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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 신세된 영남의 설움... 충청도 남자가 나섰다

[참모열전 21회: 채제공 1부] 경상도 차별에 맞선 충청 출신 채제공

등록|2014.10.10 15:51 수정|2014.10.10 15:51

▲ 경상감영(경상도청) 터에 조성된 경상감영공원. 대구시 중구 포정동에 있다. ⓒ 김종성


오늘날과 달리 조선 후기의 경상도는 '찬밥' 신세였다. 정확히 말하면, 18세기 초 이후의 조선 사회에서 경상도는 비주류였다. 경상도에 대한 차별은 정부의 인사 조치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경상도 출신은 관직 임용에서 차별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 시대 사람들의 기록에서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경상도 출신 무관인 노상추(1746~1829년)의 일기다. 경상도 구미 출신인 노상추는 35세에 무과시험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 뒤 4년간이나 관직을 받지 못했고, 관직에 진출한 뒤에도 오랫동안 만족스러운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에서 경상도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항상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부에서 인사 조치를 발표할 때마다 "이번에는 우리 지역이 어떤 대우를 받았나?"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럴 때마다 항상 그는 "역시나!" 하며 허탈감을 느끼곤 했다. 

일례로, 노상추가 45세 때인 정조 15년 6월 27일 자(양력 1791년 7월 27일 자) 일기를 보자. 그는 풀이 죽은 듯 "지금처럼 영남 사람들이 완전히 꺾인 적은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가 이렇게 한탄한 이유는, 1789년 겨울 인사고과 이후로 인사 조치에서 제대로 대우받은 경상도 출신이 권의일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처럼 영남 사람들이 완전히 꺾인 적은 없었다"는 그의 한탄은 좀 과장된 것이다. 그의 시대는 이전에 비해 경상도에 대한 차별이 조금 완화된 때였다. 노상추 자신의 승진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경상도 출신들의 비애가 훨씬 더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노상추의 감상이 좀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18세기 당시 경상도가 타 지역에 비해 차별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노상추의 관심사는 지금도 우리 언론에 자주 나타났다. 이른바 '대구·경북(TK) 정권'에서 장관 임명 때마다 호남권, 충청권 인사들이 얼마나 기용됐는지가 언론의 주요 관심사였다. 

노상추가 인사 조치 때마다 TK 사람들의 처지에 관심을 가진 것도 같은 차원의 일이다. TK가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나 않는지 항상 신경을 썼던 것이다. 그는 TK가 좋은 대우를 받으면 자기한테도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기대했다. 오늘날 TK는 '갑'이지만, 노상추 시대에는 '을'이었다. 

충청도 출신 채제공, 경상도 출신 차별에 맞서다

▲ 채제공 초상화.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경상도 출신에 대한 인사차별이 심했다는 점은 이번 참모열전의 주인공인 채제공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채제공은 영조 집권 후반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정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수행한 영·정조 시대의 핵심 참모다.

채제공은 충청도 홍주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경상도의 처지에 관심이 컸다. 그의 문집인 <번암집>에 실린 '만와집서'란 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당론이 갈라진 이래로, 조정에서는 자기편이 아니면 제 아무리 관중과 제갈공명의 재주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모두 초야에 버렸다. 이것이 영남에서는 더욱 더 심했다."

관중이나 제갈공명같은 인재일지라도 경상도 출신이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18세기의 경상도 사람들이 받은 차별을 비판하는 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상도 사람들은 경상도 지식인이나 상류층을 가리킨다. 평생을 살아도 자기 고향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일반 서민들의 처지에서는, 저 멀리 한양의 중앙정부는 머나먼 별세계 같은 존재였다. 중앙정부의 차별에 대해 불만과 문제의식을 품은 것은 주로 경상도 지식인과 상류층이었다.

19세기 초반에 경상도에 본관을 둔 안동 김씨 가문이 한동안 정권을 장악했지만, 경상도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불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 점은 1881년에 1만여 명의 경상도 선비들이 '영남 만인소'라는 집단 상소를 올린 데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이들은 고종 이명복 주상의 시장개방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다른 계층도 아닌 선비 집단이 대규모로 군주에게 대든 것은, 그만큼 경상도 선비들의 가슴에 쌓인 불만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18세기 초반 이후로 경상도가 차별을 받게 된 직접적 계기는 숙종시대(1674~1720년)의 정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숙종시대에는 비교적 진보적인 남인당(동인당의 분파)과 비교적 보수적인 서인당의 정쟁이 격렬했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환국(갑술년의 급진적 정계개편), 남인당은 서인당과의 한판 승부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구한 말, 황현이 정치 평론서인 <매천야록>에서 언급했듯이 남인당은 갑술환국 이후로 정계에서 사실상 밀려났다. 이때 남인당과 함께 몰락한 인물이 바로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남인당의 지원을 받아 중전이 됐다가 남인당과 함께 몰락했다. 이때 몰락한 남인당의 중추세력 중 하나가 바로 경상도 출신들이었다.

갑술환국으로부터 34년이 지난 1728년, 이때는 숙종과 경종에 이어 영조가 왕이 된 지 4년 뒤였다. 이 해에 이인좌의 난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반란군 주역인 소론 준론 즉 소론당 강경파는 "영조가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됐다"는 소문을 근거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소론당 강경파와 함께 반란에 참여한 집단 역시 남인당 출신이었다.

만약 반란군이 승리했다면, 남인당과 함께 그 중추세력인 경상도도 살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군사반란은 '성공한 쿠데타'가 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남인당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경상도의 위상은 한층 더 위축됐다. 무관 노상추가 '신문'을 볼 때마다 TK에 대한 대우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왕권 강화 위해 조력한 채제공, 그의 무기는 문학?

▲ 채제공이 직접 쓴 수원화성 화서문 편액. ⓒ 김종성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상도 사람들의 중앙 진출이나 지위 개선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인물이 바로 채제공이다. 그가 이런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경상도를 탕평정치에 끌어들여 정조 임금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정조 시대에는 남인당의 입지가 어느 정도 개선됐다. 경상도 출신은 아니지만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당 인사들이 두각을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또 중앙 정계에는 진출하지 못해도 정조 탕평정치의 우군이 되는 경상도 선비도 많았다. 이렇게 정조 시대에는 채제공의 노력 덕분에 중앙정부를 향한 경상도의 시선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다.

채제공이 이런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영조와 정조가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탕평정치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채제공 자신이 바친 '특별한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이 '특별한 노력'에서는 문학이 중요한 도구로 작용했다. 문학을 활용해서 경상도 남인당의 입지를 살려주기 위한 노력이 벌어졌던 것이다.

문학이 동원된 그 '특별한 노력'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제2부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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