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치언 작가 ⓒ 오주석·홍순오
시·소설·희곡, 그 경계를 넘어서
최치언 작가는 서울산업대 문예창작학과(이하 문창과)를 졸업했다. 그가 1학년이던 1999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당선돼 등단했다. 2001년에는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2003년에는 우진문화재단 장막희곡 공모에 각각 당선되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이 많이 놀랐지. 당시 서울 소재 대학들에 문창과가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산업대에는 문창과가 생긴 지 5년밖에 되지 않았었거든. 그만큼 문창과 역사가 짧았지. 동아일보가 신춘문예에서 무척 권위가 있기도 했고. 정말 '놀랍다'는 반응들이 많았어. 지금도 그렇지만 1학년 때는 교양과목이 많고, 2학년이나 돼야 슬슬 전공과목을 많이 듣게 되잖아. 그런데 1학년 학부생이 시로 등단했다니 신기한 일이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학부생이 등단했다고 하면 주위에서 놀라기 마련이잖아. 딱 그 정도였어."
시와 소설, 희곡은 모두 문학의 한 장르이지만, 표현 방식이 서로 다르다. 그런데 최 작가는 문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표현해낸다.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문창과에서 장르를 넘나들어 다양한 수업을 듣고 책을 읽었던 게 좋은 자산이었던 것 같아. 구태여 구분을 지어가면서 공부하지는 않았으니까. 시에서 경계를 허무니 소설이 됐고 소설에서 경계를 허무니 희곡이 됐던 것 같아. 특별한 보상을 바랐다거나, 다양한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썼던 것은 아니야."
그는 이어서 시와 소설, 희곡의 차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평생을 시를 쓴 시인에게 '시가 무엇입니까' 물으면 정의 내리기 쉽지 않아. 그만큼 경계가 막연한 거야. 소설가에게 '소설이 무엇입니까' 물어도 마찬가지겠지. 그저 어느 정도 개념의 테두리만 쳐 놓는 것이지. 모든 것이 그렇지만,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이니까.
시가 상징성이 있는 언어를 리듬감 있게 배치한 것이라면, 소설은 압축해놓은 언어를 더 자유롭게 쓴 것이겠지. 실험소설이 아니라면 일정한 서사성도 갖춰야 해. 희곡은 시와 소설이 잘 결합한 형태인 것 같아. 서사성도 있어야 하고, 상징성도 있어야지. 우리나라는 유교적 전통 때문에 '한우물만 판다'는 장인정신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 그만큼 여러 장르로 풀어내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 크게는 예술, 작게는 문학 안에서 자유롭게 표현하면 되는 거지. 구태여 장르에 묶일 필요가 있나 싶어."
영감은 경험에서 움트는 싹
창작을 업으로 삼는 모든 사람에게, 불현듯 찾아오는 '영감'은 그야말로 축복이다. 많은 예술가가 영감을 얻어 명작을 탄생시켰는가 하면, 그런 영감을 얻지 못해 스러져간 작품도 부지기수다. 최 작가는 이런 영감이, 누군가로부터 갑자기 주어지는 선물은 아니라고 말한다.
"글을 쓰고,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고…. 그게 떠오르는 순간을 우리가 영감이라고 많이 하는데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발아된 것일 뿐이야. 영감은 충분한 토양이 갖춰지고 조건이 됐을 때 비로소 발아하지.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이 과정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그래서 영감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말해. 설사 떠오른 영감을 잊어버렸다고 할 때에도 그것은 정말로 지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토양 어디엔가 숨어 있을 뿐이지. 우리의 내면세계 안에서 체계화돼 있지 않을 뿐인걸."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모두 경험이 돼 내면에 축적된다. 구태여 특별한 것을 하거나 보지 않아도 삶은 그 자체로 경험이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경험들은 사유와 사색을 통해 좋은 토양으로 거듭난다.
"누구에게나 그런 토양은 충분히 자리 잡고 있어. 그런데 예술가에게는 특별한 씨앗이 있지. 바로 '동기'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라거나 '좋은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라는 소망을 품게 되면, 그 간절함은 자연스럽게 어떤 특별한 씨앗이 되어 경험이라는 토양에 심기지."
그렇게 우리의 내면에 심긴 씨앗은 적절한 때 싹을 틔운다. 영감의 씨앗이 좋은 토양에 심기고 나면 발아할 때를 기다리게 된다. 적절한 때를 만났을 때 비로소 영감은 싹을 틔우게 된다. 그런데 싹을 틔운 영감을 우리가 모두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씨앗을 심는 것은 작가의 의지지만 그다음부터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야. 내가 아무리 원해도, 창작에 관한 아이디어는 머리 뒤쪽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내가 잊어버리고 있을 때 머리 뒤쪽에서 발아해서 자라게 되지.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면 싹이 터 있어."
그는, 영감이 싹을 틔웠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머리 뒤쪽에 피어 있는 영감을 무심코 뒤돌아 봤을 때야만 비로소 움튼 싹은 꽃이 된다.
영감이라는 싹이 트지 않을 때, 무엇을 하냐는 질문에 최 작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보통 방황하지. 고통스럽기도 하고. 분위기를 바꿔보기도 해. 새로운 뭔가를 자꾸 하려고 하는 편이야. 새로운 뭔가를 한다는 것이 영감을 찾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지만 살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어. 너무너무 고통스럽잖아. 새로운 시도를 하다가 생각을 얻기도 하지. 그렇게 간절한 시간을 보내는 거야. 너무나 간절하게 기다림의 시간을 잘 보내고 나면, 훗날 발아한 영감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 있지. 누군가는 영감을 허투루 쓰는 사람도 있고, 잘 다듬어서 명작을 탄생시키는 경우도 있잖아. 영감을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지."
대학 시절을 회상하다
최 작가는 27세라는 늦은 나이로 우리 대학 문창과에 입학했다. 남들은 대학 졸업도 할 늦은 나이에 산업대 문창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당시만 해도 산업대는 늦게 들어온 것이 아니었어. 지금이야 일반대로 전환해서 연령대가 많이 낮아졌지만 말이야. 일하면서 대학에 입학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27살에 입학했으면 늦은 게 아니었어.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오는 학생이 많겠지만, 그 당시 문창과 동기 30명 중에 절반 넘는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그 전에 다른 학교를 들어갔는데 학교를 한 학기 다녀보니 적성에 맞지 않더라고. 3년 군대 갔다 와서 공부하고 학교에 들어오게 됐지."
최 작가가 바로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정비, 기계, 고압가스, 냉동공조 등 4개의 기술자격증뿐만 아니라 판매관리사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그가 글을 쓰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갑자기 '나를 표현하는 일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 글이라는 것이 음악·미술과는 다르게, 특별히 훈련받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거든. 음악이나 미술은 아주 천재적인 재능이 있지 않고서야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고 연습해야 직업으로 삼을 수 있지만, 글은 아니야. 우리가 늘 접하는 일상적인 언어를 문학적인 언어로 바꾸는 훈련을 조금만 하면, 누구나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지. 그래서 비교적 자유롭게 문학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었어."
그렇다면 왜 서울산업대 문창과를 택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 작가는 웃으며 답했다.
"학교 가서 물어봐. 다들 왜 여기 와 있나.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이 산업대였던 것이지. 일하면서 다니는 학교라는 것도 좋았고 문창과의 역사가 짧은 것도 기분이 좋더라고. 전반적으로 '건강한 학교'라는 이미지가 있었지. 이런 것이 바로 인연이야. 내가 별 까닭 없이 산업대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받았다면 지원을 했을까? 아닐 거야. 좋은 일이 많이 있었잖아? 좋은 인연이었던 셈이지."
15년 전, 최 작가는 수업을 듣고 집필을 했던 대학 시절을 회상했다.
"내부는 많이 바꾼 것 같던데 외관은 그대로더라고. 외관이 그대로인 건물은 아마 어의관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 어의관 6층에 창작실이 있었어. 그때는 노트북이 많지 않을 때라 창작실에서 집필이나 과제를 모두 했지. 밤 새서 작업을 하다 보면 경비아저씨가 정문을 잠그고 주무시는 거야. 경비아저씨를 깨울 수 없으니 2층 화장실 파이프를 타고 내려가곤 했어. 2층에 있던 문창과 학생회실에서 잠들기도 했고. 문창과 학생회실에서 술을 먹고 잠드는 일도 가끔 있었지."
끝으로 문학 지망생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대개 사람들은 무엇을 표현해볼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어떻게 표현하느냐야. 'What'보다는 'How'가 훨씬 중요한 셈이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모두 소재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순간부터 진짜 작가가 된다고 생각해. '쓴다'는 말에는 '어떻게' 쓴다는 말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덧붙이는 글
9월 30일에 한 인터뷰입니다. 10월 13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신문에 게재될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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