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만원에 집 마련했지만... 그래도 월세 전전
[공모-나는 세입자다] 공무원생활 27년, 4번에 걸친 '이사 역사'
"이사 비용이 75만원이라는데?"
"그래도 어쩌겠니, 가야지..."
"손 없는 날이 언제인지 알아 봐야겠다."
"그거 다 미신이야,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이사해"라는 말을 했을 만도 한데,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 집안이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니 딱히 말릴 이유도 없다.
1994년 결혼 이후, 4번째 이사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 그냥 눌러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내년이면 어쩔 수 없이 비워야 한다. 그 시기에 임박해 마땅한 집이 없어서 난감한 상황을 맞느니 '마땅한 월세가 나왔을 때 얼른 이사하는 게 상책'이란 아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이사를 해야 하는 이유는 공무원 임대 아파트 계약만료 때문이다. 2007년에 입주했으니 7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월세, 전기료, 가스요금 등 한 달 소요되는 비용은 대략 40여만 원. 이 행운도 이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비워 줘야 한다.
대궐 같았던 14평짜리 아파트
돌이켜 보면 몇 번 되지 않은 우리 집 이사 역사에 애환도 많았다. 결혼 전 세 식구가 살 집이 필요했다. 집사람과 나, 또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지금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딸아이다. 녀석은 뭐가 급했는지 우리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기 1년 전에 태어났다.
400만 원짜리 전세방. 직사각형의 울타리 안 기역자(ㄱ) 형태의 집. 우리 가족을 포함한 세 가구가 모여 살았다. 똑 같지는 않지만 꼭 과거 TV드라마에서 보았던 '한 지붕 세 가족'과 비슷한 형태였다.
6평 남짓한 공간에 부엌 겸 거실과 조그만 방 하나가 딸린 집 구조. 대문 입구에 설치된 남녀 공용 재래식 화장실은 겨울이면 칼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슬레이트 지붕을 힘겹게 떠 바치고 있던 흙벽돌은 수시로 흘러내려 거적을 걷어 올리면 밖이 훤히 보이곤 했다. 주인에게 수리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지난번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며 알아서 고쳐 살든지 아니면 나가란 식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견딜 만했다. 문제는 술 취한 옆집 아저씨의 횡포였다. 한밤중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며 온갖 넋두리를 했다. 그러다 자신의 집에 들어가면 대판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즈음에 태어난 둘째 아이가 놀라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큰 아이가 세 살 되던 어느 겨울날, 결국 이사를 가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가 사는 가옥 구조와 비슷한 뒷집에서 불이 났다. 부모가 외출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우리 큰 애 또래의 아이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방 한 구석에서 종이를 태우다 집 전체로 불이 옮겨 붙었단다.
남의 집 일이 아니었다. 다음날부터 우리 부부는 집 구하기에 나섰다. 아파트가 하나 났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2000만 원짜리 전세 아파트, 14평 규모의 공간은 마치 대궐 같았다. 아이들은 집안에 화장실이 있다며 마냥 신기해 했다.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이사를 하기로 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내 전세금을 치르고 이삿짐을 쌌다. 살던 집에서 도보로 10여 분 정도의 거리였디. 이삿짐을 옮길 용달차를 빌릴 필요는 없었다. 수레를 빌려 다섯 번 왕복으로 마무리 했다. 나는 수레를 당기고 집사람은 밀고 하는 식으로 이삿짐을 옮겼다.
공무원 아파트 입주, 14평짜리 집이 발목을 잡았다
"천장 좀 보세요. 젖어 있죠? 내일까지 빨리 수리해 주세요."
이사 온 지 삼년 만에 이런 일이 벌써 네 번째였다. 1989년경에 지어진 그 조그만 아파트는 당초 연탄 보일러용으로 건축되었다. 이후 석유 보일러로 교체를 하자 방바닥에 깔린 보일러 호스가 부식돼 물이 새는 일이 빈번했다. 위층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집에 물이 새고 우리 집 방바닥 보일러 호스가 깨지면 아래층에서 항의가 이어졌다.
전체 보일러 선을 교체하면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주인은 물이 새는 부분을 찾아 응급처치 하는 식으로 처리했다. 그러니 얼마 뒤 또 다른 구석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반복됐다. 아파트 장판을 걷으면 마치 '시멘트 모자이크'를 해 놓은 것 같았다.
"300만 원만 더 내고 이 집을 사시죠?"
주인이 왜 물이 새는 부분만 땜빵을 하는지 그제야 알았다. 기회를 봐서 팔겠다는 생각이었던 집 주인은 많은 돈을 들여 바닥 전체 호스 교체를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 아파트 값이 더 이상 오를 리는 없지만 빚을 내서라도 사고 싶었다. 그러면 내 집이 하나 생기는 것 아닌가.
집이 생겼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잔금을 치르고 등기를 이전했을 때는 세상의 반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그 조그만 아파트에서 우리 네 식구가 10년을 살았다.
"우리, 아버지를 이 집에서 사시게 하고 우리는 공무원 아파트로 이사 갈까?"
군청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아파트 한 동을 내놓았다. 새로 지은 24평형 아파트는 분명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특히 장인 어르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은 서울에서 생활하시다 건강이 좋지 않아 화천으로 내려와 월세 집을 전전하고 계셨다. 이사를 가면 월세 17만 원에 전기, 수도, 가스요금 다 포함해도 한 달에 40여만 원으로 해결된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 명의로 된 집이 있기 때문에 맨 후순위 자격이란다. 2300만 원짜리 내 집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집이 없는 선순위 대상자들의 신청이 없자 결국 내 차례까지 돌아 온 거다.
이사를 온 후, 집을 비워줄 시기가 왔을 때 한 차례 연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 아파트에서 7년을 살았다. 그러나 내년에는 더 이상 연기할 명목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또 이사를 해야 한다. 과거에 살던 14평 아파트로는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 살림살이가 엄청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이 많으신 장인 어르신에게 불편을 드릴 수 없다는 것도 이유다.
연금 하나 믿고 살았는데... 괜히 아내에게 미안
"읍내에 24평짜리 월세가 하나 났다는데 미리 이사 가자."
아내의 제안에 결국 손이 없다는 10월 4일로 이사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지난 4일 예정대로 이사를 완료했다. 일단 직장인 군청에서 가까워서 좋다.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우리는 언제 남들처럼 집짓고 사냐?"
딸아이는 대학 3학년, 작은 아이도 금년에 대학에 진학했다. 그나마 녀석들이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부담은 덜하다지만, 집을 짓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대출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걸려있다. 몇 년 뒤 정년으로 공무원을 마무리하게 되면, 아마 퇴직금은 빚잔치로 끝날 것 같다.
그나마 기대하고 살아온 게 연금인데, 정부에서는 그것마저 못주겠다고 한다. '공무원 연금, 정부가 빚을 지고 왜 그걸 공무원들에게 갚으란 말인가'라고 말했던 선배 직원의 말이 공허한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도 어쩌겠니, 가야지..."
"손 없는 날이 언제인지 알아 봐야겠다."
"그거 다 미신이야,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이사해"라는 말을 했을 만도 한데,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 집안이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니 딱히 말릴 이유도 없다.
1994년 결혼 이후, 4번째 이사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 그냥 눌러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내년이면 어쩔 수 없이 비워야 한다. 그 시기에 임박해 마땅한 집이 없어서 난감한 상황을 맞느니 '마땅한 월세가 나왔을 때 얼른 이사하는 게 상책'이란 아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이사를 해야 하는 이유는 공무원 임대 아파트 계약만료 때문이다. 2007년에 입주했으니 7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월세, 전기료, 가스요금 등 한 달 소요되는 비용은 대략 40여만 원. 이 행운도 이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비워 줘야 한다.
▲ 17년전에 살던 우리집엔 잡초만 무성하다. ⓒ 신광태
대궐 같았던 14평짜리 아파트
돌이켜 보면 몇 번 되지 않은 우리 집 이사 역사에 애환도 많았다. 결혼 전 세 식구가 살 집이 필요했다. 집사람과 나, 또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지금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딸아이다. 녀석은 뭐가 급했는지 우리 부부가 결혼식을 올리기 1년 전에 태어났다.
400만 원짜리 전세방. 직사각형의 울타리 안 기역자(ㄱ) 형태의 집. 우리 가족을 포함한 세 가구가 모여 살았다. 똑 같지는 않지만 꼭 과거 TV드라마에서 보았던 '한 지붕 세 가족'과 비슷한 형태였다.
6평 남짓한 공간에 부엌 겸 거실과 조그만 방 하나가 딸린 집 구조. 대문 입구에 설치된 남녀 공용 재래식 화장실은 겨울이면 칼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슬레이트 지붕을 힘겹게 떠 바치고 있던 흙벽돌은 수시로 흘러내려 거적을 걷어 올리면 밖이 훤히 보이곤 했다. 주인에게 수리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지난번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며 알아서 고쳐 살든지 아니면 나가란 식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견딜 만했다. 문제는 술 취한 옆집 아저씨의 횡포였다. 한밤중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며 온갖 넋두리를 했다. 그러다 자신의 집에 들어가면 대판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즈음에 태어난 둘째 아이가 놀라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큰 아이가 세 살 되던 어느 겨울날, 결국 이사를 가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가 사는 가옥 구조와 비슷한 뒷집에서 불이 났다. 부모가 외출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우리 큰 애 또래의 아이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방 한 구석에서 종이를 태우다 집 전체로 불이 옮겨 붙었단다.
남의 집 일이 아니었다. 다음날부터 우리 부부는 집 구하기에 나섰다. 아파트가 하나 났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2000만 원짜리 전세 아파트, 14평 규모의 공간은 마치 대궐 같았다. 아이들은 집안에 화장실이 있다며 마냥 신기해 했다.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이사를 하기로 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내 전세금을 치르고 이삿짐을 쌌다. 살던 집에서 도보로 10여 분 정도의 거리였디. 이삿짐을 옮길 용달차를 빌릴 필요는 없었다. 수레를 빌려 다섯 번 왕복으로 마무리 했다. 나는 수레를 당기고 집사람은 밀고 하는 식으로 이삿짐을 옮겼다.
공무원 아파트 입주, 14평짜리 집이 발목을 잡았다
"천장 좀 보세요. 젖어 있죠? 내일까지 빨리 수리해 주세요."
이사 온 지 삼년 만에 이런 일이 벌써 네 번째였다. 1989년경에 지어진 그 조그만 아파트는 당초 연탄 보일러용으로 건축되었다. 이후 석유 보일러로 교체를 하자 방바닥에 깔린 보일러 호스가 부식돼 물이 새는 일이 빈번했다. 위층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집에 물이 새고 우리 집 방바닥 보일러 호스가 깨지면 아래층에서 항의가 이어졌다.
전체 보일러 선을 교체하면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주인은 물이 새는 부분을 찾아 응급처치 하는 식으로 처리했다. 그러니 얼마 뒤 또 다른 구석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반복됐다. 아파트 장판을 걷으면 마치 '시멘트 모자이크'를 해 놓은 것 같았다.
"300만 원만 더 내고 이 집을 사시죠?"
주인이 왜 물이 새는 부분만 땜빵을 하는지 그제야 알았다. 기회를 봐서 팔겠다는 생각이었던 집 주인은 많은 돈을 들여 바닥 전체 호스 교체를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 아파트 값이 더 이상 오를 리는 없지만 빚을 내서라도 사고 싶었다. 그러면 내 집이 하나 생기는 것 아닌가.
집이 생겼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잔금을 치르고 등기를 이전했을 때는 세상의 반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그 조그만 아파트에서 우리 네 식구가 10년을 살았다.
"우리, 아버지를 이 집에서 사시게 하고 우리는 공무원 아파트로 이사 갈까?"
군청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아파트 한 동을 내놓았다. 새로 지은 24평형 아파트는 분명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특히 장인 어르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은 서울에서 생활하시다 건강이 좋지 않아 화천으로 내려와 월세 집을 전전하고 계셨다. 이사를 가면 월세 17만 원에 전기, 수도, 가스요금 다 포함해도 한 달에 40여만 원으로 해결된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내 명의로 된 집이 있기 때문에 맨 후순위 자격이란다. 2300만 원짜리 내 집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집이 없는 선순위 대상자들의 신청이 없자 결국 내 차례까지 돌아 온 거다.
이사를 온 후, 집을 비워줄 시기가 왔을 때 한 차례 연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 아파트에서 7년을 살았다. 그러나 내년에는 더 이상 연기할 명목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또 이사를 해야 한다. 과거에 살던 14평 아파트로는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 살림살이가 엄청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이 많으신 장인 어르신에게 불편을 드릴 수 없다는 것도 이유다.
연금 하나 믿고 살았는데... 괜히 아내에게 미안
"읍내에 24평짜리 월세가 하나 났다는데 미리 이사 가자."
아내의 제안에 결국 손이 없다는 10월 4일로 이사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지난 4일 예정대로 이사를 완료했다. 일단 직장인 군청에서 가까워서 좋다.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우리는 언제 남들처럼 집짓고 사냐?"
▲ 공무원 연금투쟁, 정부가 저질러 놓고는 왜 그것을 아무 잘못없는 공무원들에게 떠 넘기느냐는 거다. ⓒ 신광태
딸아이는 대학 3학년, 작은 아이도 금년에 대학에 진학했다. 그나마 녀석들이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부담은 덜하다지만, 집을 짓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대출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걸려있다. 몇 년 뒤 정년으로 공무원을 마무리하게 되면, 아마 퇴직금은 빚잔치로 끝날 것 같다.
그나마 기대하고 살아온 게 연금인데, 정부에서는 그것마저 못주겠다고 한다. '공무원 연금, 정부가 빚을 지고 왜 그걸 공무원들에게 갚으란 말인가'라고 말했던 선배 직원의 말이 공허한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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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태 시민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기획담당 공무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