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이 다큐멘터리는 답한다...'왜 인문학인가?'

[TV리뷰] KBS '세상을 바꾸는 생각 후마니타스', 이 시대 인문학을 들여다 보다

등록|2014.12.06 11:09 수정|2014.12.06 11:11
'학력이 뭐 대단한 건가, 진실하게 살면 되지 / 인생,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구나!'

이 시는 불과 2년 전 처음 한글을 배운 68세 오승주씨가 쓴 시다. 오승주씨는 시를 쓰면서 마음의 그림자를 옮겨 적었고, 고단한 인생이나 원망스러웠던 과거와 비로소 이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인생에 자신감이 생겼고, 그 어느 때보다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조차 한글을 모르는 걸 숨겼던 오승주씨를 변화시켰을까? 바로 '인문학'이다. 라틴어로 후마니타스(humanitas),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KBS 1TV에서 12월 2일부터 4일까지 총 3부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세상을 바꾸는 생각 후마니타스>는 이 시대 인문학의 존재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시골 구석에서부터 세계 곳곳까지, '인문학'의 자취 따라갔더니

▲ KBS 1TV 다큐멘터리 <세상을 바꾸는 생각 후마니타스> 스틸컷 ⓒ KBS


1부 '우리 동네 소크라테스'는 경북 칠곡군의 작은 마을 학상리와 어로1리의 인문학적 변화를 다큐에 담는다. 2004년 '평생 학습 도시'로 지정된 칠곡군의 정책에 따라, 칠곡군의 마을들은 각 마을 별 특색을 살려 '인문학적' 학습들을 지속해 왔다. 그 결과 '기적'이라 할만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흔히 마을 회관이나 노인정이라고 하면 노인들이 모여 낮이면 심심풀이 화투나 치는 곳으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 학상리의 마을 회관은 '카페'가 되었다. 어로1리는 '학당'이다. 이곳에서 60대 이상의 주민들은 글을 배우고, 시를 짓고, 연극을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고달팠던 인생을 진솔하게 되돌아 보고,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8살에 식모살이를 시작했던 72세 박정숙씨는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 없는' 인문학을 배우면서, 그 자신이 궁금해졌다고 한다. '마을 해설사'란 새로운 직업도 얻었다. 여전히 '도서관'을 드나들며,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명랑 소녀 성공기'란 시집에 담긴 그의 인생은 고난과 역경이 아니라, 자부심의 결정체다. 인문학이 없었다면 도달할 수 없는 결과물이다.

2부 '인문학으로 상상하다'에서는 우리 사회 각 분야 인사들의 '인문학'을 다룬다. 샤워기 제조업체 류인식 대표는 시간이 나면 경기도 도자 박물관을 찾아 이제는 너무 봐서 낡은 해설서를 보며 전시물을 감상한다. 매주 월요일 서른 명 남짓의 직원을 모아놓고 시을 읽고 인문 공부를 한다. 그런가 하면 매주 수요일 CEO를 위한 인문학 교실도 거르지 않는다.

사무실 한 켠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낡은 시집이 보여주듯, 인문학에 대한 그의 애정은 사업에 대한 그와 그의 직원들의 생각을 전향적으로 변화시켰다. 덕분에 샤워기라는 단일 품목을 생산하는 이 업체는 독특한 디자인과 다양한 성능을 구비한 샤워기로, 1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렸다.

▲ KBS 1TV 다큐멘터리 <세상을 바꾸는 생각 후마니타스> 스틸컷 ⓒ KBS


컬럼비아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가수 박정현의 인문학 사랑도 여전하다. 일찍이 <빨강머리 앤>으로 부터 시작된 영문학에 대한 사랑은 손때가 묻은 톨킨의 저서로 이어졌고, 친구들과의 독서모임으로 이어졌다. 이는 팬클럽의 '박정현이 읽으면 우리도 읽는다'라는 취지의 '박정현 북클럽' 탄생을 낳는다. 그에게 '문학에 대한 사랑'은 거창한 영감이라기 보다는, 익숙한 삶의 일부분이자 늘 내면을 자극하는 상상력이다.

실크로드를 떠돌며 변경의 삶을 다룬 사진 작가 이상엽은 말한다. '사진은 찍는 사진기와 기술에 따라 더 잘 찍을 수는 있지만, 그 핵심은 대상을 잘 알고 모르는가에 따라 차이를 가진다'고. 그래서 이상엽은 자신이 찍는 피사체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 등 인문학을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 3부 '인문학의 놀이터'는 인문학을 잉태해 내는 여러 도서관과 인문학 모임을 살핀다.  한국의 도서관 이용률은 다른 OECD 회원국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편이다. 사느라 바쁘고, 이용 필요성을 구태여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통계로 드러난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택한 이유도 대부분 공부를 위해서다. 하지만 도서관은 입시나 취업 준비를 하는 곳이 아니다. 우리 삶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주는 곳, 그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다큐멘터리는 세계 각국의 특색있는 도서관을 찾아본다. 핀란드의 도서관은 어릴 때부터 예술 교육을 담당하고, '시 생성기'등 재미있는 신세계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실업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된 영국의 도서관에서는 실업자들에게 필요한 지식은 물론, 그들을 위한 각종 취업 정보도 전해준다. 그런가 하면 이제 막 걸음마을 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매개로 한 각종 노래와 게임을 통해, 책에 친숙해 지도록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쇠락해 가는 도시 스코틀랜드의 부흥을 이룬 근거지는, 바로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도서관이다. 경북 영주의 공공 도서관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고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 그 어느 곳이던 마다치 않는다. 또 알랭 드 보통 등이 만든 '인생 학교'에서는, 상대방에게 거절하는 법 등 삶에 구체적으로 필요한 인문학 강좌를 연다. 길담서원에서는 클래식 강좌에서부터, 사람들이 배우고자 하는 그 무엇이든 '배움의 대상'이 된다.

삶의 의미를 더해 줄 인문학은 필요하지만, '유행'이어서는 곤란하다

▲ KBS 1TV 다큐멘터리 <세상을 바꾸는 생각 후마니타스> 스틸컷 ⓒ KBS


이렇게 시골 구석부터 해외 여러 곳을 누비며 찾아다닌 '인문학'의 흔적을 통해 다큐멘터리가 모색하고자 하는 것은 '왜 인문학일까?' 하는 것이다. 식당을 하는 주부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소설 책을 읽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픈 남편과 생활고에 힘들었던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이 '인문학'이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접한 할머니는 말한다. 먹고 사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 없는' 인문학으로 인해 '삶의 내면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고. 그러면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을 힘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행복하다고도. 사진작가 이상엽은 인문학을 '사람답게 사는 삶에 대한 욕망과 갈망'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인문학을 통해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 사람들이 모여, 쇠락해 가던 도시와 마을이 새로운 이름을 찾아 간다.

다큐를 통해 본 '인문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보통의 주민들이 시를 짓고, 연극을 한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노래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기왕이면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인문학이 가미된 사업은 헌 옷을 사용해 '패션'을 만들고 거리로 나선 학자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알린다. 공익을 위한 건축물에 광고를 곁들여 사업이 되기도 한다. '사람 사는 재미'가 바로 인문학인 것이다.

물론, 인문학에 대한 극찬만이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일찍이 자신의 건축에 인문학적 사고를 결합해 온 건축가 승효상은 '열풍'과 '트렌드'가 된 인문학을 경고한다. 상업화된 인문학, 속물화된 인문학을 경계한다. 삶의 의미를 충만하게 해 줄 인문학은 필요하지만, '유행'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안타까워 한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건 인문학이 '유행'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책을 사거나 읽을 시간도 없는, 그리고 제 값 받고 책을 팔기 힘든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인문학 열풍'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드라마가 끝나고 예능이 끝난 후인 늦은 오후 11시 40분이나 되어야 볼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래서야, 인문학의 '人'자나 제대로 향유해 보겠는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