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군대를 좋아해? 일본인들의 오해, 이유 있다
[망명 25시- 예다링과 함께 한 격동의 4일①] 프롤로그
저는 지난 2014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4일간 일본에서 이예다씨와 함께 징병 반대 활동을 하고 온 '안악희(가명)'라고 합니다. 이예다씨는 2012년 징병을 거부하고 프랑스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오로지 병역거부라는 하나의 사유로만 망명이 받아들여진 최초의 사례입니다. 저는 앞으로 진행될 연재에서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여러분께 알리고자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예다씨의 방일은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선, 2014년 내내 벌어진 군 내의 사고와 맞물려서, 한국군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구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얼마나 열악한지를 외신 기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아울러 민주화 이후 자유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 아직까지 병역거부를 비롯한 인권 상황은 좀체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이예다씨는 아주 바르고 반듯한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활동가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작가 아마미야 카린씨로부터는 '예다링'이라는 애칭까지 받았습니다. 4일 동안 벌어진 질풍노도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이곳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기자 말
"안녕하세요. 저는 이예다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1991년에 태어났습니다. 현재 22세입니다. 2012년 7월, 20살이던 해에 징병에 가고 싶지 않아서 망명을 결심하고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프롤로그 - 2014년 9월 16일
2014년 9월 16일. 실로 3년 만의 도쿄였다. 하네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보다 더운 공기가 순식간에 이곳이 타국임을 실감하게 했다. 일본행을 결정하게 된 것은 겨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생활 중인 양성택(가명)씨의 연락이 그 시발점이었다.
"안악희씨, 오랫만이에요. 이번에 프랑스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 망명자를 일본으로 초청해서 몇가지 이벤트를 진행하려 하는데, 도쿄로 와 주실수 있으세요?"
양성택씨는 징병제를 반대하지만, 한국 국내의 평화주의자들과는 달리 다소 자유주의적인 시각에서 징병을 반대한다. 양씨는 꽤 오래 전부터 독자적인 징병제 반대모임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나 또한 일반적인 평화주의자와는 입장이 달랐고, 기존의 징병제 반대운동과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양성택씨와는 생각이 잘 맞았다. 우리 둘 다 음악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그랬다. 나는 자연스럽게 양성택씨와 함께 활동하게 됐다.
양성택씨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고, 불현듯 3년 전에 있었던 도쿄에서의 마지막 이벤트가 생각났다. 우리는 당시 징병제 자체를 일본에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전투경찰제도의 비합리성에 관해 논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징병제를 반대하는 단체가 징병제가 무엇인지부터 알려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일본인들은 의외로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물론 당시 우리와 함께 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나 좌파 활동가들이었다. 때문에 '한국의 젊은 남성은 대부분 징병제로 인해 군 경험이 있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한국군의 기간병들이 얼마 정도를 받고 생활하고 있는지, 휴식은 어느 정도 보장되는지, 구타와 가혹 행위가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는 말이다.
사실 한국의 징병제가 일본의 일반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엉뚱한 계기 때문이었다. 바로 일본 방송에 한류스타들이 군대에 가는 장면이 등장하면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군대에 가듯, 군대 가는 것을 아주 낭만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모두 애국심이 투철해 국가가 부르면 기꺼이 간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모두들 애국심보다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또는 처벌이 두렵기 때문에 다들 군대에 간다. 카투사 지원율은 내려갈 줄 모르며(애국청년이라면 자국의 군대에 몸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방위산업체에는 지원자가 줄을 선다. 병역비리와 관련한 뉴스는 잊을 만하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예비역들은 2년여의 시간 동안 사회에서 자기계발과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면제자와 여성, 공익요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저는 한국인들이 거의 무보수에 가까운 월급을 받고, 부대 내에 묶인 신세로 군 복무를 한다는 것을 듣고 '아, 한국인들은 군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입대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처벌과 강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
3년 전, 당시 이벤트에서 만난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여러가지 토론회나 토크 세션같은 이벤트를 개최하면서 조금씩 한국 군대의 실상을 알려갔다. 단체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큰 이벤트는 개최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제안은 좀 달랐다. 양성택씨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일본의 외신기자클럽, 다시 말해 일본 외국 특파원 협회(FCCJ)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일본 국회에서 특정비밀 보호법 관련 토론회에 참여한다는 등 믿을 수 없는 일정이었다. 우리의 활동을 오랫동안 지원한 일본의 작가이자 활동가 아마미야 카린씨가 함께 할 것이라는 반가운 이야기도 있었다.
나의 마음은 반쯤은 놀라움으로, 반쯤은 미심쩍은 느낌으로 가득 찼다. 과연 우리가 이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건은 어쨌든 의기투합해 함께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느덧 내 손은 도쿄행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있었다.
하네다 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도착한 신주쿠는 3년 전에 비해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JR 주오선을 타고 코엔지로 향했다. 코엔지의 게스트 하우스인 마누케 하우스에 짐을 풀고, 연설문과 원고를 정리했다. 그리고 아마미야씨와 양성택씨와 만났다. 실로 오랫만의 조우였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향후 일정과 연설에 관한 내용을 논의했다.
다음날, 한국인 망명객 이예다씨가 일본에 입국했다. 무려 21세기에, 군사독재 시절도 지났는데, 오로지 징병거부를 이유로 한국인으로서 프랑스에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진 첫 사례였다.
이예다씨의 방일은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우선, 2014년 내내 벌어진 군 내의 사고와 맞물려서, 한국군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인권적인 구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지,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얼마나 열악한지를 외신 기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아울러 민주화 이후 자유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한국에서 아직까지 병역거부를 비롯한 인권 상황은 좀체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이예다씨는 아주 바르고 반듯한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일본의 활동가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작가 아마미야 카린씨로부터는 '예다링'이라는 애칭까지 받았습니다. 4일 동안 벌어진 질풍노도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이곳에 풀어놓고자 합니다.- 기자 말
▲ 21세기의 한국인 망명자2014년 9월 19일, 일본 외국 특파원 협회에서 이예다씨(가운데)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일본의 작가이자 활동가인 아마미야 카린씨, 통역자, 이예다씨, 필자, 사회를 맡아주신 신 쥬리히 신문의 패트릭 졸 기자. ⓒ 안악희
"안녕하세요. 저는 이예다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1991년에 태어났습니다. 현재 22세입니다. 2012년 7월, 20살이던 해에 징병에 가고 싶지 않아서 망명을 결심하고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프롤로그 - 2014년 9월 16일
2014년 9월 16일. 실로 3년 만의 도쿄였다. 하네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보다 더운 공기가 순식간에 이곳이 타국임을 실감하게 했다. 일본행을 결정하게 된 것은 겨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생활 중인 양성택(가명)씨의 연락이 그 시발점이었다.
"안악희씨, 오랫만이에요. 이번에 프랑스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 망명자를 일본으로 초청해서 몇가지 이벤트를 진행하려 하는데, 도쿄로 와 주실수 있으세요?"
양성택씨는 징병제를 반대하지만, 한국 국내의 평화주의자들과는 달리 다소 자유주의적인 시각에서 징병을 반대한다. 양씨는 꽤 오래 전부터 독자적인 징병제 반대모임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나 또한 일반적인 평화주의자와는 입장이 달랐고, 기존의 징병제 반대운동과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양성택씨와는 생각이 잘 맞았다. 우리 둘 다 음악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그랬다. 나는 자연스럽게 양성택씨와 함께 활동하게 됐다.
양성택씨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고, 불현듯 3년 전에 있었던 도쿄에서의 마지막 이벤트가 생각났다. 우리는 당시 징병제 자체를 일본에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전투경찰제도의 비합리성에 관해 논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징병제를 반대하는 단체가 징병제가 무엇인지부터 알려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일본인들은 의외로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물론 당시 우리와 함께 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나 좌파 활동가들이었다. 때문에 '한국의 젊은 남성은 대부분 징병제로 인해 군 경험이 있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한국군의 기간병들이 얼마 정도를 받고 생활하고 있는지, 휴식은 어느 정도 보장되는지, 구타와 가혹 행위가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는 말이다.
▲ 해병대 입대 당시의 한류스타 현빈의 모습. ⓒ 해병대 블로그
사실 한국의 징병제가 일본의 일반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엉뚱한 계기 때문이었다. 바로 일본 방송에 한류스타들이 군대에 가는 장면이 등장하면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군대에 가듯, 군대 가는 것을 아주 낭만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모두 애국심이 투철해 국가가 부르면 기꺼이 간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모두들 애국심보다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또는 처벌이 두렵기 때문에 다들 군대에 간다. 카투사 지원율은 내려갈 줄 모르며(애국청년이라면 자국의 군대에 몸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방위산업체에는 지원자가 줄을 선다. 병역비리와 관련한 뉴스는 잊을 만하면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예비역들은 2년여의 시간 동안 사회에서 자기계발과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면제자와 여성, 공익요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저는 한국인들이 거의 무보수에 가까운 월급을 받고, 부대 내에 묶인 신세로 군 복무를 한다는 것을 듣고 '아, 한국인들은 군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입대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처벌과 강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
3년 전, 당시 이벤트에서 만난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여러가지 토론회나 토크 세션같은 이벤트를 개최하면서 조금씩 한국 군대의 실상을 알려갔다. 단체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큰 이벤트는 개최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제안은 좀 달랐다. 양성택씨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일본의 외신기자클럽, 다시 말해 일본 외국 특파원 협회(FCCJ)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일본 국회에서 특정비밀 보호법 관련 토론회에 참여한다는 등 믿을 수 없는 일정이었다. 우리의 활동을 오랫동안 지원한 일본의 작가이자 활동가 아마미야 카린씨가 함께 할 것이라는 반가운 이야기도 있었다.
나의 마음은 반쯤은 놀라움으로, 반쯤은 미심쩍은 느낌으로 가득 찼다. 과연 우리가 이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건은 어쨌든 의기투합해 함께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느덧 내 손은 도쿄행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있었다.
하네다 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도착한 신주쿠는 3년 전에 비해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JR 주오선을 타고 코엔지로 향했다. 코엔지의 게스트 하우스인 마누케 하우스에 짐을 풀고, 연설문과 원고를 정리했다. 그리고 아마미야씨와 양성택씨와 만났다. 실로 오랫만의 조우였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향후 일정과 연설에 관한 내용을 논의했다.
다음날, 한국인 망명객 이예다씨가 일본에 입국했다. 무려 21세기에, 군사독재 시절도 지났는데, 오로지 징병거부를 이유로 한국인으로서 프랑스에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진 첫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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