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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멈춘 어느 날... 비극은 시작됐다

[주제 사라마구 읽기 ⑤] 삶과 죽음의 철학적 해석, 소설 <죽음의 중지>

등록|2014.09.22 14:19 수정|2014.09.22 15:18
"우리는 단지 좋을 때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힘이 있고 몸이 말짱할 때만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쁠 때도, 최악일 때도, 빨아도 소용이 없는 악취 나는 걸레나 다름없게 되었을 때도 옆에 있어야 한다." - 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 중에서

▲ 죽음의 중지 ⓒ 해냄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 0시를 넘어가는 순간 한 국가의 죽음이 사라졌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던 모후(母后. 왕의 어머니)와 질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이 죽지 못하고 산송장처럼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죽음의 중지>는 어느 날 죽음이 사라진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죽음을 통해 곁에 있는 사람의 부재와 소중함을 되돌아 볼 수 있고, 삶의 의미도 느낀다. 또한 죽음은 삶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마지막 촛불이다. 끝이 있어 시작이 의미를 가지듯 죽음이 삶의 의미를 만든다.

죽음이 사라진 삶

책 속 죽음의 부재는 이웃 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더구나 이 나라에서도 인간에게만 한정되어 일어났다. 장례 업계와 종교계 그리고 보험 업체 등 죽음과 연관된 모든 영역에서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죽음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험사는 80년을 주기로 보험료를 갱신해주겠다고 했으며, 장례 업계는 국내에 있는 스파이와 협정을 맺고 매일 죽어가는 개와 고양이, 도마뱀 등을 처리하는 볼품 없는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종교계는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있을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종교가 존재할 의미도 없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이는 필시 신의 분노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소설을 보면 인간들은 삶 속에서 죽음을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하나의 물질로 치부한다. 죽음이 사라지자 도시는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인간들은 죽음의 부재를 잊고 그저 살아가게 된다.

보험, 종교, 장례 단체는 죽음이 사라진 삶을 단순한 사회 변화로 인식한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에 적용되는 변화를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 단체들이 보기에 인간의 삶과 죽음은 돈과 명예로 치환할 수 있는 단순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는 수많은 사람이 실처럼 가는 호흡을 내쉬며 목숨을 연명하는 산 자들의 공동 묘지로 변해간다. 죽음도 삶도 아닌 그들의 시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국경선이었다. 죽음이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된 것이다.

죽음이 없는 상태의 혼란과 무질서

그러던 중 오래도록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노인을 데리고 있던 한 소규모 자작농 가족이 새로운 발상을 한다. 국경 너머로 노인을 데리고 가서 죽이자는 것이었다. 이후 국내 여러 사람들은 이웃 국가와 맞댄 국경으로 죽일 사람들을 데리고 가게 된다. 이 나라와 근접한 이웃 4개 국가는 전시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다행히 국내 왕은 국경에서 죽음을 맞고 장례는 국내에서 치루겠다는 협상을 통해 이웃 나라와의 전쟁은 면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점점 죽음의 부재에 익숙해져갔다. 그러던 중 총리 앞으로 자주색 편지가 도착한다. 소문자 '죽음'이라는 서명이 적힌 편지로, 내일부터 다시 죽음이 시작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7개월 동안 일방적인 휴전을 한 죽음으로 인하여 6만 2580명이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다음날 죽음이 시작된다면 국가는 다시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총리는 다음날 오전 12시가 되기 3시간 전 텔레비전을 통해 비상사태를 알린다. 국가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7개월 동안 죽음의 부재를 겪고 있던 인간의 삶에 다시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이 다시 시작되는 날 죽음 대기자 6만 2580명이 한꺼번에 죽는다. 여기에는 모후도 끼어있었다. 이로써 한 세대가 죽고 한 세대가 태어나는 올바른 흐름이 다시 시작된다. 장례 업계는 일꾼들과 목수를 모집하느라 바쁘고, 교회도 참회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리고 다음날 6만 명이 넘는 죽음을 시작으로 삶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다.

소설은 이제 '죽음'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죽음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죽기 일주일 전 그 사람에게 자주색 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반복한다. 하루에 약 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일주일의 삶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 '죽음'이 여느 때와 같이 자주색 편지를 쓰고 있는데 한 통의 편지가 되돌아온다. '죽음'은 그 편지를 다시 보내 보지만 또 되돌아온다.

'죽음'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사람들에게 삶을 선고하는 나날이 흐르던 중 '죽음'은 어떤 편지가 연달아 되돌아오자 의아해 한다. 그 사람은 50살의 독신 남자 첼리스트였다. 그는 원래 49살에 죽어야 하지만 50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죽음'은 그 사람을 몰래 관찰하고, 한 번 더 편지를 보내보지만 소용없었다. '죽음'은 그와 대면하여 직접 편지를 전하기로 한다. '죽음'은 직접 그 사람을 찾아 나섰다. 죽음이 삶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죽음은 그를 관찰하며 따라다닌다. 그의 음악회에 가서 노래를 듣기도 하고 그가 침실에서 잠자는 것을 지켜보기도 한다.

마침내 '죽음'은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첼리스트 앞에 나타난다. 그리스 로마 시대 운명의 세 여신(파르카이)처럼 소설 속 '죽음'은 여성 인간으로 분장한다. '죽음'은 그를 겁주면서 건네줄 편지가 있다고 한다. 그렇게 첼리스트와 죽음은 여러 이야기를 한다. 그러던 중 첼리스트는 '죽음'을 사랑하게 된다. 인간의 모습으로 첼리스트와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죽음'은 첼리스트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는다. '죽음'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무엇에 이끌렸는지 그와 사랑을 나눈다.

'죽음'을 사랑하게 된 '삶'

▲ 죽음이 멈춘 나라...무엇을 말할까 ⓒ pixabay


새벽에 몰래 일어난 '죽음'은 그에게 전할 편지를 불태우고 다시 그의 곁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다. 삶이 '죽음'조차 빠져들게 할 정도로 강렬했던 것이다. '죽음'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절대 잠들지 않는 '죽음'은 그의 곁에서 잠이 든다. '죽음'이 삶의 곁에서 깊은 잠에 빠진 다음날, 다시 아무도 죽지 않았다. 인간들의 죽음이 멈춘 것이다. '죽음'이 잠들고 국가 내에서는 다시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첼리스트는 왜 연달아 죽음을 비껴간 것일까. 그가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인지, 죽음의 의식을 예술로 해소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죽음'의 여신은 첼리스트의 연주회에 가서 그의 연주를 듣던 중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죽음'이 삶에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은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죽음은 오십팔 초의 음악이 평범하든 특별하든 모든 인간의 삶을 박자와 선율로 치환했다는 느낌을 받았다...비극적 간결성, 그 절망적인 강렬함, 그리고 또 공중에 걸린 채 남아 있는 괄호 같은, 아직 못다 한 이야기 같은 마지막 화음..."

결국 인간이 죽지 않았던 지난 일곱 달 동안 '죽음'은 '삶'속에 있었다. 여기서 '삶'은 첼리스트와 같이 죽음을 취하게 만든 이를 말한다. 이어 인간들의 삶에 죽음의 부재가 발생한다. 일곱 달 후 '죽음'이 '삶'과 이별을 했는지, 아니면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인간들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책은 처음과 끝을 같은 구절로 매듭지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 오래도록 곱씹어 본 마지막 구절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독자에게 문장의 처음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라는 구절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인간 공동체의 죽음에서 진짜 '죽음'의 부재로 변화한 것이다.

책에 제시된 '죽음'은 해골의 모습으로 낫을 들고 어둠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죽음의 편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죽음'은 누군가가 죽기 일주일 전 편지를 보내는데 마지막 서명에는 항상 대문자 'DEATH'가 아닌 소문자 'death'를 이니셜로 써넣는다. 이유는 책 속의 '죽음'은 세상 모든 생명체의 죽음을 관장하지 않고 분화된 종(種)들 중 하나를 관장하기 때문에 소문자 이니셜을 쓴 것이다. 주인공 '죽음'이 담당하는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었다.

죽음을 둘러싼 논쟁

주제 사라마구는 그저 죽음을 한 편의 우화처럼 재미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소설은 인간의 죽음과 '죽음'의 출현 간의 공백을, 철학자와 물 위를 움직이는 령(靈)과의 묵직한 대화로 잇는다. 이 둘은 단수의 죽음과 복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논쟁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미 <죽음의 중지>에서 죽음의 크기와 수를 동시에 나타냈다. 하나의 '죽음'이라는 존재의 부재는 인간 다수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 만약 하나의 '죽음'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약 300명 정도 인간들의 죽음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철학자는 소수와 다수가 아닌 단수(하나의 '죽음')와 복수(약 300명의 인간)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크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예기치 않게 한 사람이 죽었을 때 주위 친가들이 고통받게 된다면, 죽음의 크기는 단순히 한 명에 제한되지 않고 크게 번진 결과와 같다. 죽음이라는 것이 심장 박동의 정지로 정의될 만큼 단순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살아있지만 괴로움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숨 쉬는 시간이 과연 생(生)일까, 아님 사(死)일까. 어느 인간이든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환경들을 볼 때 언제나 주관적인 시각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철학자와 영과의 대화가 죽음에 대한 객관적 정석은 아니라 할지라도 곱씹어 볼 만한 문구이기는 하다.

예술 작품은 이성보다 감성이 만든다. 문학이라는 예술을 통해 주제 사라마구는 죽음의 어느 부분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죽음의 깊은 감성을 어떤 방식으로 <죽음의 중지> 속에 녹여낸 것일까. 삶 속에서 죽음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 <죽음의 중지>를 통해 죽은 생명과 살아있는 생명 사이의 기여, 죽음의 부재가 삶 속에서 갖는 의미 그리고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을 풀어냈다.

'죽음'조차 취하게 만드는 삶, 주제 사라마구는 강렬한 삶의 본능이 죽음의 본능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들이 삶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덧붙이는 글 <죽음의 중지>(주제 사라마구 (지은이)/ 정영목 (옮긴이)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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