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노예 사세요, 쌀 두 가마니면 됩니다"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사람들②] 부산 평통사 2차 평화발자국
"남쪽은 (조선의) 목구멍과 같으니(南徼咽喉) 서문을 자물쇠와 같이 튼튼히 지켜야 한다(西門鎖鑰)."
부산진시장 뒤편에 산책코스로 아주 좋은 성터가 있다. 부산진지성이다. 임진왜란이 난 이듬해인 1593년, 왜장 모리 테로모토 부자가 원래 부산포에 있던 조선 외성을 헐고 일본식 성으로 다시 만든 성이다.
이 성은 왜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조선 노예들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조선 노예의 값은 한 사람당 2.4스쿠도(포르투갈 화폐단위)로, 쌀 두 가마니 정도였다. 당시 아프리카 흑인 노예 값이 한 사람당 170스쿠도였다 하니 조선 노예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영향으로 국제 노예 값의 폭락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인들은 일본은 물론, 당시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왜구들은 조선 민중을 원숭이처럼 목에 노끈으로 엮어묶고 이 끈을 우마가 끄는 달구지에 매달아 뒤따라가게 했다. 어쩌면 왜구들은 전투보다 조선인 사냥에 더 열중했으며,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10만 명에 달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부산 사람들은 부산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감했고, 그 교훈을 새겨 부산진성 서문(부산진시장 방향)에 새겨두었다. 조선의 목구멍과 같은, 남쪽 부산을 지키지 못하여 참혹한 일을 당했으니 이 서문을 튼튼히 지키자는 교훈이다.
10월 18일 부산 평통사 두 번째 '평화발자국'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에 의해 참혹한 일을 당해야 했던 부산 사람들, 그들이 남긴 교훈을 얻고자 나섰다.
왜성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왜군들의 남해안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지어졌다. 남해안을 중심으로 서울, 평양에 이르는 지역에 지어졌는데 대개 수송, 연락관계 등을 고려하여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강이나 바다에 근접한 독립된 구릉이나 야산을 택하였다. 부산진왜성만 해도, 지금은 매축되어 볼 수 없지만 성 바로 앞이 바다였다고 한다.
왜성은 침략과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지어졌다. 군사적 요충지을 차지하고, 축성을 쉽게 하려고 조선성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 왜성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조선 기술자들을 납치하는 거점이 되었다.
왜성은 밖에서 공격하기 어렵게 구조가 복잡하다. 출입구(호구)만 보아도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도 곡선으로 시작하여 직선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지어 공격하기 어렵고, 방어하기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성벽도 1환, 2환 식으로 몇 층이나 더 올리고, 꼭대기(본환)에는 다시 성루를 세워 밑에서 올려다보면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축성하였다.
30여 명의 참가자들은 "40년을 부산에 살았어도 우리 동네에 이런 역사가 있는지 모르고 살았다"고 탄식하며 성터를 둘러보았다. 해설사로 나선 최광섭 목사는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조선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사대하고 일본을 깔보다가 변을 당했다"며 "개인이든 나라든 사대를 하다가 망하게 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자성대 앞에 세워진, 1748년경 그려진 이성린의 <사로승구도>를 보며 부산진왜성의 구조와 의미를 다시 확인한 후 참가자들은 황령산을 향해 나섰다.
황령산 봉수대에 오르자, 맑은 가을하늘의 기운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미리 와 있던 '노래일꾼' 우창수씨가 참가자들을 반갑게 맞는다. 우창수씨는 부드럽게, 그러나 강한 메시지를 전하며 참가자들과 노래를 불렀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산토끼에 비유하여 불렀다는 <산토끼>, 조국을 상징하는 어머니가 밤마다 흰 옷 입고 꿈에 오신다며 조국 독립의 비원을 노래한 <찔레꽃> 등을 합창했다.
'우창수의 노래나무 심기'와 '개똥이 어린이예술단'은 부산 지역 곳곳에 스며 있는 민중의 역사 속에서 노랫말을 찾아내고 아이들과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을 하고 있다.
빨리 올리면 12시간 안에 서울에 있는 왕에게 긴급상황을 보고할 수 있던 봉수대는, 임진왜란 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왜구가 침략을 감행한 1592년 4월 14일 오전 6시, 황령산 봉수대에 근무하던 부산 사람 배돌이는 바로 봉수를 올렸지만 이 봉수는 부산이 쑥대밭이 된 한참 후에, 3일 후에야 서울에 닿았다. 봉수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탓이다.
왜 그랬을까? 봉수대를 지키는 봉수꾼들에 대한 처우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옷도 신발도,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니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군사정보체계로 활용되던 봉수대는 임란 후 그 자리를 파발마 제도에 내어주게 된다.
군사정보는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것. 우리 군이 확보한 정보를 일본에 내어주겠다는 한미일 군사정보공유양해각서 체결이 눈앞에 와 있다. 422년 전 제때 올라가지 않은 봉수가 왜구를 도왔다면 지금은 정부가 자발적으로 내주는 군사정보가 자위대를 돕는다.
참가자들은 어렵고 힘들지만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봉수군이 되자는 다짐을 하며 다음 일정을 이어갔다.
기장 두모포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는 죽성 왜성은 구로다 나가마사라는 왜군 장수가 1593년에 장기간 주둔을 목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죽성마을 뒤편에 있는 요충지를 택했고, 둘레는 960미터, 성벽높이는 4미터로 3단으로 축조되었다.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와 사기장이 전쟁통에 일본으로 끌려갔다. 왜구들은 닥치는 대로 이들 기술자와 사기장들을 끌고갔으며 일본 산업과 도자기 제작에 동원했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일본의 경제, 사회,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일본의 경제 문화적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장 출신 팔산이라는 조선 도공은 일본에 끌러가 핫산이라고 불렸는데, 그는 후쿠오카에서 다카도리가마를 창시하게 된다.
왜구는 침략으로 조선인의 피를 뿌리고 살을 도려냈지만 조선인은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도리어 일본의 문화를 발전시켜냈다. 전쟁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평화만이 발전과 번영을 보장한다. 이 새삼스러운 진리를 확인하면서 참가자들은 부산 전역에서 일본으로 피랍되어 돌아오지 못한 조상들의 넋을 기렸다. 그 피와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이 땅에서 평화를 이루리라.
부산진시장 뒤편에 산책코스로 아주 좋은 성터가 있다. 부산진지성이다. 임진왜란이 난 이듬해인 1593년, 왜장 모리 테로모토 부자가 원래 부산포에 있던 조선 외성을 헐고 일본식 성으로 다시 만든 성이다.
이 성은 왜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조선 노예들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조선 노예의 값은 한 사람당 2.4스쿠도(포르투갈 화폐단위)로, 쌀 두 가마니 정도였다. 당시 아프리카 흑인 노예 값이 한 사람당 170스쿠도였다 하니 조선 노예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영향으로 국제 노예 값의 폭락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인들은 일본은 물론, 당시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팔려나가기도 했다.
왜구들은 조선 민중을 원숭이처럼 목에 노끈으로 엮어묶고 이 끈을 우마가 끄는 달구지에 매달아 뒤따라가게 했다. 어쩌면 왜구들은 전투보다 조선인 사냥에 더 열중했으며,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은 10만 명에 달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부산 사람들은 부산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감했고, 그 교훈을 새겨 부산진성 서문(부산진시장 방향)에 새겨두었다. 조선의 목구멍과 같은, 남쪽 부산을 지키지 못하여 참혹한 일을 당했으니 이 서문을 튼튼히 지키자는 교훈이다.
10월 18일 부산 평통사 두 번째 '평화발자국'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에 의해 참혹한 일을 당해야 했던 부산 사람들, 그들이 남긴 교훈을 얻고자 나섰다.
▲ <남요인후>부산진왜성 서문 오른쪽에 있는 우주석. ⓒ 박석분
▲ <서문쇄약>부산진왜성 서문 왼쪽에 있는 우주석. ⓒ 박석분
왜성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왜군들의 남해안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지어졌다. 남해안을 중심으로 서울, 평양에 이르는 지역에 지어졌는데 대개 수송, 연락관계 등을 고려하여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강이나 바다에 근접한 독립된 구릉이나 야산을 택하였다. 부산진왜성만 해도, 지금은 매축되어 볼 수 없지만 성 바로 앞이 바다였다고 한다.
왜성은 침략과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지어졌다. 군사적 요충지을 차지하고, 축성을 쉽게 하려고 조선성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 왜성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조선 기술자들을 납치하는 거점이 되었다.
왜성은 밖에서 공격하기 어렵게 구조가 복잡하다. 출입구(호구)만 보아도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도 곡선으로 시작하여 직선으로 올라가는 식으로 지어 공격하기 어렵고, 방어하기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성벽도 1환, 2환 식으로 몇 층이나 더 올리고, 꼭대기(본환)에는 다시 성루를 세워 밑에서 올려다보면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축성하였다.
▲ <왜성구조>구포왜성 모습. 지면에서 곡선으로 올라간 모양이 보인다. ⓒ 박석분
▲ <구포왜성>구포왜성을 아래에서 올려다 본 모습. ⓒ 박석분
30여 명의 참가자들은 "40년을 부산에 살았어도 우리 동네에 이런 역사가 있는지 모르고 살았다"고 탄식하며 성터를 둘러보았다. 해설사로 나선 최광섭 목사는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조선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사대하고 일본을 깔보다가 변을 당했다"며 "개인이든 나라든 사대를 하다가 망하게 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 기행은 현장에서 하는 공부열심히 메모하는 참가자들 ⓒ 박석분
자성대 앞에 세워진, 1748년경 그려진 이성린의 <사로승구도>를 보며 부산진왜성의 구조와 의미를 다시 확인한 후 참가자들은 황령산을 향해 나섰다.
황령산 봉수대에 오르자, 맑은 가을하늘의 기운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미리 와 있던 '노래일꾼' 우창수씨가 참가자들을 반갑게 맞는다. 우창수씨는 부드럽게, 그러나 강한 메시지를 전하며 참가자들과 노래를 불렀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산토끼에 비유하여 불렀다는 <산토끼>, 조국을 상징하는 어머니가 밤마다 흰 옷 입고 꿈에 오신다며 조국 독립의 비원을 노래한 <찔레꽃> 등을 합창했다.
'우창수의 노래나무 심기'와 '개똥이 어린이예술단'은 부산 지역 곳곳에 스며 있는 민중의 역사 속에서 노랫말을 찾아내고 아이들과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을 하고 있다.
▲ 우창수의 노래공연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황령산 봉수대에서 우창수 노래공연에 참가하고 있다. ⓒ 박석분
빨리 올리면 12시간 안에 서울에 있는 왕에게 긴급상황을 보고할 수 있던 봉수대는, 임진왜란 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왜구가 침략을 감행한 1592년 4월 14일 오전 6시, 황령산 봉수대에 근무하던 부산 사람 배돌이는 바로 봉수를 올렸지만 이 봉수는 부산이 쑥대밭이 된 한참 후에, 3일 후에야 서울에 닿았다. 봉수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탓이다.
왜 그랬을까? 봉수대를 지키는 봉수꾼들에 대한 처우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옷도 신발도,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니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군사정보체계로 활용되던 봉수대는 임란 후 그 자리를 파발마 제도에 내어주게 된다.
군사정보는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것. 우리 군이 확보한 정보를 일본에 내어주겠다는 한미일 군사정보공유양해각서 체결이 눈앞에 와 있다. 422년 전 제때 올라가지 않은 봉수가 왜구를 도왔다면 지금은 정부가 자발적으로 내주는 군사정보가 자위대를 돕는다.
참가자들은 어렵고 힘들지만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봉수군이 되자는 다짐을 하며 다음 일정을 이어갔다.
기장 두모포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는 죽성 왜성은 구로다 나가마사라는 왜군 장수가 1593년에 장기간 주둔을 목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죽성마을 뒤편에 있는 요충지를 택했고, 둘레는 960미터, 성벽높이는 4미터로 3단으로 축조되었다.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와 사기장이 전쟁통에 일본으로 끌려갔다. 왜구들은 닥치는 대로 이들 기술자와 사기장들을 끌고갔으며 일본 산업과 도자기 제작에 동원했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일본의 경제, 사회,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일본의 경제 문화적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장 출신 팔산이라는 조선 도공은 일본에 끌러가 핫산이라고 불렸는데, 그는 후쿠오카에서 다카도리가마를 창시하게 된다.
왜구는 침략으로 조선인의 피를 뿌리고 살을 도려냈지만 조선인은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도리어 일본의 문화를 발전시켜냈다. 전쟁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평화만이 발전과 번영을 보장한다. 이 새삼스러운 진리를 확인하면서 참가자들은 부산 전역에서 일본으로 피랍되어 돌아오지 못한 조상들의 넋을 기렸다. 그 피와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이 땅에서 평화를 이루리라.
▲ 죽성마을 전경왼편 아래쪽에 두모포가 있다. 이곳에 살던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 박석분
▲ 참가자 기념촬영죽성왜성에서. 평화를 지켜내자는 마음을 모아. ⓒ 박석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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