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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 전우'들이여, 도대체 왜 거기 있는가

[미운 오리새끼의 월남참전기①]

등록|2014.10.10 17:46 수정|2014.10.10 17:46
1964년 9월 11일, 한국군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 파병의 문을 열었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2014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월남전 참전 피해자 단체인 '고엽제전우회'가 각종 정치 집회를 주최하며 회원들을 동원한 정황이 내부 공문을 통해 드러났다.

국가가 재정을 지원하는 고엽제 전우회는 관련법에 따라 정치 활동이 금지돼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세월호 '맞불 홍보', 교육감 직선제 폐지 운동 등에 수시로 동원되는가 하면, '육영수 여사 40주기 추모식' 등의 행사에도 참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공개한 고엽제전우회 서울지부가 각 지회에 내려보낸 공문에 따르면, 고엽제전우회는 '종북세력 척결' 등을 이유로 시국사건 집회를 수시로 열며, '7월 28일 오후 1시 서울중앙지법 앞. 지회장 포함 20명. 복장은 행사복' 등 지회별로 '동원'해야 할 인원수와 옷차림까지 명시했다. 

지난 8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 항소심에서 일부 무죄가 선고됐을 때는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근처에서 사법부 규탄대회를 일주일 내내 개최한다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과거에도 종종 가스통을 들고 집회에 나가 국민들에게 '가스통 부대'라 불리기도 했다. 

가스통 부대의 출현

▲ 전국 80여개 지회에서 모인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2월 17일 경기도 수원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내란음모죄 혐의로 법원의 선고를 앞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유죄판결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나는 이들의 이러한 모습에서 1950년 한국전쟁 직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상점 등을 다니며 과한 요구를 했던 일부 상이군인들이 떠올랐다.

나는 월남전 참전자로서 대우를 받고자 하는 고엽제 단체의 행동이 한편으로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각종 사안에 대해 정권의 '행동대원' 노릇이나 하는 이런 모습들은,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기 어렵다. 언론을 통해 보수세력 집회에 군복을 걸치고 나타난 참전용사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고엽제 문제는 1970년대부터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던 미군과 호주 뉴질랜드 참전군인들이 1978년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고엽제 소송은 미국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전 주월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육군대장이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할 만큼 큰 문제가 된 다국적 초대형 소송이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이길 수 없는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정부조달계약자 항변원칙'(Government Contractor Defense)이라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부조달물품 제조사는 제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엽제 제조사들은 법정화해를 한다. 엄청난 재판비용과 재판결과보다 더 무서운 기업 이미지 추락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1984년 미군과 호주(7000명 참전), 뉴질랜드(600명 참전) 참전 고엽제 환자들은 2억4000만 달러를 피해 보상금으로 받는다. 그러나 8년 5개월 동안 32만 명이 참전을 해서 정작 미군 다음으로 많은 장병이 참전했고 당연히 미군 다음으로 많은 고엽제 환자가 발생한 대한민국은 단 돈 1달러도 받지 못한다. 이유는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이다.

한국은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에 재판이 열리는 사실조차 몰라서 소송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유신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고 5공 전두환 정권은 베트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미국을, 겨우 고엽제 문제 따위로 또다시 심기를 어지럽게 하는 불경죄를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1984년 <중앙일보>가 고엽제 문제를 보도했으나 전두환 정권은 해당 기자를 해고시켰다. 그리고 타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해 국민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인터넷이 없었던 세상이었고 해외 여행 완전 자유화는 1989년 시작되었으니, 그 후에나 겨우 한국 참전 군인들은 고엽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됐다.

그 후 고엽제 피해 전우들은 고엽제 제조회사에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게 됐다. 고엽제 피해 단체가 비로소 국가가 관리감독하는 공법단체가 된 것은 연대장, 대대장으로 월남전을 다녀왔던 전두환이나 노태우 대통령 때가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7년이었다.

최근 존 케리 미국무장관은 워싱턴을 공식 방문한 팜 빈 민 베트남 외무장관에게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 군무기 베트남 수출 금지 조치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이미 2014년 9월 마틴 뎀프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협력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한 바 있다.

미국과 베트남이 중국에 대항해 군사협력을 하는 이 시대에 미국이 "우리는 자유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월남전에 참전했다"고 주장하겠는가? 전쟁을 벌인 미국에서도 하지 않는 생각을 지금 한국 참전용사들이 하고 있다면, 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아수라장 된 수송동 성당2013년 11월, 한국고엽제전우회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 규탄집회'를 전북 군산 수송동 성당 앞에서 열었다. 3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사제단 측이 건 플래카드를 뜯으려 시도하자 경찰이 이를 제지하고 있다. ⓒ 소중한


월남 참전 전우들이 요구해야 할 상대는 누구인가? 당연히 국가이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정부 여당이다. 파월 전우들은 어떤 정당이 집권을 하건 정부 여당을 상대해서 권리를 찾기 위해서 압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야당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 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항상 보수 세력의 편을 들어 각종 어용 집회에 동원되는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가? 더욱이 이들은 몇몇 행사에서 가스통을 들고 나타나, 일반 국민들이 파월 참전 용사하면 무조건 가스통 부대를 연상하게 했다. 일반 파월 전우들로서는 오해를 받고 있는 억울한 면이 있으나, 대중의 눈에는 이 같은 행동을 하는 고엽제 전우회나 일반 파월 전우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때 당선되자마자 월남 참전 군인들을 6·25 참전 군인들처럼 국가유공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물론 월남 참전 군인들은 이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앞장서서 '묻지 마!'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세상에 돈이 없지 뜻이 없나? 어떤 정부가 피를 흘려 한국의 경제 발전 밑거름이 되었던 월남 참전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지 않겠나? 문제는 예산일 뿐이지. 언제나 모자라는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는 급한 것, 요구가 강한 것부터 하게 되어있다.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는 권력에 대하여 호소나 비위를 맞추어서 될 일이 아니고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강력한 투쟁만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군 월남전 참전의 역사를 복기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 전쟁의 무용담은 많다. 그러나 비전투원이 객관적인 눈으로 보는 월남전의 실상은 흔치 않다. 나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눈으로 월남전의 실상을 밝혀 보고자 한다.

나의 월남전 이야기는 대양의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한 바가지 물에서도 바닷물의 기본적인 속성은 찾을 수 있다.

1965년 9월 20일 역사상 최초로 첫 전투 부대인 해병대가 월남에 파견되는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환송사를 읽어내려 가다가 그만 연설문을 놓쳐 원고가 연단 아래로 날아갔다. 주변의 별들은 바람에 굴러다니는 연설문을 잡기 위해서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박 대통령은 그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고 있었다.

결단식을 마친 병사들이 막사로 돌아와 보니 갑자기 막사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 방금 낭독했던 '자유의 십자군이니, 평화의 사도니 하는 미사여구'가 무색하게, 보안상의 이유로 창문을 모두 합판으로 가려 버렸고, 출입구를 모두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막사 밖에서는 대통령이 인근에서 동원한 여고생들에게 둘러싸여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에서, 초대 월남전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이 전쟁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만한 목표가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5099명이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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