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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보내달라"고 한 47세 기자를 아십니까

기자로 일하다 1차세계대전 참전한 찰스 에드워드 몬테그

등록|2014.08.08 11:57 수정|2014.08.08 15:19
지난 4일은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래서 4일 영국 글레스고어와 벨기에에서는 1차 세계대전 10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은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을 기반으로 한 연합국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동맹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총 900만 명 이상의 군인들이 생명을 잃었다.

찰스 에드워드 몬테그(1867~1928)는 영국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조망하는 것은 사회지도층 병역 기피가 만연하고 군 의문사가 끊이지 않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몬테그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 아일랜드 가톨릭 신부였다. 몬테그는 옥스퍼드대학교를 다녔고 대학생 시절부터 <맨체스터 가디언>(현 <가디언>)에 정기적으로 서평을 기고해 주목을 받았다. 그런 인연으로 1890년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맨체스터 가디언> 기자로 입사한다. 그리고 기자로 이름을 날린다.

이후 <맨체스터 가디언> 편집장이 된 몬테그는 여러 칼럼과 사설을 통해 "영국은 아일랜드를 독립시켜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한편, 영국의 보어전쟁 참전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치면서 전쟁반대주의자로 주목을 받는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전운이 감돌자 몬테그는 영국군 참전을 적극 반대한다. 그러나 그의 반대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1914년 8월 4일 영국은 참전을 결정한다. 그러자 몬테그는 정부를 지원해 전쟁이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국방부 압박해 전투병으로 입대... 당시 그의 나이는?

▲ 몬테그 기자. ⓒ spartacus-education

당시 영국군 입대 제한 나이는 42세였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발발 당시 몬테그의 나이는 입대 제한 나이를 다섯 살이나 초과한 47세였다. 그는 아내와 일곱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그러나 몬테그는 영국 국방부에 서신을 보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제발 군대에 입대시켜 달라"라고 간청한다.

영국 국방부는 그의 집요한 압력과 회유에 입대 연령이 지난 그의 입대를 특별히 허락한다. 그는 신체검사장에서 흰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군의관에게 나이를 속인 뒤 신체검사를 통과, 1914년 12월 23일 입대한다.

군사훈련을 마치고 그 다음해인 1915년 몬테그는 프랑스 서부전선에 전투병으로 배치된다. 당시 몬테그는 지인에게 이런 서신을 남겼다.

"그동안 아무도 서부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네. 이곳 참호에는 들쥐가 수도 없이 들끓고 있어. 우리가 참호에서 잠든 사이 배고픈 들쥐들이 우리 군복과 배낭을 온통 갉아먹지. 우리 군복과 배낭은 온통 구멍 투성이야. 내 코트 주머니에 과자부스러기가 있었는데, 내가 잠든 사이 들쥐들이 내 코트주머니를 통째로 먹어버렸더군.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들쥐들이 나와 우리 군인들의 살을 파먹지 않는다는 점이야."

나중에 영국군은 참호에 넘쳐흐르는 들쥐를 잡기 위해 개를 키우기도 했다.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필립 깁스는 서부전선에서의 몬테그를 이렇게 기록했다.

"몬테그는 전투보병으로 입대한 지 얼마 안 돼 하사관을 거쳐 소위로 진급했다. 그후 그는 감찰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전선에서 아주 예의가 바르면서 또 진저리가 날 정도로 용감하다. 그는 적군의 포격을 받는 상황도 여유롭게 즐기는 것 같다. 그는 솔직하고 마음이 항상 열려있다. 가톨릭 신부의 아들인 그가 한 번은 '전쟁터에서 기독교윤리를 지키기는 불가능하다'라고 내게 토로했다. 그는 내게 '일단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정상 상황으로 돌아와서 다시 카톨릭 윤리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1915년 어느 날, 독일 군인들과 참호 속에서 전투를 치르던 몬테그는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져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진다. 평소 몬테그를 '백발 장교'로 놀리던 상관들은 몬테그가 부상을 입은 뒤 '42세 이상 군인은 누구도 예외 없이 전방 참호에서 전투병으로 근무를 할 수 없다'라는 규칙을 새로 세운다. 이로써 몬테그는 영국 군인 중 유일하게 1차세계대전 중 전방참호에서 전투를 치른 47세 군인이 됐다.

▲ 1차세계대전 당시 장교로 근무했던 몬테그 기자 ⓒ spartacus-education


퇴원 후 몬테그는 전투장교에서 정보장교로 보직이 변경된다. 그 후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2년 동안 자신의 기자 경험을 살려 서부전선에 대한 전쟁 기록을 남기는 일을 맡게 된다. 또한 전쟁 기간 중에 참호를 방문한 영국 수상 데이빗 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조르즈 클레망소, 영국 작가 조지 버나드 쇼우, H. G. 웰즈의 전방 참호 안내를 맡기도 한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몬테그는 <맨체스터 가디언>에 복직해 1925년 은퇴할 때까지 편집자로 근무한다. 그는 1922년까지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적 사색을 담은 수필집 <환멸>과 두 권의 소설 등을 발간한다. <환멸>을 통해 몬테그는 1차세계대전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지만 인간으로서는 실패했다. 전쟁 기간 동안은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젊은이들의 청춘은 무너져갔고, 친구들은 죽어나갔고, 여성들은 후방에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고통과 피땀이 넘쳤고 모든 것은 암흑 속에 빠졌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에게 사기 당한 것이다."

<환멸>은 전쟁의 비인간성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고발한 수필집으로 오늘날 영국 전후 문학의 중요한 문헌 중 하나로 평가된다.

몬테그 기자는 영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을 늘 반대해왔다. 하지만 영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을 결정하자 그는 국방부를 압박해 입대 연령이 넘은 자신의 나이를 속이고 전투병이 된다. 몬테그의 삶과 행동의 궤적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솔선수범해 자신의 몸을 던진 모범적 지식인이자 이상적 사회지도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을 베트남에 보낸 장준하

우리 현대사에도 몬테그 같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장준하 선생이다. 장준하는 평소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을 적극 반대했다. 그런 와중 1964년 박정희가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하자 장준하는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아들 장호권을 베트남 전쟁터로 보냈다. 장호권은 베트남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고, 부상까지 입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베트남전쟁 파병을 지지한 여당 공화당 의원 중 아들을 베트남에 보낸 이는 없었다. 장준하 역시 이런 사실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여러분 주변의 고관 자식이 파병된 사람이 있는지 보았습니까? 병역법을 수차 개정해놓고 병역 미필자가 외국 유학을 갔는데 그가 바로 국방부장관 아들입니다."(장준하 관련 국정원 존안 자료 중 신민당 부산 유세 1967년 4월 15일 오후 2시 47분~ 오후 3시 20분 기록)

평소에 베트남전 파병을 적극 반대했지만 참전이 결정되자 국회의원으로써 자신의 힘을 이용해 아들을 베트남에 보낸 장준하. 그의 주변에서는 "파병에 찬성한 여당 의원들도 자기 아들을 베트남전에 안 보내는데 파병에 반대한 장 의원님이 왜 아들을 베트남에 보내요?"라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때 장준하는 "남의 귀한 아들은 총알받이로 전쟁에 보내고 내 아들만 안 보낼 수가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사회지도층의 병역 기피가 만연하고 군 의문사가 끊이지 않는 한국. 이런 나라에서 군 인권 문제가 전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육군 28사단에서 구타 및 가혹행위로 한 장병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열악한 군 인권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은 불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아들이 군대에서 맞아 죽는데 나라의 경제력이 세계 10위권이라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 살기 좋은 나라, 사람 살기 좋은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몬테그와 수많은 장준하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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