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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19세기 파리 건물에서의 3년, 실상은...

[공모-나는 세입자다, 시즌2] 프랑스 파리서 집 구하며 겪은 우여곡절

등록|2014.09.22 08:20 수정|2014.09.22 08:20

▲ 파리 아파트 전경 ⓒ 한경미


프랑스는 다른 유럽과 마찬가지로 전세는 없고 월세만 있다. '월세살이'의 고통을 이야기하려면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난 알프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교편을 잡고 있는 남편의 박사 논문이 영 진척을 보이지 않아 고민이었다. 결국 남편에게 휴직을 권한 뒤 1년간 파리에 올라가 박사 논문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남편은 자신이 다니는 소르본 대학 근처에 집을 얻기 원했다. 당시에는 파리의 방세가 지역에 따라 엄청 다르고 소르본 대학 근처 6구 지역의 방세가 엄청 비싸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휴직 상태인 남편과 직장도 없는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그 동네에서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둘러본 부동산 중 한 곳에서 드디어 우리 마음에 드는 방 광고를 보게 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과 퐁 뇌프 사이 센 강변에 위치한 면적 15㎡되는 작은 스튜디오로, 방세도 그럭저럭 감당할 만 했다. 알프스에서는 방 2개에 거실 하나인 75㎡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이렇게 작은 규모로 이사를 하려니 눈앞이 까마득했으나, 파리 시내에서 살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이 스튜디오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시골과 달리 파리에서는 임대로 나온 스튜디오(원룸 아파트)나 아파트에 심하면 몇 십 명의 경쟁자가 붙기도 한다. 보통 엄격한 서류 심사를 거쳐 월급이 제일 세고 보증이 튼튼한 자가 아파트를 얻게 되는지라 휴직자인 남편과 직업 없는 내 신분으론 집을 구하기 어려웠다.

19세기 우아한 건물에서의 3년 6개월, 실상은...

남편과 난 머리를 맞대고 좋은 생각을 짜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1년 월세를 한꺼번에 지불하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부동산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는 원룸을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위법에 해당했는데 부동산에서 그냥 눈감아주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집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파리 시내 한복판에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금액이 꽤 되는 1년 방세는 시부모님이 대신 내주셨고 우리 짐의 대부분은 시집에 맡기고 우리는 1년간 살 아주 간단한 짐만 들고 파리로 이사했다.

그러나 1년을 예상했던 남편의 박사과정 마무리는 3년 6개월이나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조금만 움직여도 부딪히는 좁은 공간에서 둘이 살아야 했는데, 그건 정말 고역이었다. 센 강변에 위치한 19세기의 우아한 건물을 들락거릴 땐 지나가는 사람들의 부러움 섞인 눈길을 받았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사는 원룸은 센 강변쪽이 아닌 반대편 작은 뜰 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데다, 옆 건물 벽이 우리 집 창문을 떡 가리고 있어 햇빛도 보기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항상 잿빛 날씨가 창문에 걸려 있는데 실제 날씨가 어떤지 보기 위해선 창문을 열고 고개를 쑥 빼 하늘을 봐야 했다. 해가 쨍! 나는 날에도 우리 창문에는 항상 잿빛 날씨만이 걸리던 그런 집. 남편의 두통은 더욱 심해졌고 난 한국 여행사에서 일을 하며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어렵게 가계를 꾸려야 했다. 인간은 최소한의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의식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주'라는 개념을 이때 절실히 느꼈다.

드디어 남편이 박사 학위를 얻고 학교에 복직을 하게 되면서, 더 이상 콧구멍만 한 이 작은 원룸에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새 집을 구하러 다녔다. 3년 6개월의 파리 생활을 토대로 집값이 비싼 6구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가야 했다. 방세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파리 북동부에 위치한 19구, 20구 지역의 아파트 여러 곳을 방문했다.

이때 여러 곳을 둘러보지 않았다면, 파리의 주거시설이 형편없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대부분 오래된 건물이었고 입구부터 음산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면 다시 어두침침한 복도가 나왔다. 아파트 내부의 창은 왜 그렇게 작은지... 대부분 수리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은, 내부구조가 허술한 집들이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임대료보다 더 비싼 아파트는 시설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대료로 나갈 예산이 정해진 우리 입장에선 터무니없이 비싼 집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집에서 살면 며칠 지나지 않아 우울증 걸리기가 십상일 것 같'은 아파트도 임대료는 터무니없이 비쌌다. 하루 종일 발품 팔아 아픈 다리를 끌고 저녁나절 원룸에 들어오면 내 삶이 참 처량하게 느껴졌다.

파리에서 집구하기 어려운 이유, 이거였구나

▲ 파리의 현대 아파트. A Vendre 매매 아파트라는 뜻. ⓒ 한경미


이렇게 수없이 집을 보러 다니던 중에 드디어 20구 강베타(Gambetta) 광장 근처에서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만났다. 한적한 길에 자리 잡은 방 하나에 거실 하나 딸린 46㎡정도의 현대식 아파트였는데, 꽤 넓은 테라스도 있었다. 즉시 주인이 원하는 제반 서류를 준비해서 내었는데 탈락했다. 주인은 이전 임차인이 임대료를 많이 밀렸던 터라, 아주 엄정한 방법으로 임차인을 선택하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주인은 분명 이 집에 들어가겠다는 많은 후보자들 중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 사람을 선택했을 것이다. 파리에선 보통 세입자의 월급이 방세의 3배 혹은 4배가 되어야 방을 구할 수 있는데, 파리지엥들은 평균 자기 월급의 40%를 월세로 내고 있는 상황이다. 파리에서 집구하기가 어려운 이유다.

결국 19구 뷔트 쇼몽 공원(Parc Buttes-Chaumont)에 인근에 방을 얻었다. 비록 1970년대에 지었지만, 현대적인 건물이었고 방 하나에 거실 하나의 56㎡짜리 아파트였다. 교육 공무원인 남편의 월급이 방세의 3배에 달하지 못해 퇴직하신 시부모님들이 보증을 서줘야 했다. 시부모님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파리에서 사는 게 여러 가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동네에서 1년을 살았는데, 의외로 상가도 많고 공원도 있는 등 사람이 살기 좋았다. 그런데 이사한 뒤 1년 후, 시청에서 새로 지은 사회주택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으니, 오라는 연락이 왔다. 6구에 살 때 사회 주택에 들어가기 위해 신청을 해놓았는데 드디어 연락이 온 것이다.

사회 주택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프랑스에는 일반 주택 외에 사회 주택이 있는데 정부에서 관리해서 임대료가 상당히 저렴하다. 보통 10년 이상 기다리는데 우리는 2년 정도 기다렸으니, 운이 좋은 셈이었다. 이 사회주택 아파트는 새로 지어진 건물이고 주차장까지 딸려 있었는데, 임대료도 당시 우리가 내던 것보다 300유로 정도 쌌다. 당연히 이 집으로 이사 가는 게 상식인 상태에서 남편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이사를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다시 번거롭게 이사를 하지 않고 싶다고 했다. 특히 현재 살고 있는 동네와 아파트가 맘에 드는데, 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17구 외곽 쪽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평소에도 돈 개념이 없는 남편이었지만,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하겠다니... 그러나 싫다는 남편을 억지로 끌고 이사 갈 수는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시청에 전화해서 포기하겠다고 하니 굉장히 놀라워했다. 정말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할 거냐며 다시 한 번 물어보는데,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 입장이 서러웠다. 겨우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데 2주 정도 지나 다시 시청에서 편지가 왔다. 새로운 사회주택 아파트가 다시 우리에게 배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지난번처럼 17구에 위치해 있고 비슷한 조건과 비슷한 임대료였다. 프랑스 행정이 엉망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포기한 사람에게 또 다시 제안을 하다니... 이번에도 다시 포기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것.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집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을 팔고 싶은데 사지 않겠느냐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보통 집 주인이 집을 팔고 싶을 때 세입자에게 먼저 살 의사가 있는지 타진하고 사지 않겠다고 혹은 못 사겠다고 하면, 그때 제3자에게 양도한다.

우리는 다시 임대 아파트를 구하러 다녀야 할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 끔찍한 악몽을 다시 밟고 싶지 않아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아파트를 사자고 말했다. 그 때가 벌써 10년 전이다. 당시엔 아파트 값이 지금처럼 높지 않아 가능했는데 지금이라면 도저히 불가능 했을 것이다. 사회 주택 아파트로 이사 가지 않아 원망했던 남편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세입자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나는 세입자다' 공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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