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지리산도 감춘 은둔의 땅, 문수대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⑭] '불국토' 지리산과 문수암의 슬픈 역사

등록|2014.12.05 13:41 수정|2014.12.05 13:41

▲ 노고운해 ⓒ 김종길


잡목과 풀숲에 덮인 길이 어느새 또렷해진다. 처음의 미망도, 끝없이 펼쳐진 초원도 끊기자 비로소 길의 형체가 드러났다. 이제는 아무런 장애가 없는 길, 외줄기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모든 것을 비우고 버려야 본지풍광이 숨김없이 나타나는 법. 저 길의 끝에 적정과 안심, 무위가 있으리라.

20여 분을 걷자 홀연히 빗장을 지른 돌문 하나가 나타났다. 문이 아닌 문,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은 문 앞에서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 오기까지의 천 가지, 만 가지 상들이 모두 사라졌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고요를 깨고 들어온다. 나는 왜 대체 여기까지 왔는가.

석상 스님이 말했다.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그리고 다시 스스로는 멀고 외딴 곳에 있는 절간의 낡은 향로와 같이 되어라."

▲ 노고운해 ⓒ 김종길


지리산이 감춘 은둔의 땅

문수대는 정남향이었다. 고도계는 해발 1310 미터를 가리켰다. 왕시루봉을 바라보고 있는 구상나무가 이 암자의 사천왕처럼 버티고 있다. 채마밭의 무는 토실했다. 무서우리만치 고요한 암자의 텃밭에 햇빛이 길게 드러누웠다. 암자는 사실 토굴에 가까웠다. 스님은 이번에도 없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올해만 벌써 수 차례 노고단 일대를 다녀왔다. 노고단 아래 문수골에 암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진작 듣고 있었지만 도무지 암자로 가는 길을 가늠할 수 없었다. 노고단에 올라 암자가 있을 곳을 어림잡아 보고, 주위 산세를 살펴보기를 몇 번, 결국 암자로 가는 들머리 길을 찾았다.

마침내 지난 유월 문수대로 첫걸음을 뗐다. 노고단으로 곧장 향한 것이 아니라 은둔의 땅을 가는 만큼 오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지리산 아래부터 온전히 두 발의 힘으로 지리산이 감춘 땅을 찾기로 한 것. 거림 골짜기를 올라 세석 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능선 길을 하루 꼬박 걸어 노고단 산장에서 이틀 밤을 보낸 뒤 이른 아침 안개 속을 뚫으며 문수대를 찾았다.

▲ 참나무와 조릿대가 무성한 문수대 가는 길 ⓒ 김종길


그러나 길은 무성한 원시림에 가려 있었다. 몇 번이나 풀숲을 헤친 끝에 암자로 가는 유일한 길의 흔적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어렴풋한 오솔길에서 혹시나 뱀이나 사나운 짐승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지리산 깊숙한 은자의 땅,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심산유곡의 비장처를 기대하며 말이다.

결국 바위 이끼에 미끄러져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고 스틱이 부러지는 불상사를 겪었지만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문수대를 향한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두 번이나 넘어지고 나니 되레 정신이 환해졌다. 길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어느새 잊혔다.

▲ 무성한 원시림 끝에 만난 돌너덜지대 ⓒ 김종길


지난 시월, 다시 문수대를 찾았다. 이번에는 아래쪽 길을 발견했다. 지난 번 몇 번이나 가다 돌아서기를 반복했던 위쪽 길보다 훨씬 또렷했다. 적어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 길게 이어졌다. 참나무와 조릿대가 뒤섞인 울창한 숲을 지나자 이윽고 나타난 벼랑, 다시 이어진 어두컴컴한 원시의 숲길은 돌너덜지대에 이르자 왕시루봉 능선이 나타나며 시야가 탁 트였다.

얼마 후 문수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스님은 없었다. 다음 날 묘향대의 호림 스님을 만났을 때 문수대 스님의 안부를 물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암자 뜰에는 가을 국화 몇 송이가 피었을 뿐, 적막이 깊었다. 벼랑 아래 절묘한 터에 자리 잡은 문수대. 수도처로 이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지리산은 불국토였다

▲ 해발 1310미터, 50미터가 넘는 아찔한 벼랑 아래에 자리한 문수대 ⓒ 김종길


왜 문수대일까. 문수대가 자리한 노고단은 예전에 길상봉으로도 불렸다. '(묘)길상'은 문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암자가 있는 골짜기도 문수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이 일대는 문수보살의 화신인 것이다. 문수(文殊)란 무엇인가. 이름 그대로 지혜를 상징한다.

백두산이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원래 대지문수보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와 '리(利)'를 따왔다고 한다. 중생을 제도하는 문수 보살의 지혜가 깃든 산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지리산은 지혜의 산이다.

▲ 암자 뜰에 핀 꽃 ⓒ 김종길


최치원이 887년에 쓴 진감선사비와 893년에 세운 실상사의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에는 지리산이 '知異山'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地理山'으로, <고려사>에는 '智異山'으로 씌어 있다. 이로 보아 삼국시대에는 '地理山', 통일신라시대에는 '知異山'으로, 고려시대에는 '智異山'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산에 불교가 꽃피던 통일신라시대에 지리산은 '지혜롭고 신령스러운 산', 불국토가 된 것이다.

경주 남산이 신라의 왕실과 귀족들이 살던 왕경의 불국토였다면 지리산은 지방 호족과 민초들의 불국토였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천지편'에는 신라 승려 의상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청구기>에 '두류산(지리산)은 1만의 문수보살이 머무는 세계'라는 내용이 있다고 했다. 1472년에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은 지리산에 4백 개에 이르는 절이 있다고 했다. 18세기의 고승 응윤 스님도 <지리산기>에서 '옛날에는 이 산 주위에 팔만 아홉 곳의 절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 아름드리 구상나무 아래의 돌방석 ⓒ 김종길


다소 과장된 이야기이기는 하나 지리산은 그 자체로 부처의 몸이었다. 그 몸에 수백의 도량이 깃들어 있었던 불국토였던 것이다. 천왕봉, 반야봉 제석봉 등의 봉우리와 문수대, 영신대, 금강대, 세존대, 묘향대 등의 대(臺)는 부처가 되고, 그 품에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벽송암, 칠불암 등 이름난 사찰과 암자가 들어서 있다. 지금도 지리산 일대의 사찰과 암자, 토굴 등을 합치면 100여 곳에 이르니 지리산 자체를 장엄한 수행도량 지리산 총림으로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다.

문수암의 아픈 역사

▲ 은둔 ⓒ 김종길


예부터 지리산에는 '8대(臺)'니 '10대'니 하여 전망 좋은 곳이 있다. 금대, 마적대, 문수대, 연화대, 묘향대, 만복대, 종석대, 무착대, 향운대, 문창대, 영신대, 향적대, 서산대, 불일대, 상무주대 등이다. 이곳들을 올라야 지리산을 제대로 안다고 했다. 노고단 주변에도 종석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 등 이름난 곳들이 있다. 이런 곳들은 모두 풍광이 좋을 뿐만 아니라 기운이 모인 곳이라 수도처로도 알맞은 곳이다.

문수대는 50m가 넘는 아찔한 벼랑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육산에는 바위가 있는 곳이, 골산에는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이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했으니 문수대는 육산인 지리산의 바위 벼랑 아래의 부드러운 대지에 터를 잡았으니 애써 명당이라 말할 필요가 없다. 한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물도, 땅도 넉넉하니 예부터 수도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지금도 화엄사의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 중이다. 이곳에 암자가 처음 들어선 건 1803년 경 화엄사의 초운대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내력은 알 도리가 없다.

▲ 지리산이 감춘 땅 ⓒ 김종길


그런데 이 고요한 암자도 지리산의 아픈 역사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문수대는 항일 의병 운동의 본거지였다. 문수대가 역사에 드러난 건 구한말 지리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 때문이다. 한때 의병부대가 1700명에 달했던 의병장 김동신이 이곳 문수대 일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연곡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과 피의 맹세를 한 김동신은 영호남의 여러 군을 돌아다니며 의병 활동을 전개했고, 두 차례에 걸쳐 지리산에 들어왔다. 1907년 9월 18일, 화개를 출발한 김동신 부대는 반야봉을 거쳐 이곳 문수대로 왔다. 다음 날 문수골 아래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그 다음 날 새벽 구례읍을 습격해 읍내를 장악했다. 화개에서부터 김동신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의병장 고광순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연곡사를 기습 공격해 불태운 후 이곳 문수대마저 불태웠다. 김동신의 의병 투쟁은 1908년 6월 6일 대전 순사대에 그가 체포되자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제 갈 거나. 암자 뜨락에 무심히 놓인 돌 방석에서 무심한 허리를 세웠다. 뒤로는 은산철벽, 앞으로는 낭떠러지. 왕시루봉이 지척이고 저 멀리 흐르는 섬진강이 가뭇없다. 이곳 문수대에서 발원한 토지천 물 줄기는 산 아래서 섬진강을 만나 토지면 일대에서 풍성한 '구만들'을 이룬다. 노고단의 옥녀가 금가락지를 흘린 곳이 금환락지의 명당 오미리 운조루이다.

▲ 암자는 사실 토굴에 가까웠다. ⓒ 김종길


노고단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노고단. 여름에는 원추리 군락지로, 봄가을에는 야생화 천국으로 뭇사람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예로부터 지리팔경의 하나로 불리는 노고운해가 장관이다. 노고단은 신라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었다 하여 노고단으로 부르게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심신 수련장이었다고도 한다. 길상봉(吉祥峰)으로도 불렸다는데 단지 길하고 상서로운 봉우리라는 의미를 넘어 길상은 묘길상, 즉 문수보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노고단 서쪽 골짜기는 문수골이고, 문수대라는 곳에 문수암이라는 암자가 있고, 토지면에는 반달곰을 키우는 문수암이라는 같은 이름의 암자가 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