. 그것은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이었다.

이광수는 평소 교육을 통한 민족의 계몽을 중시했다. 그러한 신념은 그의 소설 속에서 사제관계를 많이 등장시켰다. 소설 초반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고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연애 소설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개개인의 고민과 갈등은 결말 부분에서 갑자기 크게 부각된 공리성에 묻혀버린다.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앞으로의 무정한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라는, 밝은 미래를 우리가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서양식 문물이 좋은 것이라 여기고 비판적 사고 없이 받아들인 선형의 부모님, 생물학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그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겠다는 형식의 모습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어 이광수가 독자를 자각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식은 수해현장을 보며 우리 민족이 가난한 이유는 미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으로 그들을 깨우쳐야 한다고 느낀다. 그가 생각한 교육은 '서구 문명'이다. 형식의 이러한 생각은 문제점을 지닌다. 우리 민족이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족 가난의 원인은 교육의 부족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병욱은 자신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이광수는 결국 근대주의적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역설하였다. 당대의 소설이 지향해야 할 민족주의적 리얼리즘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의 긍정적 평가도 받고 있지만, 반대로 그가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지 못하고 이상만 앞세웠을 뿐이라는 부정적 평가 또한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은 전개상 다소 개연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아픈 주인공들에게도 밝고 희망찬 미래는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구체화 되지 못하고 막연한 틀에 박힌 조국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히 대단한 작품이다. 그 사실만은 분명하다. 조국 근대화라는 계몽적 사실과 과거의 사랑과 현재의 안위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자의 이야기. 이 두 가지 갈등구조가 함께 전개되는 소설은 당시로써는 매우 신선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금일의 문학은 초연히 종교 윤리의 속박 이외에 입하여 인생의 사상과 감정과 생활을 극히 자유롭게, 여실하게 발표하고 묘사하"되 "도덕률을 사려함이 필요하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개인의 자율적인 삶의 원칙을 문학을 통하여 보편화하는 데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중심적 쾌락의 표출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문학을 통해 좀 더 나은 도덕적 삶의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구조 앞에서 나약하다. 첫 문단에서 말했다시피 <무정>은 이광수를 각성하게 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이 변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조국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바뀌겠다.' 이는 즉 변절을 뜻하는 말이다. 그가 변절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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