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이오 사변에 작전에 나온 탱크육이오 사변에 인천에 온 소제 탱크는 덩치가 이 보다 더 컸다. ⓒ 이월성
1950년 6월28일 북괴군이 남침한 지 3일, 아직 수도 서울에 북한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인천에는 북괴 탱크가 북한 붉은 기를 달고 '쿠르릉쿠르릉' 인천 시청 쪽으로 들어왔다.
인천중학교 1년생인 나와 인천중학교 4년생인 형은 집채만한 쇳덩어리가 굴러 들어오느라 땅바닥과 집이 흔들리는 굉음에 놀랐다. 자동차도 흔치 않던 시절 일본군 탱크를 그림책에서만 보았었다.
국군은 수도방위를 포기하고 수원으로 후퇴했고 인천은 김포 방향에서 탱크가 수도 서울보다 먼저 들어왔다. 인천에 있던 군경들도 수원으로 철수해, 인천은 치안 공백상태였다.
6월28일 인천중학교 강당에 전교생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아 놓고 길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손들어라" 했더니 2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들 거의 다 손을 들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손들어 봐라" 했더니 1학년 학생들이 전부 손을 들었다.
인천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역사시간에 역사 선생님은 무정부주의에 대하여 가르쳤고 과학시간에는 사회주의에 대하여 가르쳤다. 1학년인 나는 중학교 교육이 이런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인천중학교 선생님들 대대수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우리 집은 인천시청 앞이었다. 시청으로 향하는 붉은 기를 앞세운 트럭에서 "시청에 가면 쌀을 준다. 쌀자루를 가지고 나와 차에 타라"고 했다. 장작을 패던 사람은 시퍼런 도끼를 어깨에 멘 채로 차에 타고 있었고, 쌀을 가지러 나온 사람들이 쌀자루, 밀가루 부대 자루를 들고 탔다. "어서 올라타라"고 성화였다.
트럭에 탄 사람 중에는 우리 동네 인천중학교 5년생 형도 있었고. 동네 시계방에서 시계를 수리 하던 아저씨도 타고 있었다.
"해방됐다! xxxxxxx만세!" 외치는 청년이 있고 "무슨 해방이야?" 나무라는 할아버지도 계셨다.
인천 시청광장에는 인천경찰 사찰계장이란 쪽지를 목에 걸고 손이 뒤로 묶인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줄줄이 묶여 나왔다.
이 때 국군이 탄 트럭이 시청으로 들어오면서 "꼼짝 마라!" 소리치면서 구구식 소총을 쏘았다. 장작을 패러 다니는 도끼 든 사람이 제일 먼저 표적이 되어 도끼를 한 손에 든 채로 시금치 삶아 놓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붉은 기를 들고 해방됐다던 청년은 어디론가 벌써 도망쳤고, 쌀을 가지러 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표적이 되어 소총을 맞고 쓰러졌다.
"쌀 준타키서 왔는디...." 말을 더듬으며 목구멍으로 피를 토하다 어떤 할아버지가 죽어 갔다.
수도를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방송을 듣고 피난을 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삽과 곡괭이로 맞아 죽었고. 사상과 이념과는 거리가 먼 쌀을 타러 온 사람들이 생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인천 시청 바닥에서 일어났다. 두 번 다시는 없어야 할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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