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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미 왔네, 술 따라봐"... 부장님 정신 차리세요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 15년... 직장 내 성희롱 여전

등록|2014.09.09 19:45 수정|2014.09.10 19:42
[기사수정 : 9월 10일 오후 1시 50분]

▲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화된 지 15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은 ‘직장 내 성희롱’에 시달린다.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 상담기록을 살펴보면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가 오히려 해고나 전직 등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만들어 배포한 성희롱 예방 교육용 동영상의 한 장면. ⓒ 고용노동부


#1. 영어강사 A씨는 한 대형 학원에 1년 계약직으로 채용된 뒤 앞으로의 미래를 상상하며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A씨의 꿈은 6개월 만에 물거품이 됐다. 이 회사 사장인 B목사는 성경공부를 하자며 불러놓고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남자친구는 있느냐"로 시작한 대화는, 에로물을 언급하며 "육체적 사랑이 얼마나 좋은데" 따위로 흘렀다. 급기야는 주말마다 영어 과외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A씨는 거절했다. 그리고 혼자만 승진시험에 탈락한 뒤, 결국 해고됐다.

#2. 사무직으로 취직한 C씨는 회사 생활 한 달 차에 상사와 새벽 2시까지 야근을 했다. 일을 마친 상사는 집까지 데려다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상사는 다음 날 C씨의 아침식사까지 챙겼다. C씨는 감사했지만 부담스러웠다. 정중하게 마음만 받겠다고 알리자 상사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며 돌변했다. 신입에게 주말 출근은 당연하다며 주말 출근을 강요했고, C씨가 실수라도 한 날에는 공개적으로 타박하며 모독하는 등 부당대우를 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 내 성희롱으로 앓고 있다. 지난 8월 3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시 산하 상수도연구원의 한 여성공무원이 사실은 직장상사 3명에게 성희롱을 당한 뒤 우울증을 앓다 자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유족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낸 상태다.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화 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성희롱은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국가인권위가 올해 1월 공개한 자료를 보면 성희롱으로 진정을 접수한 건수는 2010년 216건에서 2011년에는 228건, 2013년에는 241건으로 집계됐다.

한국여성민우회(아래 민우회) 여성노동상담실에도 '직장 내 성희롱'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상담이 가장 많다. 지난해 총 222건으로, 전체 상담건수(394)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임신출산육아'(51건), '임금체불'(43건) 등 다른 상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치다. 올해에는 7월까지 접수된 상담 189건 중 114건이 '직장 내 성희롱' 관련이다.

수습·인턴·하청노동자... 가장 약자에게 주로 가해져

민우회가 지난 8월 홈페이지에 공개한 지난해 상담기록을 살펴보면 성희롱은 주로 인턴이나 수습, 하청 노동자 등 회사 안의 가장 약자에게 가해진다. 대부분의 성희롱이 상사와 하급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피해 여성들이 공식적으로 항의하면 회사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대신 고용약자인 피해자를 해고해버리기도 한다.

지난해 8월 상담을 요청한 임시일용직 D씨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 가해자인 상무는 '그만두고 싶지 않으면 나를 잘 따르라'며 D씨를 성추행했다. 사장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를 해 상무가 형사입건이 된 뒤에야 사장은 '인사위원회를 통해 잘 처리하겠으니, 고소를 취하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뒤 서면으로 열린 인사위원회에서 상무는 6개월 감봉 조치가 내려졌고, D씨는 퇴사 처리됐다.

공공기간에서 파견계약직으로 일한 E씨는 전 직원 앞에서 뺨을 맞는 신체적 폭력에 이어 성희롱까지 당했다. 뺨을 맞았을 때는 불이익이 있을까 두려워 가만히 있었지만, 성희롱을 당한 후인 지난해 4월에는 민우회에 상담을 요청했다. 회식자리에서 한 상사는 E씨를 포함한 계약직 세 명을 가리키며 "도우미 세 명 왔네, 왔으면 술이나 따르지 왜 안 따르느냐"고 말했다.

▲ 한국여성민우회가 공개한 상담기록을 보면 직장 내 성희롱은 회사 안 가장 약자인 수습, 인턴, 하청노동자에게 주로 가해진다. 성희롱이 권력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특징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만들어 배포한 성희롱 예방 교육용 동영상의 한 장면. ⓒ 고용노동부


신입 여성노동자는 여러모로 상사의 성희롱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경우 상사가 업무를 가르쳐준다거나, 지시를 내린다는 빌미로 접근하기 때문에 거부하기 어렵다. 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피해자는 직장 안 관계망도 좁아, 동료들의 도움을 얻기도 힘든 처지다. 회사가 성희롱 사실을 파악한 즉시 개입해야 하는 이유다.

현행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아래 고평법)에 따르면 사업주는 성희롱 발생을 확인한 즉시 가해자를 징계하거나 그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돼 있다(14조). 또한 피해노동자에게 해고와 같은 불이익을 주지 못하고(14조2항),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37조2호).

하지만 법과 현실은 달랐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 피해 사실을 알려도 제대로 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보복성 징계나, 왕따, 괴롭힘에 시달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도운 직장 동료까지 징계를 받기도 한다.

문제제기하면 보복성 징계... 피해자가 왕따에 시달리기도

지난해 11월 제조업체 정규직인 F씨는 팀장으로부터 원치 않는 성적 구애에 시달리다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며 민우회를 찾았다. F씨의 사직서를 받은 임원은 '가해자를 회사에서 내보내겠다'며 F씨의 사직을 보류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쓰러지기도 했던 F씨가 몸을 추스른 후 다시 회사에 출근한 날, 담당임원으로부터 억울한 통보를 받았다. 임원은 "가장 깨끗하게 해결되는 건 가해자와 F씨가 둘 다 그만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억울한 F씨는 인사팀에 정식으로 신고했다. 하지만 인사팀은 일부 성적인 발언만 성희롱으로 인정할 뿐 끈질긴 성적 구애는 성희롱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라고 했다. 가해자는 정직 2주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F씨와 그를 돕던 동료 직원도 함께 징계를 받았다. 동료 직원은 근무태만, F씨는 동료를 협박해 증거자료를 얻어냈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F씨는 회사 안에서 왕따가 됐다. 셔틀버스에서든 회의실에서든 아무도 그의 옆에 앉지 않았다.

지난해 9월 G씨는 입사 다음 날 떠난 출장에서 인사팀 직원이 자신을 성희롱한 사실을 팀장에게 알렸다가 수습기간이 끝나기 하루 전날 해고됐다. "걱정하지 마라"며 G씨를 안심시켰던 팀장은 수습기간이 끝나기 직전에 메일로 해고통보서를 보냈다. 그날 밤 집으로 찾아와 G씨의 사인까지 받아갔다. 해고사유는 빈번한 무단이탈, 영업성적 저조였다.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한 적이 없는 G씨로선 억울할 뿐이다. 

성희롱 사실을 회사에 알려도 제대로 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여성들은 고용노동부의 문을 두드린다. 피해자가 해당 사업장을 관할하는 지방노동관서에 신고하면, 지방노동관서의 장은 즉시 관련 법령 위반 여부를 조사한 후 시정 조치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조사과정에서도 여성들은 근로감독관의 불성실한 태도에 또 한 번 불쾌감을 느낀다.

지난해 1월 상담을 받은 H씨는 근로감독관의 고압적 태도에 피해가 더 가중됐다고 토로했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성희롱을 알렸다 해고된 그는 지역 노동청에 진정을 냈다. 조사과정에서 감독관은 "그렇게 억울하고 부당하게 잘렸으면 남아서 투쟁이라도 했어야지 왜 아무 것도 안 했느냐"면서 오히려 그를 나무랐다.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I씨도 근로감독관이 "뭘 원하느냐"며 쏘아붙인 탓에 더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근로감독관은 "내 일이 아님에도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왜 그러느냐", "성인인데 그것도 모르냐, 똑바로 말하라"고 했고, 참다못한 I씨는 지난해 8월 민우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남직원끼리 낄낄... 형식 아닌 내실 있는 예방교육 필요해

▲ 전문가들은 직장 내 성희롱을 근절하기 위해선 내실 있는 예방교육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재는 강사 자질과 콘텐츠에 대한 당국의 관리감독이 부실한 실정이다. 때문에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다 오히려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며 항의하는 일도 벌어진다. 사진은 지난해 고용노동부가 만들어 배포한 성희롱 예방 교육용 동영상의 한 장면. ⓒ 고용노동부


여성들이 직장 내 성희롱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건 하루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반복되는 고충을 예방하기 위해 모든 민간사업장에서 연 1회 이상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도록 의무화했고, 공공기관은 여성가족부의 주관 아래 예방 교육이 진행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금의 예방교육이 남성 직원들끼리 낄낄거리며 웃고 마는 형식적 차원에서 그치고 만다고 말한다. 지난해 6월 서울 마포경찰서는 '성희롱 예방 교육'이라며 전·의경을 상대로 한 성교육에 여성 주무관들을 참석시켰다가 논란을 빚었다. 당시 교육 참가 여성들은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성적수치심을 느꼈다며 항의했다. 성교육과 성희롱예방교육은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례는 교육 콘텐츠에 대한 당국의 엄격한 관리·감독이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

임유영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 상담팀 활동가는 직장 내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해선 "조직문화와 직원들의 의식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꾸준히 실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민우회에서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상담을 담당하는 강선미 활동가도 "성희롱 예방 교육의 내실을 다지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동시에 "회사에 들어와서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반성폭력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직문화와 불안한 고용형태가 성희롱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성희롱이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직장 안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계약직, 파견, 하청 노동자들이 표적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한 직장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이들끼리 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 활동가는 "계약직, 파견, 하청 등으로 고용조건이 세분화되면서 회사 안에 노동자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성희롱이 발생하면 이를 목격한 동료들의 지지와 도움이 필요한데, 직원들이 쉬쉬하거나 심지어는 상사인 가해자 편에 서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성희롱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계약직이나 수습, 인턴은 하대해도 된다'는 식의 조직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노동자들끼리 공동체 의식을 회복해 사태 해결을 위해 돕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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