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11명 시신... 기업 처벌하는 '기업살인법' 시초"
['안전한 일터 안전한 사회 만들기' 심포지엄] 세월호 참사로 떠오르는 기업살인법
▲ 2일 '침몰한 생명과 안전, 무엇이 필요한가? 안전한 일터 안전한 사회 만들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안드레아 퍼트 캐나다노총 노동안전환경위원장의 모습. 그의 뒤로 당시 광산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안드레아 퍼트씨는 기업(혹은 개인)의 예방 조치 부주의로 인해 노동자가 상해를 입었을 경우 기업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캐나다의 '웨스트레이 개정안(Westray Bill)'에 대해 소개했다. ⓒ 유성애
1992년 5월 9일 토요일 오전 5시 18분(현지시간). 캐나다의 노바 스코티아주에 위치한 웨스트레이 광산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메탄가스가 폭발했다. 이 사고로 광산노동자 26명이 즉사했는데, 폭발이 너무 심한 탓에 11명의 시신은 찾지도 못했다. 광산 관리자들은 언론에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했고, 캐나다노총에 따르면 당시 그 어떤 개인이나 기업도 광부들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2년 뒤인 2004년 3월, 기업(혹은 개인)의 예방 조치 부주의로 인해 노동자가 상해를 입었을 경우 기업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웨스트레이 개정안(Westray Bill)'이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다. 사망한 광산노동자 26명의 유가족과 생존자, 부상자 등이 힘을 합쳐 연방 의회 의원 308명을 일일이, 지속적으로 찾아가 법 개정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설득한 덕분이었다.
당시 유족들과 함께한 안드레아 퍼트 캐나다노총 노동안전환경위원장은 2일 서울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침몰한 생명과 안전, 무엇이 필요한가? - 안전한 일터 안전한 사회 만들기' 국제심포지엄에서 이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정부는 기업이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하도록 구체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기업과실로 인한 산재 사망은 범죄다, 안전사고를 일으킨 최고 경영자들은 반드시 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했다.
웨스트레이 광산 폭발 12년 뒤 만들어진 웨스트레이 개정안
민주노총과 세월호참사 가족대책위 주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는 호주 노동안전 전문가, 150여개국 공공노조 세계연맹체인 국제공공노련(PSI) 관계자, 영국 산업재해전문가 등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이들은 특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완화와 민영화가 "대기업의 안전규제를 약화시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재난재해 발생시 기업 책임을 묻는 '기업살인법'의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외국 전문가들은 앞서 1일 밤 광화문 농성장에서 세월호 유족들을 만났다. 호주 노동안전보건 전문가 제라드 에어스는 심포지엄에서 이를 언급하며 "그분들이 보여주신 용기와 강인함에 깊이 감동받았다, 제 인생을 통틀어 잊지 못할 경험"이라며 "아무리 어려운 싸움이라도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저 또한 호주에 가서도 유족들의 용기 있는 투쟁을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국제공공노련 동경사무소 소장인 아오바 히루 또한 "(4월 16일 당시) 침몰하는 배를 저도 TV화면으로 계속 지켜봤다"며 "유가족들을 직접 만난 것이 제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 됐다, 앞으로 공공안전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그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간 민주노총 관계자는 농성장을 찾은 외국 전문가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덧붙였다.
제라드 에어스 호주 노동안전보건 전문가는 2003년 제정된 기업살인법을 소개하며 "사용자의 부작위(마땅히 해야 한다고 기대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로 인해 노동자가 사망하면 산업살인죄로 기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유죄로 판결날 경우, 기업은 최고 125만 AUD(한화 약 11억 8000만 원), 개인은 25만 AUD(한화 약 2억 3500만 원) 또는 25년 형을 받게 된다. 다만 호주 역시 전국이 아닌 일부 지역에서만 시행되고 있다.
떠오르는 기업살인법... 한국은 아직 제대로 논의도 못해
▲ 심포지엄에 참석한 외국 전문가들은 앞서 1일 밤 광화문 농성장에서 세월호 유족들을 만났다. 호주 노동안전보건 전문가 제라드 에어스는 2일"그 분들이 보여주신 용기와 강인함에 깊이 감동받았다, 제 인생을 통틀어 잊지 못할 경험"이라며 "제가 호주에 가서도 유족들의 용기 있는 투쟁을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 민주노총 제공
강문대 민변 변호사는 "한 해 2000여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데도 실제 구속되는 사람은 5명도 안되고 대부분 벌금형으로 끝난다"며 "한국에선 특히 기업이 형법상 처벌 대상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는데, 기업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규정을 법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보통 재해 발생시 최고경영자(CEO)는 쏙 빠지고 현장근로자만 처벌받는데, CEO에게 직접 책임을 묻을 수 있는 법안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법부가 세월호 청해진 해운 대표에게 책임을 물었지만 사고 자체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다, 업무상 횡령과 배임 등을 통합했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산업안전보건법에 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손해배상을 하게 하는 제도로, 강 변호사는 기업의 불법행위를 실질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이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호중 서강대 교수는 "한국에서 기업살인법 얘기가 나온 지도 10년이 다 돼 가는데 제대로 의논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기업의 안전무시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한데도, 세월호 같은 참사를 겪은 뒤에야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황필규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세월호 참사는 국민들이 국가적, 사회적인 신뢰의 붕괴를 경험하는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이번 참사로 아들 찬호군을 잃은 전명선 유가족대책위 위원장은 토론회에 앞서 스스로를 "자식을 살리지 못한 죄 많은 부모"라고 소개했다. 그는 "저희도 피해자가 되기 이전엔 몰랐다, 먹고 살려면 (산재 같은 일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앞으로는 돈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일이 없는 사회에서 국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 부모들이 지키지 못한 아이들을 떳떳하게 보는 날까지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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