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썽 부리면 여지없이 날아온 무서운 '절대 반지'
엄마의 '절대반지'를 찾아라
▲ 엄마의 삶과 우리의 어린시절에 빼 놓을 수 없는 절대반지 ⓒ 김혜원
은은한 멋 풍기던 반지가 '딱밤용'일 줄이야
"너 이리 안 와? 이 눔의 지지배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엄마가 몇 번이나 말했어. 동생 울리지 말라고"
'딱!'
눈앞에서 별이 번쩍인다. 분명 엄마의 두텁고 넓적한 손바닥이 내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는데 소리는 '퍽' 이나 '철썩'이 아닌 야무진 '딱' 이었다. 이럴 땐 엄마의 무시무시한 손이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가격하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상책. 엄마의 고함을 뒤로 하고 골목어귀까지 도망을 쳤지만 아까 맞은 이마 언저리는 여전히 욱신거린다.
왜 손으로 맞았는데 마치 돌멩이나 막대기로 맞은 것 같은 소리가 났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맞은 곳에 손을 대어 보니 세상에나 탁구공만한 혹이 톡 하고 불거져있다. 서러운 마음에 한참을 울다가 집으로 들어가니 엄마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집안일에 여념이 없다.
일에 열중하던 엄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땀과 눈물에 범벅이 되어있는 날 발견하고는 손짓을 한다.
"이리와 세수하게. 그러게 말 좀 잘 듣지. 왜 동생하고는 그렇게 싸워. 그러니까 매를 맞지. 자 얼굴 대 봐. 코 흥!"
마당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엄마의 큰 손에 얼굴을 대고 있으려니 서러움이 밀려온다. 아까 맞은 이마도 더 아픈 것 같다.
"어이구 이 혹 봐라. 하하하. 반지에 제대로 맞았구먼. 말랑말랑하네. 그러게 말을 잘 들어야지. 방에 가서 안티프라민 가져와 발라줄게."
알고 보니 내 이마를 가격한 것은 쿠션감 가득한 엄마의 손바닥이 아닌 엄마 손가락에 끼워진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백금 가락지였다. 손도 크고 손가락도 굵었던 엄마 손가락에는 언제부턴가 가락지가 끼어 있었다. 한복을 즐겨 입던 엄마라 한복의 옷맵시와도 잘 어울리며 은은한 멋이 느껴지던 반지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어느 날부터 나를 비롯한 동생들의 머리에 딱밤 세례(?)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전 거짓말처럼 돌아온 반지
▲ 엄마의 절대반지가 내손에 들어왔다. "애들아, 이리와 한대만 맞아보자" ⓒ 김혜원
사남매인 우리는 모두 엄마 반지의 세례를 받고 자랐다.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부릴 때면 여지없이 날아오던 무시무시한 절대반지. 절대반지의 세례를 받고 자란 우리 사남매는 반지에 맞아 머리가 나빠졌을 거라는 주변(?)의 우려와는 무관하게 대체로 공부도 잘했으며 별탈없이 성장해 중년이 된 지금 큰 걱정없이 살고있는 편이다. 마치 절대 반지가 그렇게 해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 네 남매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절대반지의 위세가 꺾이기 시작한 것은 거의 30년 전쯤. 아마도 막내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딱밤 기능을 상실한 반지는 그에 따른 무한한 힘마저 잃고 서서히 엄마 손에서도 사라져갔다.
"반지가 무거워 끼고 있을 수가 없다."
"손이 자꾸 부어서 반지가 들어가지 않네"
"늙고 병드니 내 몸에 뭐하나 끼고 거는 것도 귀찮다. 맨 몸도 건사하기 힘든데 반지는 무슨 반지냐."
그렇게 엄마의 절대반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런데 지난해 문득 엄마가 마치 잃어버린 전설을 기억해 내기라도 한 듯 반지를 찾았다.
"내 가락지 못 봤니? 어디다 잘 둔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다. 한동안 끼지 않고 빼뒀더니 어디로 도망을 갔는지 알 수가 없네."
"아, 그 반지. 엄마가 우리 머리 때렸던 그 반지 말이에요? 어디 있겠지."
"너도 맞았니? 나도 맞았잖아. 한번 맞으면 혹이 그냥 이 만하게 부풀어 오르는. 하하하."
"그 소리 기억나? 딱 하면 정신이 번쩍 들잖아."
"말도 마라. 얼마나 아픈지 난 엄마가 차돌로 내 머리를 내리치는 줄 알았다니까."
"우리 애들은 그 반지 맛을 안 봐서 말을 안 듣나? 한 번씩 반지 맛을 보여줘 볼까. 하하"
40, 50대가 되어버린 형제들은 엄마의 반지는 찾는 둥 마는 둥하며 어린 시절 엄마의 절대반지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돌아보니 엄마가 절대반지로 우리를 호령했을 그때가 엄마에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찾았지만 엄마의 절대반지는 전설 속에 숨기라도 한 것처럼 1년 넘게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전 거짓말처럼 반지가 돌아왔다.
"아이구 이게 여기 있었네. 온 집안을 뒤집고 찾아도 안 나와서 잃어버렸나 했는데 여기에 있었네. 참말로 늙으면 죽어야 해. 내가 이거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마음 고생했는지 아니. 니들은 이걸로 맞았다고 놀려대지만 그래도 한동안 내 몸에 간직했던 물건인데 없어져 버리니 얼마나 실망이 크던지. 이제 됐다. 찾았으니. 이젠 니가 간직해라. 또 잃어버릴까 걱정도 되고 반지도 다른 임자를 찾아갈 때가 된 것 같아."
이렇게 엄마의 절대반지는 나에게로 왔다. 투박하고 거친 엄마 손에 언제나 끼어있던 무서운 절대반지. 우리 형제들이 농담 삼아 "엄마의 반지로 머리를 맞지 않은 자, 사람됨을 논하지 말라"고까지 했던 반지가 나에게로 온 것이다.
내 손가락 크기보다 커서 헐렁거리는 반지를 엄마에게 넘겨 받고 집으로 오는 도중 문득 어린 시절 절대반지의 위용이 떠올랐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쳐보니 여지없이 '딱!'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프지만 엄마에게 혼났던 그때처럼 멍했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다. 절대반지의 힘이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들들아, 조카들아 이리로 와. 한 대만 맞아보지 않을래? 할머니의 절대반지에 맞은 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단다."
절대반지의 살아있는 전설은 계속된다. 앞으로도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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