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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 선조에게 바친 약밥에 독 풀었나

[참모열전 19회: 2부] 선조의 총애받은 이이첨, 광해군의 핵심참모가 되다

등록|2014.08.06 11:13 수정|2014.08.06 11:13

▲ 드라마 <왕의 여자>의 이이첨(임혁 연기). ⓒ SBS


광해군의 참모인 이이첨은 연산군 정권의 핵심인 이극돈의 5대손이다. 이 집안은 연산군 정권이 전복된 1506년 이후로 오랫동안 차별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그 이후 근 100년간 이 집안에서는 과거시험 대과(大科) 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인 이이첨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탁월한 실력을 가졌지만, 과거시험 소과(小科) 급제자로서 종9품 광릉참봉에 만족하며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이첨에게 인생 역전의 발판을 제공한 것이 임진왜란(1592~1598년)이었다. 일본군이 세조(수양대군)의 무덤인 광릉에 불을 지르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 그는 불길을 뚫고 세조의 영정을 구해냈다. 그런 뒤에, 그는 영정을 품에 안고 일본군을 피해 가며 선조의 임시 궁궐에 달려가 영정을 바쳤다. 이때가 서른세 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선조의 총애를 입었기 때문인지, 이이첨은 전쟁 중에 벌어진 과거시험 대과(大科)에서 당당히 합격증을 받았다. 이극돈 이후로 100년 만에 이 집안에서 대과 급제자가 나온 것이다.

광해군 핵심참모 된 이이첨, 광해군을 지키다

선조의 총애 속에 탄탄대로를 달리던 이이첨은 전쟁 막판인 1598년 연초에 또 다른 인물과 연을 맺게 된다. 미래의 태양인 광해군을 보좌하는 세자시강원의 사서(정6품)가 된 것이다. 이때 그는 서른아홉 살이었다. 이 일은 이이첨을 광해군의 핵심 참모로 만든 중요한 계기였다.

전쟁 기간 중에 광해군의 위상은 대단했다. 도망 다니기 바쁜 선조를 대신해서 전쟁을 총지휘한 그는 임진왜란 기간의 실질적 임금이었다. 평소 그를 못마땅해 했던 선조는 일본군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그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자기보다 유능한 서자를 보면서 선조는 열등감을 느꼈지만, 전쟁을 무사히 끝내려면 서자의 위상을 세워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광해군과 인연을 맺게 됐으니 이이첨으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뒷간에 들어갈 때 생각이 다르고 나올 때 생각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2년에 선조는 32세 연하의 인목왕후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1606년에는 인목왕후의 몸에서 영창대군이라는 적자를 얻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시선은 갈수록 싸늘해졌다. '내가 너 덕분에 왕위를 지켰다'는 생각은 말끔히 사라지고 '니가 내 덕분에 전쟁을 지휘해 봤지'라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선조가 어린 영창대군을 좋아하고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자, 광해군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다.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선조는 어떻게든 영창대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애썼다.

▲ 선조의 무덤인 목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의 동구릉에 있다. ⓒ 김종성


이때, 이미 광해군의 사람이 된 이이첨은 자기 주군을 굳건히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이이첨은 자기의 출세 길을 열어준 선조와 등을 돌릴 결심을 품었다. 광릉의 불길을 뚫고 선조에게 달려갈 때처럼, 이번에는 선조의 노여움을 뚫고 광해군에게 달려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이첨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영의정 유영경에 맞섰다. 그는 유영경 세력을 비판하면서 광해군 사수 운동을 벌였다. 이런 그의 행동은 와병 중인 선조의 눈에 거슬렸다. 이로 인해 그가 선조의 총애를 잃게 되자, 유영경 일파는 이이첨을 귀양 보낼 것을 주장했다. 선조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때가 선조 41년 1월 26일(양력 1608년 3월 12일)이었다.

그런데 이이첨은 곧바로 귀양을 떠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에 2월 1일(양력 3월 16일) 선조가 죽었다. 그러고 나서, 아주 이례적으로 다음 날 광해군이 왕이 되었다. 왕이 죽으면 보통 5일 뒤에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선례와 비교하면, 광해군의 등극은 상당히 빠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이이첨은 귀양을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가 가야 할 곳은 새로운 임금의 옆자리였다.

이런 과정 때문에 이이첨은 두고두고 의혹을 받았다. 귀양 명령을 받고 곧장 출발하지 않은 것은 선조가 죽을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이런 의혹을 갖는 사람들은 그가 궁녀 김개시와 더불어 선조를 독살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런 인식은 오늘날의 역사서에 널리 퍼져 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의 사망은 독살과 '무관'

이이첨은 정말로 선조를 독살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만들었을까? 이이첨이 김개시와 함께 선조를 독살했는지를 규명하려면, 선조가 정말로 독살됐는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다.

선조가 죽은 뒤에 기록된 공식 역사서는 <선조실록>이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정권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에 따르면 선조의 사망 원인은 독살과는 무관하다. 선조 40년 10월 9일자(1607년 11월 27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몸이 차갑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약을 먹으면 다시 회복되는 증상을 되풀이했다. 이런 증상이 반복되고 악화되던 상태에서 3개월 보름 뒤에 사망한 것이다.

몸이 차갑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기절했다가 금방 회복되는 증상은 중기(中氣)에 가까운 병이다. 외형상으로는 중풍과 유사하다. 허준은 <동의보감> 내경 편에서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지나치게 분노하면 기의 운행을 거스르게 되어 중기 증상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질투심과 분노를 잘 억제하지 못하는 선조의 성격이 중기에 걸린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허준은 "중풍은 난치병이지만, 중기는 약만 잘 쓰면 금방 회복되는 증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기 증상이 계속 반복되면 치명적인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선조는 투병 중에도 성격적 약점을 여전히 드러냈다. 또 그는 "몸을 따뜻하게 하라"는 어의의 충고를 지키지 않은 적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선조는 동일한 증상을 계속 반복하다가 사망했다. 이것이 <선조실록>에 기록된 선조의 사망 원인이다. 따라서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의 사망은 독살과 무관하다.

▲ 선조가 사망한 장소인 덕수궁의 내부 모습. 서울시 중구 정동 소재. ⓒ 김종성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정권은 광해군과 이이첨·김개시가 선조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가졌다. 그래서 진상 규명에 착수했지만, 끝내 의혹을 밝히지 못했다. 당시의 광해군 세력은 완전히 파멸된 상태였다. 그래서 인조 정권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것을 부정할 세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인조 정권은 광해군·이이첨·김개시의 독살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

인조 정권이 찾아낸 것은 광해군 측이 사망 당일 선조에게 약밥을 주었다는 사실 정도였다. 이 점은 인조가 죽은 뒤에 기록된 인조 1년 9월 14일자(1623년 10월 7일자) <인조실록>에 기록되었다. 여기서는, 김개시가 선조에게 올린 약밥에 독약을 넣었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인조 1년 9월 14일자 <인조실록>에서 독살 의혹을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독약을 넣었다는 말이 있다'는 정도로 끝맺은 것이다. 이것은 인조 정권이 독살 혐의에 확신을 갖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위의 <인조실록>은 본문과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논평에는 해당 사실을 기록한 사관(史官)의 의견이 실려 있다. '김개시가 올린 약밥에 독약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은 논평에 실려 있다.

독살 의혹을 사관의 의견 형식을 빌려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나마 그런 의혹을 실록 본문에 싣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합의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관이 개인적인 논평을 다는 것에 그친 것이다.

독살 혐의를 밝히려는 노력이 끝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기록으로 조선 후기 학자인 박세채(1631~1695년)의 문집인 <남계집>이 있다. 이 문집에는 선조의 시신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성협이라는 의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선조가 죽은 뒤에 시신을 확인한 성협은 "임금의 몸이 검푸르고 이상하다"며 "바깥에서 하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다"란 말을 남겼다.

시신이 검푸르다고 하여 곧바로 독살을 단정할 수는 없다. 심혈관계 환자들 중에는 혈색이 검푸른 이들이 있다. 그런데도 성협이 독살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말을 한 것은, 그가 이미 독살설을 확신한 상태에서 시신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바깥에서 하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가 독살설에 대한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시신을 보러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광해군이 실각한 뒤에 성협의 말을 근거로 광해군 규탄 상소를 준비한 인물이 원두표라는 사람이었다. 원두표는 광해군을 실각시키는 데 참여한 공로로 공신이 되고 훗날 장관급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선조 독살설을 담은 상소를 준비하던 원두표는 얼마 안 있어 스스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남계집>에 따르면, 박세채가 "그때 왜 상소를 포기했나?"라고 묻자, 원두표는 "세세한 사실까지 다 들추어봤지만, 약밥에 독이 들었다는 증거는 없었다"면서 "경솔히 다룰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인조 정권이 광해군의 선조 독살을 밝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모두 다 허사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조 독살설, 기정사실화 하지 못한 인조 정권

만약 선조가 독살됐다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인조 정권은 그것을 어떻게든 기정사실로 확정했을 것이다. 인조 정권의 주장을 반박할 세력이 쿠데타로 전복됐기 때문에, 약간의 증거만 있었더라도 얼마든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 궁궐 병원인 내의원 건물에 걸려 있던 현판. ‘임금의 몸을 보살피고 임금의 약을 조절한다’는 의미의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調和御藥)’이란 글귀가 쓰여 있다. 사진은 창덕궁 내부의 모습. ⓒ 김종성


상황이 이 정도였다면, 독살설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되면 이이첨 역시 독살설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선조의 귀양 명령을 받고도 머뭇거린 것은 평소에 선조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선조의 기력이 쇠하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사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시일을 끈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조의 죽음이 그에게 행운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선조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이첨은 자신을 출세시켜준 사람을 배신할 수는 있어도, 독살할 정도까지 악랄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선조의 총애를 발판으로 중앙정계에 뛰어오른 이이첨은 이렇게 선조의 죽음 덕분에 다음 태양인 광해군의 최측근 참모가 되었다. 그가 광해군과 함께 어떤 정치를 펼쳤으며 어떻게 운명을 마감했는지는 마지막 3부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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