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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취소된 병장 아들... 아내는 사색이 됐다

30년 전과 다를 게 없는 군대...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게 만들어야

등록|2014.08.21 18:06 수정|2014.08.21 18:06
퇴근하고 집에 갔더니 아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주말에 예정된 아들의 휴가가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들은 전역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육군 병장이다. 연일 쏟아지는 군 관련 사건과 사고 속에서 아들의 안부가 걱정되는 것은 모든 장병 부모가 똑같은 일일 터, 주말에 한 번씩 전화가 올 때마다 별일 없느냐며 묻고 별일 없다는 답을 들어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은 게 벌써 몇 달째 계속된다.

아들이 입대하는 날, 연병장에서 집단 이별 의식...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한장면.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병사들을 모아놓고 정신교육이니 훈화니 또 마음의 편지를 쓰게 하는 병영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선하다. 아들이 입대하는 날은 눈이 많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날도 추워서 두터운 겉옷을 껴입어도 한겨울의 바람이 살갗에 닿기 만해도 매서웠다. 군입대는 단체로 치르는 이별의 의식이기도 하다.

아들, 친구, 연인을 군에 보내는 이들과 짧게 깎은 머리를 자꾸 만지며 어색해 하는 아이들과의 집단 이별 의식이 연병장에서 열린다. 울지 않으려 애쓰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오히려 코끝이 더 아려오기도 했고, 막상 눈물이 터진 사람들 곁에서 울음을 참기도 했다. 그렇게 군에 간 아들이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고, 휴가를 나오면서 지낸 시간이 벌써 전역을 한 달 남짓 남을 때까지 흘렀다.

면회, 외박, 휴가를 나올 때마다 아들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괜찮다고 한결같았지만, 구타는 없느냐, 힘들게 하는 선임병은 없느냐, 간부들은 잘 해주냐 등등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군대 구타는 없어, 고참도 힘들게 못 하고 간부들도 신경 많이 쓰는 편이야 등등의 답이 돌아왔지만, 나는 솔직히 아들의 말을 다 믿지 않았다. 30년 전에 나도 그렇게 대답했었다.

내무반이 생활관으로 이름이 바뀌고, 생활관은 병사들을 '짬순'으로 나눠서 생활하게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그건 좀 괜찮겠다 싶기도 했고, 나름대로 바뀌려는 노력은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군대가 바뀌었다고 믿지는 않았다.

해방 후 일본 군인이었던 이들이 앞장서 창군하고 일본 군인이었던 이가 최고위에 앉아 이어 온 군대 문화가 새롭게 만들어졌다고 믿기에는 내 30년 전의 군 경험이 너무 가혹했다. 그때는 정말 하루라도 맞지 않고 침상에 누운 날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거의 매일 집행되던 쇠파이프 구타와 폭언 속에서 국방부 시계는 느리게 흘러갔다.

내가 생활하던 위병소대 점호는 당직 위병장교가 맡고 있었다. 그들이야 몇 달에 한 번씩 서는 당직이니 병사 한 명 한 명을 다 알 수도 없는 일이니 대부분 점호는 생략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도 점호가 생략되었고 점호시간 전에 일차 구타를 당했던 나를 포함한 졸병들에게 자체 점호 시간의 폭행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그날 당직을 맡았던 장교가 내무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참은 당황했고 장교는 그만하라며 말렸다. 대부분 당직 위병장교가 그래도 위병소 안에서, 거의 예외 없이 12시 전에는 잠을 자기는 했지만, 가끔은 대범하게 우리가 생활하는 내무반에서 근무 복장으로 잠들기도 했다. 나중에야 그런 장교들이 전역을 앞둔 말년이거나 사병과 마찬가지로 의무 복무 중인 학사 장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졸병이었던 나는 내 군 생활 중 처음 발각된 폭행이 이제 수면 위에서 논의되고 제재될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었었다.

언뜻 바라본 그의 가슴에는 헌병 병과 마크가 선명했으므로 그 기대는 조금 더 컸다. 그러나 그뿐 그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여느 날처럼 엄벙덤벙 근무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 복귀했다. 난 더이상 군대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 놓고 팰 수 있는 곳이 군대

인권교육 받는 군인들윤일병이 폭행으로 사망한 경기도 연천군 28사단 포병부대에서 12일 부대원들이 내부반에 모여 인권교육을 받고 있다. 이날 병영문화혁신위원들이 이 부대를 방문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졸병이 진급하여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자 그들에게 내면화되었던 폭력은 예외 없이 후임에게 행해지도록 대물림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 놓고 팰 수 있는 곳이 군대였고 그렇게 패도 처벌받지 않았다.

곧잘 우리나라 작가들은 군대 생활을 사람의 한계 상황으로 설정하는데, 이 한계 상황은 육체적 한계보다도 이렇게 간단없이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인간 본연의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군대는 우리나라 남자에게는 반드시 부딪치게 되는 한계상황의 통과의례다.

내가 생활하던 30년 전에도 구타는 금지됐었고, 마음의 편지 대신 소원 수리는 받아주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각이 잡혀 있지 않은 모포와 삐뚤게 놓인 신발은 지적의 대상이다. 아직 군대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군기는 군대의 법도와 질서를 말한다. 군대의 사기도 군기로 읽히기도 한다. 군대의 법도와 질서는 군법과 훈령 혹은 생활지침 등이겠지만, 이를 행하는 것은 군 시스템이어야 한다. 생활관의 정렬된 신발과 각 잡힌 모포가 군기의 표상은 될 수 없다. 군인의 일상에서 군기가 얼차려를 위한 트집 잡기가 아닐 때 오히려 군율이 선다.

군율에 대한 복종이 선임병에 대한 복종보다 앞설 때 군기가 선다. 구타 금지는 군율이지만, 그보다는 선임병에 대한 복종이 강요될 때 군율은 갈 곳이 없다. 병사 개개인을 관리할 대상으로 삼을 때 그 대상 모두에 대한 관리의 효율성 때문에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장교는 간부에게 관리를 일임하고 간부는 선임자에게 일임하는 관리의 하청구조가 형성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징병제 아래에서 군대 내에서의 사건과 사고는 근절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설사 모병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군대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는 변화가 불가능한 문제이다. 선임병에 대한 복종보다 군율에 대한 복종을 선행 시키는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

신병 훈련소의 사선에 서기까지 PRI(사격술 예비훈련)가 계속됐다. 본뜻이 있겠지만, 피가 나고 알이 배기는 훈련이라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격 결과가 정해진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PRI는 계속된다. 아직도 그 훈련이 실제 사격에서 얼마만큼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니들 PRI를 더 받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 쏴."

이런 압박 이상은 아니었다고 난 아직도 믿는다. 이런 압박이 행해지면 그것이 선천적인 이유든, 집중력 부족에서든 아니면 애초에 영점이 잡히지 않은 총기 탓이든 얼차려가 행해진다. 또, 이 결과가 분대단위, 소대단위, 중대, 대대로 평가될 때, 정해진 기준에 미치지 못한 병사에게 가해질 원망은 실제 폭행이나 언어적 폭력 혹은 따돌림으로 표면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군대가 있다면 그 부대는 정말로 훌륭한 인성을 소유한 집단일 것이고 어느 누구 때문에 내가 피해를 받는다는 의식을 받지 않고 기준에 미달한 후임병을 따뜻하게 감싸는 이상적인 군대를 인간의 선의에 맡기는 한 폭력과 왕따는 계속될 문제이다. 군법이 구타금지를 명하고 수도 없이 정신교육을 병행해도 폭력이 없어지지 않는 현실을 고치기 위해서는 이런 군대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탄피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급급할 것이 아니라 사격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 병사에겐 두 번, 세 번, 네 번 기회를 다시 주고 스스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하고, 아니면 자세나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면 이를 고치게 하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루에 되지 않는다면 따로 기회를 주어서라도 정해진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강압이 아닌 훈련을 통해 만들어 줄 때 군의 전투력 향상도 기대할 수 있다. 상은 당근이고 벌은 채찍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버스도 가끔 오고 다른 교통수단도 별로 없던 시절에 만들어 놓은 위수지역 기준 때문에 전철 몇 정거장이면 다녀올 곳을 가지 못하는 규정이 아직 군대에 있다. 이것도 적폐이고 이처럼 가능한 모든 통제의 수단을 앞세워 사병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오늘의 군대이다. 뜀 걸음을 잘하는 사병도 있고 못하는 사병도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각자 체력적 한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 한계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사병의 성취 욕구를 고취하는 포상제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남자가 군대에서 배운 가장 큰 배움이 선임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고 이런 복종이 내면화되어서 기득권에 대한 타협으로 발현되는 사회가 계속된다면 더 이상의 사회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사적인 폭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훈련과 병영 생활의 프로그램이 개선되어야 한다. 어려웠던 시절의 취약한 개인위생을 걱정하는 시기가 아니라면 청소 상태로 얼차려를 주지 말고 병사 각자에게 맡겨 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너 같은 x 때문에 군대가 안 굴러가는 거야."

내 군 생활 내내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다. "빠릿빠릿하지 못하다", "침상정리를 잘 못 했다", "청소가 안 됐다" 등등 거의 모든 군대 내 일상생활에서 선임병이 후임병을 교육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지들이 왜 군대 돌아가는 걱정을 해? 지들이 국방부 장관이야 뭐야? 근데 정말 침상 정리가 잘 못되고, 청소가 잘 안 되고 내가 빠릿빠릿하지 못해서 군대가 안 돌아가? 그런 군대가 어딨어? 총 잘 쏘고, 개인 전술 잘 이해하고 잘 할 수 있고, 소대나 중대 전술 잘 이해하고 잘 할 수 있으면 군대 잘 돌아가는 거 아냐? 솔직히 다 트집이잖아. 딴생각 못하고 두려움 때문에라도 군 생활 버틸 수 있게 찍어 누르는 거 아냐?'

이런 생각 한두 번 하지 않고 전역병이 된 사람은 없으리라. 아들이 생활한 군대가 여기서 아주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 병사도 피해 병사도 나오지 않는 군대 만들자

징병제하에서 우리에게 군대 다녀온 것이 특별한 명예는 아니다. 그래도 군 생활한 것이 부끄러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맞았으니깐 나도 후임병을 때렸다고 절대로 합리화될 수 없는, 어느 순간 내가 행한 폭력이, 그것이 군대라고 하더라도 부끄러워진다면 그건 올바른 군대가 아니다.

아내의 걱정은 중대장과 통화하고 나서야 사라졌다. 일련의 사건 사고 때문에 예정됐던 훈련이 취소돼서 휴가 일정이 밀려버린 것이라고 했다. 남경필 지사가 군 생활 말년인 아들이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했다고 썼다. 또 그를 군대에 보냈을 때, 선친의 걱정을 이해한다고도 썼다. 군 생활을 앞두었거나 아들이 후임병이거나 선임병인 모든 가족들과 당사자들, 이제 태어난 아들을 둔 부모들까지 군대 걱정이 크다.

더 이상 가해병사도 피해병사도 나와서는 안 되도록 군대를 바꾸자. 지금 군대는 이대로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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