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된 파독 간호사, 조국을 그리다
송현숙 개인전 <단숨에 그은 한 획>, 그가 그리워한 우리네 모습은?
▲ 세월호 침몰사고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2014년 신작 '붓질의 다이어그램'(캔버스에 템페라 170×240cm)에 대해 설명하는 송현숙 작가. 오른쪽은 이태호 교수. 송 작가는 깊고 어둔 바다 속에서 뒤엉켜 죽어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화폭에 담으려 수없이 붓질을 반복했단다 ⓒ 김형순
1972년 독일에 보조 간호사로 파견됐다가 화가로 변신한 송현숙 작가가 학고재 갤러리(본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오는 12월 31일까지 최근작 16여 점을 선보인다.
송현숙(1952~) 작가는 어려서 전기도 버스도 없는, 옷도 누에를 길러 나온 명주로 직접 옷을 짜 입는 전남 '담양 무월리'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요즘은 찾아 볼 수 없는 놀이와 노동이 하나 된 자급자족 형 '마을 공동체'를 체험한 그. 바로 이런 점이 그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낳는 자양분이 된 게 아닌가 싶다.
독일 미술 평론가 베르너 호프만은 "그의 세계는 아무것도 안에 있지 않고 아무것도 밖에 있지 않다"라고 말했는데 이건 그만의 이러한 독자성을 인정한 해석이리라. 독일의 미술사가도 그를 어떤 장르에도 넣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미니멀리즘으로 분류했다. 아마도 이는 작가가 체험한 벽촌의 삶을 그들이 납득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통 서예를 추상화로 현대화하다
▲ 송현숙 I 1획 위에 4획(왼쪽),8획(오른쪽 캔버스에 템페라 135×174cm 2012. '귀얄 붓질'의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 송현숙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선생님의 작품엔 한국의 서예 정신이 녹아있는데 선천적인 것인지 교육 받은 것인지"를 묻자, 그는 "고국에서 열리는 서예전에 관심이 많았고 1985년 전남대로 유학 와, 이태호 교수의 서예와 추사(秋史)강의에 영향 받았다. 그 후에도 이 교수가 서예 관련 저서를 독일로 보내줘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습작기와 1990년대 데뷔기를 통해 '일필휘지'의 서예 정신을 살려 작품명에 '획'을 붙였다. 예컨대 '3획'이면 3번, '7획'이면 7번의 붓질로 화면이 구성된다는 뜻이다. 10획은 보통이고 그걸 넘는 획도 많다. 이런 동적인 획에 비해 바탕은 고요하다. 이에 여백이 있는 시적이고, 명상적 분위기 속에서 작품을 한국적으로 조형화했다.
그의 작품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흡입력을 강하게 갖고 있다. 캔버스 공간을 한 획, 한 획 그어 갈 때 일어나는 긴장감은 마치 추사가 보여준 무심한 듯하면서도 조화롭고, 천진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붓의 힘이 느껴진다.
송현숙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라면 역시 돼지 털이나 말총으로 만든 옻칠이나 분청사기에 약을 바를 때 쓰는 '귀얄 붓질'이다. 이 거친 붓이 내는 표현력은 강력하다. 처음엔 눈에 잘 뜨지 않으나 보면 볼수록 그 불가항력적인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디아스포라'가 그를 예술가로 변신시켜
▲ 송현숙 I '4획 뒤에 인물' 캔버스에 템페라 160×130cm 2012. 한국적 풍경을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다. 베일 속 한국여성은 신령하게 보인다 ⓒ 송현숙
그는 1972년 파독간호사로 4년 근무하다 미술을 동경해 늦깎이로 1977년 함부르크 미술대에 입학한다. 졸업 후 1985년엔 '독일 학술 교류처' 장학금으로 전남대에서 동양화와 한국미술사를 공부했고, 1992년부턴 '자전 기록 영화'도 만들었다. 1996년엔 '에드빈샤르프 예술상'을 수상했고, 또 1998년엔 '함부르크 예술 아카데미'회원이 된다.
그의 남편 요헨 힐트만(1935~) 또한 함부르크 미대 교수였고, 탁월한 미술사가다. 송 작가는 그와 1977년 기차 안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단다. 힐트만 교수는 1986년 전남대 교환 교수로 와 '운주사' 천불천탑을 보고 한국 불교 미술에 심취해 명저 <미륵>(1987년)도 냈다. 그는 전생에 한국의 고승이었다고 자처한다.
송현숙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독일인에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전시 때마다 기록 영화인 <내 마음의 조롱박(1995)>, <회귀(1996)>, <집은 어디에(2003)> 등도 같이 소개했다. 이 영상 자료는 주로 한국 가족과 문화 전통에 관한 것이다. 독일에선 영화인이 아니라도 영화제작을 지원해주는 위원회가 있어 영화 작업이 수월하다고 한다.
<내 마음의 조롱박>과 같은 작품에선 죽음을 맞는 태도에서 한국과 독일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면 한밤 중에 가족의 부고 소식을 받았을 때 우리는 바로 달려가 유족과 함께 같이 먹고 마시며 위로하며 밤을 지새우나, 독일인은 아침에야 고인을 보러 병원을 찾는단다. 그는 이런 상이점에서 문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색채와 재료에서 한국과 독일 융합
▲ 송현숙 I '12획 캔버스에 템페라 170×200cm 2013. 독일의 세련된 색채와 한국의 절제된 색채가 조화를 이루다 ⓒ 송현숙
작가는 40년 이상 독일에서 살았다. "선생님 작품에 왜 독일 풍경이 안 보이느냐" 물었더니, 자신의 작품 속 색채로 녹아있단다. 작품을 다시 보면 명료하면서 세련되고 품위를 갖춘 독일적 색채에 다소 미묘하고 추상적이면서 절제된 소박함이 담긴 한국적 색채가 절묘하게 섞여 있다. 이런 색은 독일 사람이 더 좋아할 것 같다.
피카소가 최고 거장임에도 유럽 미술의 돌파구를 아프리카의 원시 미술에서 찾았듯, 송현숙은 독일에 살면서도 이에 매몰되지 않고 한국적 색조와 체취가 물씬 풍기는 대나무, 황토, 분청사기 등에서 영감을 받아 또 다른 제3의 색채를 만들어냈다.
검은색만 해도 수천, 수만 가지고 서양에서는 고야의 '블랙페인팅'이 유명하지만 송현숙의 검은색은 유난히 튄다. 그 색은 우리의 내면을 파고들듯 장엄하고 경건하다. 작가 스스로 이런 검은색을 '시공을 초월한 적막함 같은 색'이라고 평하기도 했는데 어찌 보면 민주화가 덜 된 안타까운 조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색인지 모른다.
송현숙 작가는 한지에 붓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물감은 서양 것이고 정신은 동양적이다. 유화는 너무 번쩍거리고 아크릴물감은 너무 건조해서 그런지 안 쓰고 유럽에서 15세기에 애용된 계란 노른자위로 만든 무광택 '템페라'를 선호한다.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파고드는 특색이 있는 이 물감이 그의 체질에 맞는 모양이다.
독일에서 한국을 더 잘 보전하다
▲ 송현숙 I '28획 캔버스에 템페라 150×200cm 2014. 큰 말뚝에 묶인 하얀 고무신을 싼 하얀 천과 막대기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화면을 압도한다 ⓒ 송현숙
송현숙 작가는 독일에서 40년 이상 살면서 한국적인 걸 고스란히 잘 간직하고 있다. 1970년대 전라도 사투리를 그대로 쓰는 것은 물론이고 독일 자택 주변에 소나무 숲이며 집 텃밭에는 여전히 깻잎, 더덕, 쑥갓, 상추, 호박 등을 길러 먹는단다.
남편도 이제는 홍어 회나 청국장도 즐길 줄 안단다. 그는 독일에 오래 살았기에 오히려 우리의 뿌리와 정체성을 더 선명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위 작품에도 보면 하얀 고무신이 한국적 조형 언어로 등장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의 작품에서 우리마저도 망각한 구수한 된장 맛 나는 토속성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고향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
▲ 송현숙 I '14획 캔버스에 템페라 150×200cm 2012. 타국에서 고향을 갈망하며 고단한 이어가는 삶을 두 개의 막대로 묶는 방식으로 표현하다. ⓒ 송현숙
그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외국 노동자의 고단한 삶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 획, 한 획 붓질에 담았다"고 언급했는데 공감이 간다. 소월의 시 '초혼'을 감상할 때처럼 그의 작품은 왠지 모르게 관객에게 보일 듯 말 듯 아련한 고향에 대한 동경과 향수, 그리움을 불러내는 것 같다.
'그림'이란 우리말의 어원은 '그리움'에서 왔다. 그렇다면 가장 그립고 보고 싶은 걸 그리는 게 그림이다. 그가 어려서 본 고향 풍경이 이국에 사니 얼마나 더 사무쳤겠는가. 그런 절절한 심정을 담았으니 화면에서 처연함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위 초가지붕을 보라. 이건 작가가 지울 수 없는 영원한 노스탤지어다.
독일에서 대학 입시용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도 테마는 역시 '고향의 장독대와 정갈한 고무신, 동네어귀 소나무와 대나무, 빨랫줄에 걸린 무영과 모시, 절절 끓던 온돌방, 부엌 아궁이와 가마솥,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 담장으로 둘려 쌓인 마당과 소 외양간, 벼이삭이 익어가는 들녘 등'과 같은 것이었단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강인한 한국 여성 같은 '막대'와 '항아리'
▲ 송현숙 I '6획' 캔버스에 템페라 105×110cm 2013. 토기의 향토성과 현대적 색감이 오버랩 된다 ⓒ 송현숙
끝으로 그의 작품 소재인 횃대에 걸친 옷이나 초가 지붕, 호랑이, 고무신 말고도 작품에 출현하는 빈도가 가장 높은 건 '막대'와' 항아리'인데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마당극에서 '말뚝이'가 나오듯 그의 작품에는 거의 빠짐없이 '막대'가 나온다. 엉성해 보이는 두 막대가 팽팽하게 연결돼 있는데 그 사이로 흰 옷이 휘날리고 그걸 지탱하게 하는 균형감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이건 일차적으로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남과 북, 동과 서를 연결시켜주는 버팀목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이 막대는 이차적으로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도 연상시킨다. 어설프게 고생한 사람은 비관주의로 빠지지만 꼬부랑 할머니는 워낙 많은 인생의 고비를 넘기다보니 오히려 낙관주의에 도달해 현실도 수용하고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고 역사도 바꿀 수 있다는 강인한 여성으로 변했는데, 바로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토기 항아리(옹기)' 또한 한국적 원초성과 토속성이 진하게 풍기는 소재다. 그 완만한 선은 넉넉한 어머니 품을 생각나게 하고, 여성적 대지(大地)성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막대'와 '항아리'라는 소재는 한국 사회의 주춧돌이 되는 여성이 가진 강인하지만 관대한 속성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송현숙 식 여성주의가 아닌가 싶다.
결론으로 그의 회화 세계는 한국통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한국인의 키워드는 '정'이라고 결론지으면서 "그건 매우 복합하고 특별한 성격으로 사랑도 넘어 원한과 증오와 질투마저도 포함한 강력하고 끈끈한 감정"이라는 한 말처럼 송 작가는 바로 이런 한국적 '정'을 그 어떤 문자로도 표현 못하는 상징기호로 잘 풀어냈다.
▲ 사진작가이기도 한 요헨 힐트만(Jochen Hiltmann) 교수가 찍은 운주사 '와불'. 하늘을 바라보고 누운 와불이 일어나는 날 이 땅에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전한다 ⓒ Jochen Hiltmann
68 혁명 세대인 요헨 힐트만은 설치 작가로, 미술 사학자로 요셉 보이스와 친구였고 함부르크 미대 교수였다. 운주사 천불천탑을 재해석한 책 <미륵>은 불교 미술과 민중 사상에 대한 우리보다 더한 애착을 가지고 깊이 연구한 저서로 출간 당시 한국미술계에 큰 충격을 줬다. 그는 운주사의 천불천탑이 품고 있는 비밀을 '용화 세계'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재해석했고, 미래의 부처 '후천 미륵불'을 독창적인 관점으로 조망했다.
호남 지역이 제도 정치권에서 멀어지면서 아직 출현하지 않은 미륵 불교는 이곳에서 성행했고, 민중 불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천불 천탑의 용화 세계는 대불전도 없는 마을 입구 논 한가운데 세워져 급기야는 장승 신앙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민속 신앙이 된 불교다. 부처가 진정 낮은 중생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요헨 힐트만 교수는 이곳을 '한국문화의 총체적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발전소'로 봤다.
용화세계 : 옛말에 따르면 용은 바다에서 천 년, 육지에서 천 년, 하늘에서 천 년을 산다고 한다. 용화란 바로 그런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세계다. 불교경전의 하나인 '미륵경'을 보면 모든 천신을 교화하다가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일겁(一劫: 낙숫물이 집 한 채만한 바위를 뚫어 없애는 데 걸리는 시간)' 즉 56억 7천만년('미륵경' 기준)이 지나면 다시 용화세상이 와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다는 말로 석가는 '일겁'을 앞당겨 '성불'이 되었고 미륵은 '일겁' 늦추어 용화세계에서 성불하게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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