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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내딸 소린이...다른 시선으로 보지 마세요

[입양을 인터뷰하다①] 공개입양 가족으로 살아가기... "대단하다" 사절합니다

등록|2014.12.23 11:15 수정|2014.12.31 10:43
<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김지영 시민기자가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입양가족을 대할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개의 극단적인 시선으로 갈린다. 존경하거나 이해할 수 없거나. 그러나 호기심 어린 시선만큼은 공통적이다. 사람들이 이런 이유는 입양을 잘 몰라서다. 나 역시 딸 소린이를 얻기 전에는 그랬다. 그래서 입양과 관련한 사람들을 가능한 많이 만나보기로 했다. 때문에 일당쟁이 목수 일을 접고 취재여행을 위해 짐을 꾸렸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기쁘게 자초한 일이다. 좋은 결실로 맺어진다면 그건 순전히 내 사랑하는 딸 소린이로부터 빚어진 것이다... 기자 말

내겐 자식이 둘 있다. 16살 고등학교 1학년 아들과 8살 초등학교 1학년 딸. 아들 선웅이는 결혼한 이듬해 낳았고, 딸은 결혼한 지 10년 되던 해 공개입양을 했다. 입양 당시 생후 27일이었던 딸아이의 이름은 김소린이다.

▲ 내 딸 김소린. ⓒ 김지영


소린이가 우리 가족이 된 2007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요보호 아동'은 8861명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말하는 요보호 아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부모 및 그 밖의 보호자와 사별하였거나 보호자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또는 보호자에게서 버림받아 그들에게 보호, 양육되지 못하는 18세 미만의 아동.'

이를 발생 유형별로 분류한 당시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빈곤, 실직, 학대로 인한 요보호아동이 5354명, 비행-가출이 748명이었다. 그리고 미혼모에 의한 아동이 2417명, 기아가 305명. 소린이는 이 분류에 따르면 미혼모로 인해 발생한 2417명 중 한 명이었다.

딸과의 첫 만남... 낯설었다

당시 전체 입양대상아동 8861명 아이들 중 입양을 통해 가정을 찾은 아이들은 총 2652명이었다. 이는 다시 해외입양과 국내입양으로 나눠지는데 해외입양이 1264명 그리고 국내입양은 1388명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시설보호와 가정위탁 및 그룹홈 등으로 인계되었다.

딸을 얻기까지 우리 부부가 겪은 일련의 과정은 입양신청을 하고 건강검진을 비롯한 각종 필요한 절차를 밟은 후, 심사를 받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일 만큼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대신 소린이가 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나 국내입양으로 최종 분류되는 그 이면에는 복잡한 통계만큼의 복잡한 사연들과 더불어 돌이켜보면 몇 번의 우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스물일곱 살 소린이 생모는 처음에 소린이를 낳아 직접 기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배가 불러오고 산달이 가까워질 무렵 어떤 사정이 생겼고, 입양을 보내는 걸로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그 사정 중 하나로 젊은 딸의 창창한 미래가 염려된 부모님들의 강권이 있었음을 담당자와 대화를 하면서 추측할 수 있었다. 젊은 엄마의 부모님들에게 딸이 낳은 '법 밖의 딸'의 미래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첫 번째 우연이었다.

소린이 입양이 결정되자 곧바로 예비 양부모가 결정되었다. 지방의 어느 목사님 가정이었다. 그런데 소린이가 태어나고 수속을 밟기 위해 연락을 취했는데, 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어진 두 번째 우연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소린이를 입양하기로 했던 목사님 가족이 미국에 잠시 다녀오는 사이였다. 당시에는 한 달 미만의 영아입양은 관행상 '인우보증'을 통한 가정 내 출산으로 친자등록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 달 안에 입양가정이 정해져야 했다.

소린이가 태어난 지 27일째인 날, 나와 아내 당시 9살이었던 아들 선웅이는 함께 차를 타고 부산에 있는 상담소로 달려갔다. 사무실 한쪽 귀퉁이 아기 침대에 아주 작은 아기가 이불에 싸여 누워 있었다. 세상 빛을 본 지 한 달도 안 된 작고 여린 생명이 가냘프게 숨을 쉬며 자고 있었다.

▲ 입양 당시의 소린이 모습. ⓒ 김지영


낯설었다. 

며칠을 마음 졸이며 만나기를 고대했던 날이었다. 연락을 받고 데려갈 날짜를 정한 며칠 사이 우리 부부는 흥분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귀농해 살던 시골집에서 천기저귀를 빨아 맑은 햇빛에 바짝 말려 개어 놓고, 도시 큰 마트를 찾아 설레는 마음으로 아기용품을 사면서도 혹시 그 목사님과 다시 연락이 되어 결정이 바뀌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대단하십니다"... 그 말이 상처였다

9년 전 우리가 선웅이를 가졌을 때, 태어날 날을 손꼽아 기다릴 때의 마음이 고스란히 되새겨졌다. 임신, 출산 과정에서 부모가 느끼는 기대와 설렘,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한 불안감까지... 굳이 비교하자면 더하고 뺄 것도 없는 그 마음 그대로였다.

입양을 결심, 심사 통과, 아기를 기다리고 만나게 되는 그 모든 과정이, 결혼해 아이를 낳기로 하고 임신해 출산을 하는 그 모든 과정들과 다를 게 없었다. 생명을 얻는 과정에서 요동치는 인간의 마음은 한결 같다는 걸 깨달았다. 낳거나 '얻거나'의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낯설다니. 처음 겪는 마음이었다. 일말의 동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본질적인 측은지심과는 결이 약간 다른 그 느낌이, 지금에 와서는 소린이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그 낯선 마음은 하루를 가지 못했다. 그날 밤 시간에 맞춰 우유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입히고, 여린 엉덩이를 씻기고, 밤을 새우고 난 이후로는 더는 그 느낌은 존재하지 않았다. 불과 하룻밤 시간을 함께 지내는 동안, 그 낯선 마음은 부끄러운 기억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우리 가족. 아내, 소린(가운데), 왼쪽은 아들 선웅이다. ⓒ 김지영


아내와 내가 둘째를 가지기로 결정한 것은 시골에 내려와 한창 낭만에 젖어 있을 무렵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직 시골살이의 뜨거운 맛(?)을 모를 때였다. 우리만 누리기에 너무 아까운 시간들이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둘째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둘째만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원하는 둘째는 반드시 딸이어야만 했다.

형제 많은 집의 넷째 아들인 내게도, 딸만 내리 여섯에 밑으로 남동생 둘을 둔 아내에게도 딸의 온기가 주는 집안의 따뜻함은 절실하고 소중했다.

하지만 딸을 콕 집어 낳을 방법은 없다. 그래서 입양을 택했다. 우리는 절실한 만큼 100%의 딸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입양을 결정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고민하는 것을 우리 역시 피하지 못했다.

'자라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유전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딸이 나중에 입양 사실을 알았을 때 서로 큰 상처를 주고받지는 않을까? 이미 낳은 아들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차별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아이가 무의식적인 내상을 입는 것은 아닐까? 주변의 편견으로 아이가 받는 상처는 어떻게 하지?'

다행한 일은 우리는 그런 고민 앞에서 딱 한 번 단호하게 용기를 냈고, 그 용기가 8년이 지난 지금 입양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알 만큼, 나와 아내를 성장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혈연가족이 아닌 우리들이 함께 넘어서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커다란 산으로 존재한다. 입양가족이라는 특별한 형태의 가족이라면 누구나 넘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산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는 아직 공개입양에 대한 이성적 동의가 정서적 동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막장으로 시청률에 집착하는 드라마의 단골 소재는 대개 어긋난 출생의 비밀이다. 많은 사람이 흔하지 않은 입양가족을 만나면 꼭 하는 말이 "대단하십니다"이다. 이어 촉촉한 눈길로 아이를 바라본다. 자식 양육을 포기한 미혼모는 그 깊은 곡절과 관계없이 비인간의 표상이 된다.

입양가족으로 8년간 이런저런 사회적 편견 속에서 살아왔다. 이건 우리 부부가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문제였다. 우리는 가족을 이룬 방법만 다를 뿐 사는 모습은 특별하지 않는데도, 입양부모는 대단한 사람이고 입양아는 불쌍한 존재가 된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에게 "대단한 일을 하십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게 딸과 아들은 같은 자식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한 사람', 소린이는 동정의 대상이 된다. 성을 낼 수 없지만 속으로는 상처를 받는다.

"대단한 일을 하십니다"라는 말 앞에는 "내 자식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든 세상인데 남의 자식까지 키우다니"라는 문장이 감추어져 있다.

▲ 내 딸 김소린. ⓒ 김지영


소린이는 알에서 부화한 난생이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8살 아이들처럼 엄마의 자궁에서 살다 세상에 태어났다. 소린이는 여느 아이들처럼 세상에서 노는 걸 가장 좋아하고, 때로는 엄마에게 바락바락 대들며 신경전을 벌이다가도 밤에는 엄마를 끌어안아야 잠이 들고, 일요일에는 나란히 대중목욕탕에 가서 세 시간을 함께 발가벗고 물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 그런 평범한 가정의 귀한 딸이다.

우리 부부가 비밀입양이 아닌 공개입양을 선택할 당시, 우린 공개입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저 '비밀'이란 단어가 주는 은밀하고 무언가 계속 숨겨야만 하는, 혹은 드러내서는 안 되는 금기 같은 그늘진 의미들이 싫었다. 밝게 자라야 할 생명이 그 출발에서 뭔가를 감춰야 한다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개입양은 단순히 입양을 만천하에 알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입양을 하면서도 우리는 입양에 대해 너무 몰랐다. 공개입양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척박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도 있었지만, 세상은 입양에 대해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고아로 살 준비가 된 아이는 없다"

입양부모가 되면 대부분 입양 전문가로 거듭난다. 단순히 경험해 봐서가 아니라 당장 금쪽 같은 자식의 성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보기로 했다. 지난 10년 동안 매년 적게는 6000명에서 많을 때는 9000명 넘는 아이들이 자신을 낳은 부모가 아닌 다른 부모의 품이나 시설로 간다. 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어떤 편견이 이 아이들을 구분짓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싶었다.

소린이가 성인이 됐을 때는 이 사회의 입양문화가 좀 더 밝고 보편적이길 바란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반드시 발생하는 '또 다른 소린이'가 좋은 가정에서 원만하게 성장했으면 한다. 입양을 고민하는 많은 사람의 바른 선택을 위해, 무엇보다 시대가 넘어야 할 사회적 편견이 조금이라도 옅어지면 좋겠다. 나의 작업은 이 모두를 위한 일이다.

▲ 바다를 바라보는 할머니와 소린이. ⓒ 박상규


소린이를 입양한 지 7년째인 2013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요보호 아동의 수는 6020명이었다. 이 중 빈곤, 실직, 학대 등으로 인한 요보호아동의 수는 3668명, 비행-가출에 의한 아동은 512명이었다. 미혼모와 기아 탓에 보호자로부터 양육이 포기된 사실상 갓 태어난 어린생명들은 1819명이었다.

6020명의 요보호 아동 중 입양을 통해 따뜻한 가정을 다시 찾은 아이들은 478명에 그쳤다. 이런 우울한 숫자가 '0'이 되는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 세계 어느 나라든 우울한 통계가 '0'인 나라는 없다. 앞으로도 가능하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살펴 줄 이 하나 없이 홀로 남겨진 아이들의 숫자를 '0'으로 만들 수는 있다.

어느 무명씨의 말을 옮긴다.

"종종 나 자신에게 입양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물어보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고아가 될 준비를 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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