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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술맛, 알고 먹으니 더 맛있구나!

[유난히 맛난 집을 찾아가다 6] 경기도 고양시 원당 배다리 막걸리

등록|2014.09.09 18:17 수정|2014.09.11 17:00
나는 비주당(非酒黨)다. 어느 날 아들이 한 말이다.

"아버지가 평생 마신 소주의 양은 한 박스(30병)도 안 될 겁니다."

▲ 배다리 막걸리 ⓒ 박도

나는 술을 조금 마시면 곧 얼굴이 붉어지거나 정신이 몽롱해지기에 회식자리에 가도 거의 입에 안 댄다. 그래서 군에 복무할 때는 비주당으로 소문이 나서 독립소대 파견대장으로 자주 차출되었다. 군에서 대부분 대민사고는 술 문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방지책으로 나를 뽑았던 모양이다.

얼마 전, 명함 집을 정리하는데 '배다리박물관 대표 박상빈'이란 명함이 나왔다. 박상빈은 옛 제자로 10년 전 쯤 걔네 동기 졸업 20주년 모임에서 그 명함을 건네 받은 듯하다.

그때 그 동기들은 모교 부근 서울 신촌 한 밥집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정중히 초대하기에 먼 길을 찾아갔다. 사회자는 굳이 나에게 마이크를 건네기에 덕담과 함께 그날 모인 졸업생을 하나하나 거명하면서 20여 년 전 모습과 일화를 얘기했다.

"00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갈 때 슬리퍼 신고 갔다"는 얘기부터 시작으로 "여학생 누구와 누구는 설악산 숙소에서 한방 중에 아래층 남학생 숙소로 내려가다 걸렸다"는  대목에 이르자, 졸업생들은 밥상을 두들기는 등 야단이 났다. 그 여학생은 그제는 중학교 다니는 학부모인데, 그 소문이 나면 자녀교육이 안 될 거라는 항의 겸, 내 기억력에 탄성을 질렀다.

"얘들아, 내가 누구니? 작가는 과거의 추억을 우려먹고 사는 사람이야."

그 말에 박수가 터졌다. 그날 자리를 뜰 때 그는 명함을 건네며 자기 박물관을 꼭 찾아달라고 정중히 초청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나는 문득 그에게 다이얼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까닭은 1980년 여름, 걔네 동기들이 수학여행을 갔을 때 남자가 여자로 분장하는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에 일본여인으로 출전한 그의 모습이 삼삼하게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남자가 여자보다 더 예쁘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그는 미스 일본 대표로 출전하였는데, 미스 인도대표로 출전한 김홍걸(김대중 대통령 3남) 군과 최종심에서 왕관을 다툰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기모노를 입은 그의 분장과 스피치, 그리고 인도 여인으로 분장한 김홍걸 군의 육체와 미모는 대회의 압권이었다.

▲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 미인들(1980. 8. 이대부고 2학년 수학여행 행사장, 왼쪽에서 박상빈, 김홍걸, 명철규) ⓒ 박상빈


배다리박물관

▲ 배다리박물관 술사입독(술통) 앞에서 박상빈 대표. ⓒ 박도

명함에 새겨진 손 전화번호로 하려다가 011로 시작하기에 일반전화 다이얼을 누르자 그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우리는 곧 30여 년 전 그의 고교 재학시절로 돌아가 한 10여 분 옛 추억을 되새김질했다. 그는 그때의 사진이 자기 앨범에 두어 컷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진도 볼 겸 그의 배다리박물관을 찾기로 했다.

그의 배다리박물관은 3호선 원당 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원당은 나에게 낯익은 지명으로 군복무시절 우리 중대가 1970년 초 한때 그곳에 주둔했고, 나는 특히 서삼릉 부근에 있는 우리 사단 최고 요지라는 한양컨트리클럽 골프장 외곽경비소대장을 두어 달 했다.

지난 9월 3일 오후 내가 원당 역에서 그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하자 그는 곧장 그곳으로 안내했다. 40여 년 만에 그곳을 가자 골프장, 서삼릉청소년야영장은 그대로 있었는데, 군부대 자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배다리박물관은 우리 고유의 술도가를 재현시켜 놓은 곳이었다. 그는 나에게 박물관 소장품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못지않게 옛날 술도가의 술 만드는 기구와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있었다. 어린시절 나의 할아버지는 대단한 애주가로 매일 막걸리 한두 사발을 드셨다.

그 무렵에는 밀주 단속이 매우 심하여 명절 때나 농번기 때는 몰래 집에서 술을 담갔고, 나머지 시기는 우리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구미 원평동 오거리 장터 공씨 술도가에서 술을 받아왔다. 그래서 노란 주전자를 들고 공씨네 술도가에 가면 언저리부터 술(막걸리) 냄새가 확 풍겼고, 술지게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술심부름을 했기에 그 분위기와 그때의 술맛은 아직도 내 입에 그대로 살아있다.

나는 교단에 선 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 가운데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대목을 가르칠 때면 술이 익는 그 정황을 아주 자세히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때 내 얘기를 들은  제자들은 그때의 전통주 술 담는 얘기를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

▲ 전통 막걸리 빚는 모형 ⓒ 박도


5대를 이어오다

그는 자기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그곳에서 양조장을 하였는데, 자기 아버지는 아들이 술도가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하였단다. 중학교 때부터는 아예 서울로 유학시키며 장차 펜대 굴리며 살라고 하였지만, 그는 끝내 조상의 술도가를 물려받았다고 했다. 그때 만일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자기의 끼를 발휘했다면 꽤 성공한 연예인이 되었을 거라고 지난 삶을 곱씹으며 씁쓸히 웃었다. 

그는 나를 위해 박물관 한편 탁자 위에 그의 양조장에서 만든 배다리막걸리 시음을 준비해 두었다. 내가 배다리막걸리를 입에 대자 어린 시절에 맛본 순곡 막걸리의 그 맛이었다. 막걸리 맛이 달작지근하고 입안이 상큼했다.

"자네 집 술맛이 좋네."
"1960~7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저희 집 술을 좋아하여 청와대로 납품했고, 6·15 남북정상회담 때는 김대중 대통령께서 저희 집 술을 북으로 가져가서 김정일 위원장과 합환주로 나눠 마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는 이즈음 매우 힘들다고 했다. 한때 막걸리 붐으로 호경기도 있었지만, 곧 시들어진데다가 자기가 많은 개발비를 들여 만든 '아사달'이라는 40도의 순곡 증류주는 예상만큼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한때 배다리막걸리는 일본에까지 수출도 했지만, 무역상을 잘못 만나 별로 재미도 보지 못했다고 그간의 실정을 토로했다.

"뭔 일이나 호경기 때와 불경기 때가 있을 거야. 묵묵히 참으면서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기 바라네. 우리나라 전통 민속주를 계승한다는 큰 사명감으로 다음 세대로 이어 주게나. 그리고 발상의 전환으로, 남성용 독한 술만 개발할 게 아니라, 여성들이 즐겨 마실 수 있는 순하고 향기가 좋은 순곡 증류주를 개발해 보게나. 이름도 '아사녀'로 짓고."
"선생님,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곧 상표등록을 하겠습니다. 오늘 선생님이 제 박물관을 찾아주신 보람이 있도록 개발해 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상술에 따르면, 돈을 벌려고 하면 두 가지를 타깃으로 하라고 했어. '첫째는 물장사를 하라, 그 둘째는 여성의 지갑을 열게 하라'고 하였지. 자네는 이미 물장사를 하고 있으니, 앞으로 여성 취향에 맞는 민속주를 개발하게나. 그러면 성공할 거야."
"네, 선생님!"

▲ 전통 양조장 기구들 ⓒ 박도


그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는 이미 준비해 둔 고교 시절의 사진을 세 장을 꺼냈다. 고교 시절 수학여행 때와 모의올림픽(교내체육대회) 때 사진이었다. 사진은 기대만큼 선명치 못했다.

"그땐 카메라도 귀한 시절이라…. 제 옆이 저와 왕관을 다투었던 미스 인도 대표 김홍걸이고요, 맨 오른쪽은 아프가니스탄 대표로 분장한 명철규란 친구예요."

그랬다. 그 시절은 카메라가 귀했다. 그와 나는 그때 사형수의 아들 얘기를 했다.

"홍걸이가 대통령의 아들이 될 줄은 몰랐지요."
"그게 인생이네. 내 고교 동창 아무개는 한때 잘나가는 기업인으로 MBC 성공시대에도 나왔지만 강원랜드를 드나들더니 얼마 전 초라한 도박방지협회장으로 TV에 나오더군. 성공은 어렵지만 절제치 않거나 자기관리를 하지 않으면 한 방에 나가. "
"선생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손님은 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법, 나는 박물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다시 승용차로 원당 역까지 태워주었다. 나는 그의 승용차 안에서도 훈장의 티를 버리지 못하고, 그가 전통주 명장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우리 민속주 계승에 이바지해 주기를 신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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