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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실제로도 있다? 없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150시간의 여행기

등록|2014.08.15 17:07 수정|2014.08.16 21:59
영화 <설국열차>를 본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철로를 달리던 기차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탑승한 사람들의 모든 일상이 기차 안에서 해결되던 그 기차. 영화에 비하면 조금 어설프지만 현실에도 설국열차가 존재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베리아 평야를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 여행을 결정했던 유일한 이유이자 최대 목표가 이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보는 것이었다. 각오는 하고 탔지만 밤낮으로 계속해서 달리는 열차 안에서 '혹시 기차가 뺑뺑이를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터무니없는 의심까지 했었다. 

▲ 정차역에서 내려 쉬고 있는 탑승객들. ⓒ 박유진


60여 개의 역, 150시간, 일주일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기차로, 공식적인 철도 길이는 9288km다. 조금 더 실감나게 말하자면, 지구 둘레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리다. 시간대만 무려 7번이 바뀐다. 열차는 서쪽으로 달리고 달려 종착역에 도착하기까지 60여 개의 역을 지나 150시간, 꼬박 일주일이 소요된다.

열차를 타려면 어쨌든 러시아 땅을 밟아야 하는데, 2014년 1월 1일부터 러시아와의 비자협정 덕분에 무비자로 60일 동안 체류할 수 있게 됐다. 티켓은 러시아 철도청 홈페이지에서 모스크바-이르쿠츠크 구간과 이르쿠츠크-블라디보스토크 구간을 나누어 발급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인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를 중간 거점으로 잡았다.

그런데 표시된 도착 시간을 보니 오전 3시 28분이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티켓에 표시된 출발 시간, 도착 시간은 모두 모스크바를 기준으로 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모스크바보다 5시간 빠른 이르쿠츠크에서 기차를 탈 때 현지시간에 맞춰 역에 가는 '뻘짓'을 하지 않기 위해 손목시계를 모스크바 시간에 고정시켜 놓고 여행했다.

▲ 열차 3등석 객실 내부. 침구류 커버와 수건은 예약시 신청할 수 있다. ⓒ 박유진


지난 7월 11일, 모스크바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탔던 3등석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기차에 의자가 없다. 대신 좌석은 모두 2층 침대다. 짐은 2층 침대 위 선반에 올려놓고, 티켓 예약 시 미리 신청했던 침구류 커버와 수건을 받아 침대를 세팅했다. 방해 받지 않기 위해 2층을 선택했는데 천장과 너무 가까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올라가면 무조건 눕거나 엎드려야 했다. 보통 1층 승객이 낮에는 2층 승객을 위해 침대 끝을 양보해주기 때문에 내려와 앉아있을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기차에 난방은 되지만 냉방 시설은 없었다. 오직 창문뿐이다. 창문마저도 열리지 않는 불운한 자리가 걸리면 땀으로 샤워를 할 수밖에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가장 소중한 '콘센트'는 있다. 칸마다 앞뒤로 2개의 콘센트가 준비되어 있다.

▲ 열차 안에 구비된 온수기. ⓒ 박유진


가장 걱정했던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의 청결상태는 기본적으로 기차 번호에 따라 결정된다. 001이 가장 최신 열차이고 기차 숫자가 커질수록 오래된 기차이므로 화장실 상태도 좋지 않다. 첫 열차의 번호는 74번.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탔지만 의외로 깨끗했다. 화장실 청소는 각 칸에 탄 승무원의 업무이므로 승무원의 성실도(?)에도 많이 좌지우지된다.

칸마다 화장실이 두 개씩 있지만 변기와 세면대가 전부다. 세면대는 수도꼭지를 손바닥으로 아래에서 위로 눌러야 물이 나오는 구조라 많은 양의 물을 한 번에 사용하기 어려웠다. 변기는 물을 내리려 발판을 밟았더니 물이 나오는 대신 빠르게 지나가는 철로가 드러났다. 따라서 역에 정차했을 때는 물론 정차 전후 30분 동안 승무원이 화장실을 잠근다는 사실!

러시아에서 발견한 한국의 컵라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이다. 모스크바-이르쿠츠크 구간 열차를 탈 때 4일치의 마실 물과 간식을 준비했다. 어깨가 무너져 내릴 듯한 무게의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에 탔다. 타자마자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하고 후회했다. 승무원에게서 간단한 스낵이나 물, 커피를 구매할 수 있었고 식사 때가 되니 빵이나 즉석식품을 파는 승무원도 객실을 오갔다. 그리고 칸마다 온수기가 구비되어 있어 즉석식품을 먹기도 편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도시락'이라는 한국말이 떡하니 적힌 컵라면을 너도 나도 먹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수출된 '도시락'이 러시아 최고 인기상품이라 어디서나 구할 수 있었다.

한 번은 기차가 역에 접근하자 사람들이 지갑을 들고 대기하다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달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구멍가게 앞. 순식간에 긴 줄이 생겼다. 기차가 장시간 정차할 때 밖에서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사서 더위를 식히는 것이었다. 정차 시간은 객실 내에 붙어있는 시간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눈치껏 배워 그 다음부터는 LTE의 민족답게 선두대열에 합류했다. 열 손가락을 잘 활용해서 산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바깥바람을 쐬었다. 시베리아의 찬바람에 잠시나마 땀범벅인 몸을 말렸다.

어떤 역은 러시아 할머니들이 먹거리를 바구니에 들고 와 팔기도 하는데 현지의 음식을 구경하기 좋은 기회였다. 바이칼 호수 근처 역에서는 '오믈'이라는 민물고기를 팔기도 했다.
 

▲ 정차역에서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의 모습. '오믈'이라는 물고기를 팔고 있다. ⓒ 박유진


장시간 기차여행에서 '꿀잠'을 위한 맥주 한 캔이 생각나거나 러시아 보드카의 유혹에 이끌리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지 모스크바-이르쿠츠크구간 기차에 탑승했을 때 한 중년 아저씨가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복도를 걸어다니다 정차역에서 경찰에게 수갑으로 체포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니 도를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취한 사이 소지품 도난의 우려도 있지만 이처럼 강제 하차당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정차해있는 시간을 빼더라도 모스크바-이르쿠츠크 구간 86시간, 이르쿠츠크-블라디보스토크 74시간은 듣기만 해도 지루해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첫 열차를 탔을 때, 다운받아간 영화나 예능을 봤지만 처음 몇 시간의 이야기다. 배터리라도 나가버리면 콘센트 앞에서 충전이 다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챙겨간 책이나 잡지도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집중해 읽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시베리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아야지'하는 각오로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끊임없이 펼쳐지는 평야, 혹은 가끔가다 등장하는 호수나 우거진 숲만 반복됐다. 그러다보니 손목시계 시간과 핸드폰 시간이 1시간씩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탑승 후 3일쯤 지나 4시간, 5시간씩 시차가 나자 내가 지금 먹는 밥이 점심인지 저녁인지 헷갈리는 지경까지 왔다.

▲ 열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본 모습. 시베리아 평야가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다. ⓒ 박유진


러시아 소녀에게 배운 "당신은 당근을 좋아하십니까?"

나홀로 배낭 여행객이라 입 안에 거미줄이 생기기 직전, 누구에게든 말을 걸어볼 작정으로 1층에 앉아 있었다. 또래로 보였던 여학생은 내리 잠만 잤다. 옆에 있던 러시아 아저씨께 창문을 어떻게 여는지 여쭤보며 대화를 시작해보려 했으나 영어를 아예 알아듣지 못했다. 러시아 말이라곤 키릴문자를 더듬더듬 읽는 수준밖에 안 되던 나는 결국 이르쿠츠크에서 내리기까지 4일 간 묵언수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르쿠츠크-블라디보스토크 구간 열차에서도 같은 칸에 배낭여행객은 없었다. 그래도 이 열차를 타고 처음 3~4시간은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봐도 보는 맛이 있었다. 기차가 세상에서 가장 큰 호수인 바이칼 호수를 둘러서 달렸는데, 그 야경이 내 혼을 쏙 빼놓았다.

▲ 이르쿠츠크-블라다보스톡 구간 열차에서 바라본 바이칼 호수 야경. ⓒ 박유진


3일째 되던 날, 콘센트 앞에서 걸터 앉아 핸드폰을 충전하고 있으니 예쁘게 생긴 러시아 꼬마가 와서 말을 걸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몸짓을 보이자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Stand up, Please"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일어서라는 얘기였다. 알고 보니 내가 걸터앉아 있던 박스가 쓰레기통이었다. 꼬마는 외국인인 내가 신기했던지 내 자리까지 따라와 손짓 발짓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그조차도 답답했던지 나에게 러시아 말을 고강도로 훈련시켰다. 덕분에 러시아어로 "당신은 당근을 좋아하십니까?"는 어디에 가서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

▲ 블라디보스톡 역에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념비. ⓒ 박유진


통일이 되면, 다시 한 번 타고 싶다

지난 7월 20일, 9288km, 150 시간을 달린 끝에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종착역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9288km'가 새겨진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념비 앞에서 기차에서 갓 내린 몰골을 기념 사진으로 촬영하며 완주를 자축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멋있다. 그런데 힘들지 않겠어?"였다. 맞다. 고생은 많이 했다. 하지만 젊은 날 패기 하나만 믿고 떠날 수 있었던, 가슴깊이 남을 여행이었다.

솔직히 한 번 더 타라면 선뜻 타기는 어려울 듯 싶다. 하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평양역을 거쳐 서울역에 종착한다면, 더 길어진, 세상에서 가장 긴 철도를 꼭 다시 기차를 타고 달리고 싶다.
덧붙이는 글 러시아 철도청 홈페이지(www.rzd.ru/main-pass/public/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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