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공원에서 보는 항일의 역사
국가사적 62호 달성토성을 꼼꼼하게 둘러보니 (하)
▲ 상화시비 ⓒ 추연창
나라가 망해가는 시점인 1909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달성공원을 찾아 신사에 참배하고 기념식수한 일본 향나무, 성공하지 못한 동학혁명을 말해주는 최제우 동상,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이 달성을 공원화했는데 복원은 잊고 오히려 꽃사슴을 기증하여 오히려 동물원화를 촉진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비, 친일파 대구부사가 부수어버린 대구읍성과 경상감영의 흔적 관풍루.....
달성공원 안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망국의 흔적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저항의 뜨거운 역사를 찾는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 이상화를 기리는 기념물이다. '상화 시비'.
1948년에 세워진 '상화 시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로, 호랑이 울과 코끼리 울 사이에 있다. 시비에는 '나의 침실로'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시비를 보면서 문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겨져 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해설을 맡은 정만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예술인은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대구에는 이상화 관련 유적지가 많다. 대곡동에 그의 묘소가 있고, 계산동에 마지막으로 그가 살았던 고택이 있다. 수성못 아래 들안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착상지로 알려져 있으며, 수성못둑과 두류공원에 시비가 각각 건립되어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의 생가가 제대로 보존,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 '서침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회화나무. 세종 때 조정에서 서씨세거지인 이곳이 필요하니 정부에 헌납하면 그 대신 다른 곳의 넓은 땅과 큰 벼슬을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오자 서침 선생은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대신 이 지역 사람들의 환곡을 좀 감해달라"고 하여 성사시켰다. 이 나무에 '서침나무'라는 미름이 붙은 것은 훌륭한 선비를 기리고자 하는 대구시민들의 마음의 발로이다. ⓒ 추연창
상화 시비를 뒤로하고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원숭이 울을 지나면서 바로 달성서씨 유허비가 나타났다. 이곳에 달성서씨 유허비가 세워진 데는 첫째, 달성공원 일대가 본래 달성서씨네 땅이었기 때문이고, 둘째, 세종대왕 시절 정부에서 달성서씨 집안을 보고 이곳을 정부에 헌납하면 그 대신 넓은 땅과 큰 벼슬을 주겠다고 했을 때 서침 선생이 보여준 위대한 반응 때문이다.
서침 선생은 "다른 땅도 벼슬도 다 원하지 않고, 대신 대구 사람들의 환곡을 감해주면 충분하다"고 답변, 이를 성사시켰다. 대구사람들은 서침 선생의 덕행에 감복하였고, 1665년에는 연구산(제일중학교 자리)에 그를 기려 귀암서원을 열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달성공원의 '어린이헌장 비' 옆 거대한 회화나무에 '서침나무'라는 이름을 붙여 그를 숭앙하고 있기도 하다.
▲ 이상룡 기념비 뒤로 허위 순국비가 보인다. ⓒ 추연창
달성서씨유허비 바로 아래에는 이상룡 구국비가 있다. 이상룡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이국땅에서 병사한 투사이다. 망국을 앞둔 1909년 신민회 간부들은 망명 투쟁을 결의했고, 이상룡도 안동의 집 임청각(보물 182호)과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온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상룡 구국비 바로 아래에는 허위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허위 비는 1962년, 이상룡 비는 1963년에 세워졌다. 시비 건립 시기의 앞뒤처럼, 허위는 이상룡보다 앞선 시대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95년 을미의병, 1907년 정미의병 등에 창의한 의병대장으로,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 때는 선봉장을 맡아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지원군이 늦어 서울 점령에는 실패했다.
그 이후에도 허위는 임진강, 한탄강 일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이완용은 그에게 대신이나 관찰사 자리를 주겠노라 회유했다. 허위는 단연코 이완용의 회유를 물리치고 계속 투쟁했지만, 끝내 1908년 일본군에 체포되어 10월 21일 순국했다.
▲ 신사 ⓒ 추연창
허위 순국비에서 옆으로 내려가니 테니스장이 나타났다. 하지만 테니스장 따위가 답사 대상지가 될 리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국가사적지 안에 테니스장을 만들고, 거기서 테니스를 치는 터무니없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날 따름이다.
지금은 테니스장 철망 밖에 나뒹굴고 있는 신사 잔재를 보려고 한다. 돌을 기증한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돌이다. 1966년 신사를 철거할 때 어쩌다 남은 돌이 이곳으로 굴러와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1945년에 독립을 이루었는데 일본 신사는 1966년에야 부쉈다고?
정만진 해설가는 "일제는 우리의 국가사적 달성에 서려있는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1905년 이곳을 최초로 공원화했고, 1906년에는 자기들 천황에게 절을 하는 요배전을 지었습니다"면서 "그리고 본격적인 신사는 1914년에 건립되는데, 해방 이후 1946년에는 내부만 철거한 후 단군을 기리는 천진전(天眞殿)으로 사용하게 됩니다"하고 내력을 설명했다.
신사 건물을 단군 성전으로 사용했다는 해설을 들으니 은근히 기가 막혔다. 그것도 1966년까지 20년 동안이나 계속 그렇게 했다니 이런 어불성설이 없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일제 청산에 이처럼 미적대고 우왕좌왕하는 것일까?
▲ 향토역사관 내부 ⓒ 추연창
신사 주춧돌에서 몸을 돌리면 바로 향토역사관 안으로 들어간다. 달성의 역사만이 아니라 대구 일원의 긴 시간을 보여주는 곳이다. 달성(공원) 답사의 마지막 여정으로 추천할 만한 최적의 공간이다. 마치 강의를 듣고 나서 총정리를 하는 듯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달성(공원) 답사 순서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본다. 복개도로에서 해자와 절벽을 활용해 축성된 달성토성의 진면목 감상- 정문으로 들어와 일본신사 도리이 터를 지나 순종나무- 최제우 동상- 박정희 꽃사슴 기증비- 관풍루- 성곽길 걷기- 상화 시비- 달성서씨 유허비와 서침나무- 이상룡 구국비- 허위 순국비- 신사 주춧돌- 향토역사관을 순서대로 걸었다. 그리고 이 순서를 달성(공원)을 답사하시려는 분들께 권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동물원이 옮겨지고, 수백 그루의 일본 향나무들이 베어져 국가사적다운 달성을 보게 될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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