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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에서 소련의 정보를 입수했던 남자

[리뷰] 이언 매큐언 <이노센트>

등록|2014.12.05 12:51 수정|2014.12.05 12:51

<이노센트>겉표지 ⓒ 문학동네

2차대전이 끝나고 10년 뒤, 동서로 나뉜 독일 베를린에는 미국, 영국, 소련 등 강대국들이 모여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던 시절이니 만큼 베를린에는 수많은 군인과 스파이들이 모여있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상대국가에 관한 정보다.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 첩보원을 이용해도 되지만 점점 발달하고있는 통신기기를 이용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그래서 생겨난 프로젝트가 '베를린 터널', 일명 '작전명 골드'다. 창고로 위장한 미군 레이더기지 지하에서 터널을 파 소련 육상통신선에 접근한 뒤, 소련측에서 발신되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영국과 미국이 함께 공조한다. 소련이 동유럽 수도들과 주고받는 모든 통신은 베를린을 거쳐서 나간다.

그렇다면 그 통신선을 도청할 수만 있으면 냉전에서 그만큼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소련 군인들에게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사랑

이언 매큐언의 1990년 작품 <이노센트>는 바로 이 프로젝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1955년, 베를린으로 영국 체신국 전신기사 레너드 마넘이 파견된다. 25살의 청년 레너드는 낯선 도시에서 국가적 비밀작전에 참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될 희망에 부푼다.

레너드가 해야할 일은 도청용 녹음 장비를 개조하고 설치하는 것이다. 그를 안내해주는 미군 장교는 이 작전이 극비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굳이 미국인이 아닌 영국인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은, 미국과 영국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 결과라는 것도 함께 주지시킨다.

레너드는 터널에 처박혀서 일을 시작한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출퇴근에도 몇 시간씩 걸린다. 그래도 레너드는 별 불만이 없다. 자신에게 일이 생겼고, 그 일에는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명분도 있다.

동시에 레너드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카페에서 우연처럼 만나게 된 여인이다. 25살이 되도록 연애경험 한 번 없던 레너드는, 성숙하고 적극적인 그 여인에게 빠져들게 된다. 터널 속에서 종일 긴장하며 근무하는 레너드에게 그 여인의 존재는 일종의 탈출구와도 같다. 하지만 이 만남 역시 비밀이 되어야 하는 법. 터널과 여인을 오락가락하는 레너드의 생활은 작전의 수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작가가 묘사하는 냉전시대 베를린의 모습

역사와 허구를 뒤섞는 히스토리 팩션(Fact+Fiction)답게 <이노센트>에는 실존인물과 가상인물, 실제있었던 사건과 상상속의 일이 공존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작전도 그렇지만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인물들이다.

'베를린 터널' 작전을 위해서 영국과 미국이 손을 잡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좋아하지도 않고 믿는 것 같지도 않다. 영국인은 미국인을 가리켜서 '뭐 하나 아는 것도 없으면서 배우려고도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라고 비난한다.

반면에 미국인은 영국인을 보고 '영국놈들은 신사인 척하기 바빠서 일을 안해, 그 멍청한 XX들'이라고 욕한다. 하긴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니까 이렇게 서로 경계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베를린 터널 작전이 혹시 실패로 돌아간다면 끝내 마음을 합치지 못했던 영국과 미국 모두의 책임이 될 것이다.

작품 속의 사건으로부터 약 5년 뒤에 베를린 장벽이 생긴다. 그 장벽이 있건 없건,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오고 간다. 한때는 냉전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흔적만 남은 베를린 장벽. 작품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그 장벽을 묵묵히 바라본다. <이노센트>는 냉전 자체보다도, 뜻하지 않게 거기에 휘말린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 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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