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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초선의원 안철수가 남았다

[진단] 정치인 안철수가 걸어온 길과 가야할 길

등록|2014.08.13 11:20 수정|2014.08.14 15:59
그는 대선후보였다. 그 이전에는 성공한 기업인이었고, 교수였고, 의사였다.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대선 본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단일화를 이룬 후보는 패배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정치권 중심에 있었다.

재보궐 선거로 국회에 입성했고, 창당을 준비했다. 단 두 명의 의원을 가지고 전통의 제1 야당과 통합했고, 당 대표에까지 올랐다. 상대 정당에서는 그를 놓고 '철수하는 정치'라고 비꼬았지만, 정치신인이 그처럼 단기간에 제1야당의 당대표에 오른 사례는 극히 드물다.

지난달 31일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7·30재보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김한길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간단히 사퇴의 변을 내놓았지만, 그 시각 안 대표는 이미 국회를 떠난 상태였다. 이후 대변인이 "국민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대표로서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안 대표의 말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보내왔다. '11:4'라는 처참한 결과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당 대표에 오른 지 4개월 만이었다. 이제 '초선의원 안철수'만 남았다. 시작부터 숨 가빴던 그의 정치 행보는 이제 '숨고르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됐다. 

화려한 등장 뒤 계속 되는 내리막길

▲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7월 31일 오전 7.30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동반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이날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에 들어서는 안철수 공동대표. ⓒ 남소연


'안철수 정치'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결과적으로 그의 굵직했던 선택들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 지적된다. 그가 상한가를 친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에게 '첫번째 양보'를 했을 때다. 그 후로 약간의 굴곡이 있지만 그때의 '인기'를 기반으로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결단으로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그는 선거 운동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여전히 '독자성'을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투표일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야권의 대선패배를 그의 탓으로 돌릴 수 없지만, 그에게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대선 후폭풍이 잠잠해질 쯤 그가 돌아왔다. 2013년 4월 서울 노원병 재보궐 선거에 출마했다.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전 의원의 지역구였다. 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그가 박원순 서울시장, 문재인 전 대선후보에게 두 번이나 '양보'했다는 점이 감안됐다. 당시 부산에서도 재보궐 선거가 있었지만 그는 수도권 출마를 고집했고, 결국 당선됐다. 그의 국회 진출은 다시 한 번 '안철수 현상'에 불을 지폈다.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달렸고, 아직 실체도 없는 '안철수 신당'은 제1야당의 지지율을 앞섰다.

그가 언제 정치세력화에 나설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책네트워크 내일'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화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존재감은 미미했다. 2012년 대선 당시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 의혹이 정국을 흔들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발표와 철저한 국정조사를 촉구했지만, 이 사안에 집중하는 야당도 동시에 비판했다. 여야를 '구태정치'로 몰아갔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안철수 의원은 여야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야가 국회에서 정쟁을 벌이는 동안 민생행보를 꾸준히 펼쳤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해 11월에 예정된 재보궐 선거에 자신의 후보를 내려 한다는 예측을 불러일으켰다. 재보궐을 앞두고 또 다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이 증폭됐다. 군 사이버사령부와 국가보훈처 등의 대선개입 의혹이 제기됐다. 커다란 사회적 이슈 앞에 '안철수 세력'은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았고, 보궐 선거에도 나오지 못했다.

그의 정치세력화가 본격화된 것은 재보궐 선거 이후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에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 지지도는 타격을 입지 않았다. 반년 뒤 치러질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이 득세했다. 그 사이 안철수 의원은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 특검을 야권과 함께 요구하며 다시 주목받았다. 창당준비체라고 할 수 있는 '새정치추진위원회'의 출범과 동시의 그의 정치행보가 활발해졌다.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수위는 높아졌고, 야권과 동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점에서 다른 야권 세력과 함께 가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는 독자의 길을 선택했다. 지난 2월 17일 '새정치연합' 창당 발기인 대회를 통해 제3세력의 등장을 공식화했다. 새정치연합은 '합리적 보수'를 앞세워 새누리당 지지자들을 끌어오고, '성찰적 진보'를 앞세워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지지자를 끌어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창당 발기인 대회를 연 지 채 한 달도 안 지난 3월 1일, 민주당과 통합한다고 선언했다. 안철수 의원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 그의 참모들은 그 전날까지 새정치연합의 독자적 노선을 강조하는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3파전에 위기감을 느끼던 민주당은 통합을 반겼지만, 새정치연합은 사실상 풍비박산이 났다. 김성식 공동위원장 등 민주당과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는 인사들은 즉시 반발해 안철수 의원을 떠났고, 윤여준 공동위원장은 합당 작업이 마무리되자 곧장 당을 떠났다. '새정치'를 주창했던 그가 '기성정치'에 투항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안철수 의원이 '5:5통합'을 강조하면서 일부 세력이 결합했지만 기존 민주당이 가진 인적 자원에 비하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당내 지지 기반 만들지 못한 대표직 4개월

국회 떠나는 안철수 대표7월 31일 오전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 7.30 재보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한 뒤 국회를 빠져나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자기 세력의 미약함은 조급함으로 나타났다. 통합은 했지만 당에 녹아들지 않았다. 그것은 양당의 통합 명분이기도 했던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처음 드러났다. 통합의 명분이기는 했지만 '기초공천 폐지'가 곧 새정치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고, 의원들의 의견도 분분했다. 이때 안철수 대표는 당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공천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이끌어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약속했으니까 지켜야 한다'는 원론적 태도로 일관했고, 최종적인 판단은 여론조사에 맡겨 버렸다. 

결국 '기초공천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더 높았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 강조했던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지키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을 경험한 후 안철수 대표는 점점 고립된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당내에서 안철수 대표의 의중을 전해 들을 만한 인사를 찾기 어려웠다. 오직 김한길 공동대표와 두 사람만이 의논해 결정했다. 누구로부터 보고받고 조언받은지 알 수 없었다. 당내에 측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라고 답할 때가 많았다. 심지어 당 밖에 논의 그룹이 따로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지방선거 이후 이같은 상황은 더욱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지방선거 당시 그는 측근으로 분류되는 윤장현 광주시장 후보를 무리하게 전략공천하면서 강한 내부 반발에 부딪혔다. 다행히 윤 후보가 예상보다 높은 지지를 받으며 당선돼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무리한 공천이 전체 선거판에 악영향을 줬다고 지적받았다. 같은 문제는 7·30재보궐 선거에서도 반복됐고, 지방선거와 같은 운은 따르지 않았다. 안 대표와 김 대표가 밀어붙인 후보들은 "최적최강"의 후보가 아니었고, 결과는 참패로 이어졌다.

그는 왜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걸은 것일까? 안 대표의 한 핵심 측근은 "안 대표는 공식적인 회의 체계가 아닌 (측근들이) 따로 내부 회의가 있다"라며 "그 회의 자리에서 안 대표가 '사람이 필요하면 내가 어디든 심어 줄 수 있으니 좋은 사람 데리고 오라'라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인적 자원에 목말라 있으면서도 당 안에서 채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에는 이미 126명의 국회의원이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치적 스킨십이 상당히 부족했던 것이다.

당내 다른 그룹의 인사들도 비슷한 비판을 내놓았다. 친노 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재보궐 선거 공천을 비판하며 "어떤 것도 당내에서 소통하려고 하지 않았다, 안 대표가 만약 금태섭 대변인을 자기 사람이니까 이번에 공천하자고 했다면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라고 말했다. 또 "권은희 후보도 더 빛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논의해볼 수 있었지만 김한길·안철수 두 대표가 문을 닫고 아무 이야기도 듣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당내 개혁적 성향의 재선 의원 역시 "안 대표가 여전히 당 밖에서 세력화한다는 느낌이다, 단 한명의 의원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기회는 있다, 그건 안철수 본인이 찾아야 한다"

이제 안철수 의원에게 남은 길은 무엇일까?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 의원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것일까? 정치권 인사들은 대부분 "아직 기회는 있다"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특히 '안철수 현상'이 낳은 가장 큰 유산이 안철수 본인임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았다. 비록 '안철수 대표'로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정치인 안철수는 여전히 기성 정치에 실망한 대중들이 기대하는 인물 가운데 대표선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지난 3일 새정치연합 비상회의에서 "(안 전 대표는) 정치혐오감을 갖고 멀어지는 많은 시민들을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한 큰 공이 있다"라며 "안철수의 새정치에 많은 기대를 건 시민들은 안 전 대표를 비난하거나 버리기보다 더 큰 격려를 해달라"라고 말했다. 박지원 의원 역시 "안 전 대표는 아직도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고 미래"라며 "거리에서 지나가는 것만으로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정치인은 박근혜 대통령을 제외하고 안 전 대표가 유일하다"라고 말했다.

박영선 비대위원장 역시 "안 전 대표로 상징되는 새정치 열망은 아직 국민들에게 살아있다"라며 "특히 선거유세 현장에 안 전 대표가 가면 20대, 30대에서 열렬한 지지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고 느끼는 게 많다"라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의 한 재선 의원 역시 "안 전 대표가 당분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부터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면 못 할 게 없다고 본다"라며 "과거에 청춘콘서트를 하며 전국 각지에서 대중들을 만났던 힘이 아직도 있다, 그런 걸 다시 해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의원은 여전히 대선후보로서 10% 가량의 지지율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 수치지만 여전히 주목해야 할 정치인이다. 그리고 이제 막 정치인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 2년 동안의 행보가 "돌아갈 다리를 불살랐다"라며 정치권에 뛰어든 그의 모든 역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많은 정치권 인사들이 "안철수에게 아직 기회는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 기회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는 "그건 본인이 찾아야지"라고 답했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맞는 말이었다. '초선의원 안철수'가 이제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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