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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물 마셔가며 죽음 이겨낸 그들... 노근리 비극 아시나요

[서평] 충북 영동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그린 <그 여름날의 기억>

등록|2014.10.10 11:41 수정|2014.10.10 14:09

▲ <노근리 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박건웅 글, 그림/정은용 원저) 겉그림. ⓒ 보리

고 김근태 전 국회의원의 야만적인 고문 이야기를 그린 <짐승의 시간>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만화가 박건웅이 또 한 권의 묵직한 그래픽 노블(만화소설)을 들고 나왔다.

1950년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충북 영동에서 일어난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아래 '노근리 사건')을 그린 <노근리 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이 그것이다.

책 말미에 실린 노근리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부산을 향해 절반쯤 가다 보면 충북 영동에 한 굴다리를 지나게 된다. 노근리 마을로 가는 쌍굴 다리이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다.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만 3일 동안, 미군은 하가리와 노근리 일대에서 피난 가던 사람들을 폭격, 기총소사로 대량 학살했다.

생존자들이 희생자 명단을 영동군청에 접수한 것에 따르면, 사망자는 약 180여 명이고, 실종자는 20여 명, 부상자는 50명쯤이다. 그러나 산산이 바스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신들, 학살 이후 부상과 후유증으로 죽은 피난민들까지 더하면 피해자는 400명이 넘는다. 지금까지 미국 AP 통신 기자나 미 국방성 조사반에게 미군이 노근리에서 민간인을 공격한 사실을 증언한 참전 미군은 확인된 사람만 25명이다. 1950년 노근리 사건 발생 직후 <조선인민보>는 사망자만 약 400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620쪽)

흑백 수묵화풍으로 담아낸 미군의 노근리 학살 만행

만화의 원작은 정은용씨가 1994년에 쓴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정씨는 노근리 사건에서 어린 아들과 딸을 잃었다.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국무총리 직속 노근리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과 미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 진상을 밝히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만화의 서술자도 '은용'으로 되어 있다.

흑백 목판화풍의 강렬한 대비감이 돋보였던 <짐승의 시간>에서와 달리 이번 만화에서는 전체적으로 흑백 수묵화풍의 여유와 부드러움이 특징적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특징이 한결같지는 않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나 그림 속에 전해지는 사건의 극적 비중 여하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야기가 야만적인 학살의 한복판을 향해 갈수록 그림의 여유 공간은 점점 줄어든다. 담묵(옅은 묵색)에서 시작된 만화 컷은 학살의 절정부로 다가갈수록 어지러운 배경 무늬들이 함께하는 농묵(짙은 묵색)으로 처리된다. 수묵화풍의 그림이 주는 은은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는 그 안에 담긴 비극적인 학살의 이야기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정서적으로 강렬한 자극을 준다.

노근리 사건은 영동읍 임계리에 한 무리의 미군이 일본어 통역을 앞세우고 들이닥치면서 시작된다. 통역은 미군이 사람들을 후방에 있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줄 것이라며 사람들을 집합시킨다. 미군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수색해 200명을 모은다. 미군은 옆 동네 주곡리에서도 사람들을 모아 모두 500~700명의 피난민 대열을 만든다.

본격적인 학살은 피난민들이 노근리 쌍굴 근처에 이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은 철로 위에서 피난민들의 짐을 샅샅이 검사했다. 그러다 어디론가 무전을 친 뒤, 짐 검사를 멈추고 사라진다. 얼마쯤 지나자 남쪽 하늘에 폭격기 두 대가 날아와 철로 주변에 있던 피난민들을 향해 폭탄을 투하한다. 지상의 미군들도 기관총을 쏘며 가세했다. 그 첫 번째 학살로 100명 가까운 피난민들이 죽는다.

미군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행기 폭격이 끝나자 미군들은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확인 사살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쌍굴로 몰아넣었다. 그때부터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할 일들이 벌어졌다.

미군은 굴 안에서 사람들이 조금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도 총격을 가했다. 사람들은 우는 아기들을 타박했다. 전춘자(당시 10세) 아버지는 아기를 조용히 시키라는 사람들의 성화에 자신의 어린 외아들을 굴 속 개울물에 밀어 넣어 죽였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갈증을 못 이긴 사람들은 핏물 범벅이 된 개울물을 퍼마시기도 했다.

서쪽 굴에 졸졸 흐르던 물은 시체 더미에 막혀 핏물 웅덩이를 이루었다.
"난 그때 목마름을 못 이겨, 시체가 둥둥 떠 있는 핏물을 쭉쭉 빨아 먹었습니다." - 김학중 당시 19세
"엄마한테 물을 떠 드리려고 가 보니까 웅덩이 물 위에 피인지 기름인지 두꺼운 막이 생겨 있었어요. 그걸 밀치자 핏덩이가 마치 마른 진흙덩이처럼 갈라졌고 그 밑으로 흐르는 핏물을 뜰 수 있었어요." - 양해찬 당시 10세 (464~465쪽)

쌍굴에는 모두 400~500명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미군은 그곳을 향해 시도 때도 없이 기관총을 쏘아댔다. 더위와 갈증,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굴 밖으로 기어나오는 사람은 가차없이 사살했다. 동맹국 군인이 주둔국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그 모순적인 상황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일일까.

그때 대학 2학년이던 정구일이 미군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양민이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이는 것이오?"
"대전에서 피난민을 가장한 인민군에게 우리 미군이 엄청나게 당했다. 따라서 의심스러운 피난민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엄명이 떨어졌다."
"우리가 어딜 봐서 의심스럽다는 거요? 우리는 양민이오. 제발 상부에 잘 얘기해서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가게 해 주시오. 부탁이오." (356~359쪽)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길....

부록으로 실린 '노근리 학살 사건 상황도'의 설명에 따르면 노근리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미 제1 기갑사단과 인근 미 제25 보병사단은 피난민 속에 적군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전선을 지나가는 모든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총격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노근리 사건이 미군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작전 수행 과정에서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미국은 노근리 사건에 대해 계속 발뺌만 하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자신의 책 <대한민국史>(4권)에서 미국이 노근리 사건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겁에 질리고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상부의 명령 없이 피난민들에게 발포한 '불행한 비극'으로, '비계획적인 살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000년에 노근리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를 수행한 우리 정부도 그러한 미국의 주장에 동의해 같은 내용으로 한미공동발표문을 완성해 발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교수는 예의 저서에서 당시 주한대사인 존 무초가 본국에 보낸 편지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한국 피난민에 대한 미군의 발포 방침이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무초 대사는 편지에서 주한미군 최고위 간부들이 모여 "주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고 만일 난민들이 미군 방어선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그들은 경고 사격을 받을 것이며, 그래도 계속 전진하면 총격을 당할 것"이라고 썼다고 한다.

노근리에서 일어난 야만적인 학살의 이야기는 정은용이라는 탁월한 기록자와 몇몇 생존자들, 그리고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양심적인 국내외 기자들의 노력 덕분에 고스란히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만간 나올 2부를 통해 전해진다고 한다. 이 책과 함께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혀, 노근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노근리 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박건웅 만화, 정은용 원작 / 보리 / 2014. 9. 10/ 620쪽 / 30,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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