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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제자였던 가수 박성신을 보내며...

'한번만 더' 박성신, 그는 누구의 가슴에 안기고 싶었을까

등록|2014.08.10 14:52 수정|2015.04.25 16:46
한 제자의 부음

▲ 1987년 이대부고 27기 졸업앨범에서 박성신 양 ⓒ 박도

간밤(8월 9일)에 그의 부음을 듣고 한참 먹먹했다. 나는 곧 마음을 추스르고 서가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봤다. 모두 세 장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1984년 3월 2일, 그는 이대부고에 입학하였는데, 고1 때는 1학년 1반으로 나의 담임 반 학생이었다. 그해 담임용 사진첩에 그의 앳된 모습이 귀엽게 남아 있다. 여학생 가운데 가장 키가 커서 그는 끝번인 66번이었다.

두 번째 사진은 그해 5월 도봉산 우이암으로 봄 소풍을 가서 찍은 학급단체사진이다. 그는 긴 머리에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활짝 웃는데, 그는 약간 미소만 짓고 있다.

세 번째 사진은 1987년 이대부고 앨범사진으로 그는 3학년 1반이었다. 나는 그때 학교에서 교무부장을 맡았기에, 그의 담임은 아니었다. 그는 졸업사진을 찍는다고 한껏 멋을 부렸다. 머리단장도 예쁘게 하고 흰티에 짙은 색깔 스웨터를 입고 있다.

그의 히트 곡 '한번만 더'를 다시 들어보았다.

………
헤이 한번만 나의 눈빛을 바라봐
그대의 눈빛이 기억이 안나
이렇게 애원하잖아

헤이 조금만 내게 가까이 와봐
그대의 숨결 들리지 않아
마지막 한번만 더
그대의 가슴에 안기고 싶어

꺽다리 박성신

▲ 1984년 이대부고 1-1반 사진첩의 박성신(그는 66번으로 한자이름 글씨는 내 필체다) ⓒ 박도

그 무렵 이대부고는 한 학년이 4학급으로 서울 시내 일반계 고교로는 초미니 학교였다. 그래서 학생이 3년 동안 재학하노라면 교사도 전교 학생을, 학생도 전교 선생님을 잘 아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더욱이 그는 고1때 내 반 학생으로, 여학생 가운데 꺽다리인데다가 유명인의 딸이라 아직도 그에 대한 기억은 어제처럼 뚜렷하다.

학생이 입학을 하면 교사들은 학생들의 이름도 빨리 외고, 가정환경도 알고자 개별 면담을 한다. 4월 초순쯤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끝번이라 면담이 가장 늦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면담하기 전에 이름을 이미 외우고 있었다. 그는 주소지가 마포구 망원동이었는데, 부모 란에는 어머니 인적사항 란은 비어있었다.

그가 스스럼없이 "어머니는 아버지와 별거 중"이라고 먼저 얘기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당시 가수로 이름을 떨친 박재란이라는 것도 자기가 말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더 이상 가족이야기를 자세히 묻지 않았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상대의 약점이나, 아픈 곳을 캐묻는 것은 서로 친밀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때문이었다.
 
나는 33년 교직생활 중 20여 차례 학급담임을 했는데, 그해 1학년 1반 학생들과는 참 호흡도 잘 맞았고, 즐겁게 일 년을 보냈다.

유난히 즐거웠던 한 해

자, 여러분! 이제 닻을 내리겠습니다. 작년 3월에 출항한 우리 11호(1학년 1반) 기선(汽船)은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무사히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오늘 무사히 기항(寄港)하게 됨을 선장으로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10여 년 담임을 하면서 내 반에서 한 번도 학생부에서 처벌되지 않은 나의 기록은 여러분 덕분으로 아직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학기 초 공정한 심판관이 되겠다는 나의 공약은 여러분들이 평점을 내리십시오. … 자, 끝났습니다. 모두들 돌아가세요.

60여 명의 남녀학생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종례 끝!'이라는 말이 떨어지면 금세 뒷문으로 사라지던 녀석들도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떠난 후 떠날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그들을 덥석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교단을 떠나 학생 자리로 가서 학생들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몇 남학생은 나에게 포옹하거나 안겼다.
- 졸작 <비어있는 자리> 다나출판사 발행 156~7쪽에서

▲ 1984년 5월, 이대부고 1-1반 봄소풍 기념사진(제3열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박성신 양이었다. 필자는 맨 오른쪽 모자 쓴 이.) ⓒ 박도


박성신(朴性信), 그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았는지 노래를 잘 불렀다. 학급대표 노래자랑 때면 꼭 나갔고, 학교 노래선교단(교내 합창반)에서도 맹활약했다. 그 무렵 그의 레퍼토리 중에는 이따금 그의 어머니 히트 곡도 있었다. 여러 곡 가운데 그가 부른 가장 인상에 남아있는 노래는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다.

시원한 밀짚모자 포플라 그늘에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장의 아가씨…

그의 명복을 빌다

그는 졸업 후 서울예대로 진학했고,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비 오는 오후'라는 노래로 데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그를 마지막 본 것은 이대부고 개교 30주년기념 음악제에서 그가 '한번만 더'를 열창하던 모습이었다. 그는 올해 46세로 한참 더 일할 수 있는 나이인데도 하늘나라로 갔다. 그가 무대보다 가정을 굳게 지킨 것은 어머니에 대한 회한의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헤이 조금만 내게 가까이 와봐
그대의 숨결 들리지 않아
마지막 한번만 더
그대의 가슴에 안기고 싶어

그는 누구의 가슴에 그토록 안기고 싶어 애절하게 노래를 불렀을까? 나는 그가 부른 '그대'는 그의 어머니였다고 단정하고 싶다.

박성신 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십시오. 옛 담임 박도 고개 숙여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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