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일제강점기 독립군 이야기를 쓰는가?
[박도 실록소설 '들꽃'] 연재에 부치는 글
▲ 용담꽃으로 꽃말은 '정의' '애수' 또는 '슬픈 그대가 좋아'다.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독립군 이야기
나는 이 겨울 일제강점기 독립군 이야기를 쓰고 있다. 어린시절의 오랜 꿈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애주가셨다. 그래서 나는 주전자를 들고 이웃 공씨 술도가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오는 술심부름을 자주했다.
내가 주전자를 들고 그 집 대문에 들어서면 공씨 할아버지는 반갑게 맞았다.
"뚜야 왔냐?"
그런데 공씨 할머니는 인사에 앞서 앞치마로 눈물부터 닦았다. 이따금 술을 거르는 동안 그 집 마루에 앉았으면 할아버지는 만주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후일에서야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공씨 할아버지가 하필이면 내 이름 '도'를 "뚜"라고 발음한 것은 중국식 발음이요, 할머니가 나만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신 손자가 나와 동갑인데, 그 손자를 6·25 전쟁 때 잃었고, 당신 아들마저 그 이전 해방공간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수군대는 말로는 그 아들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했다. 또, 할아버지는 약주를 드시면서 진짜 애국자는 국난 때 나라를 구하는 이라고, 눈보라 속에 신출귀몰한 만주 독립군 얘기를 하셨다.
아마도 그때부터 추운 겨울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군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새겨진 모양이다.
글 감옥
나는 지난 10월 5일부터 <오마이뉴스>에 실록소설 '들꽃'을 연재하고 있다. 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지인 몇 분에게 "스스로 글 감옥에 갇히고자 실록소설 '들꽃'을 연재한다"는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사실 작가에게 한 매체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은 기쁨이요, 동시에 괴로움이다. 나는 그동안 월간, 주간 등의 연재를 해 보았다. 아무튼 월간은 한 달 내도록, 주간은 일주일 내도록 글 감옥에 갇힌 기분이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 좋은 글감을 만나 술술 잘 쓰일 때는 더 없이 기쁘지만, 그 반대일 때의 괴로움은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흔히들 창작을 '피 말리는 작업'이라고 하나보다.
글이 술술 써지지 않을 때는 벼랑에 선 심정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빈 센트 반 고흐가 권총 자살한 근본 이유도 글이,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이 작품 '들꽃'의 글감을 15년 전인 1999년에 찾았다. 그해 여름 8월 1일부터 11일까지 한 독지가(이영기 변호사)의 후원으로 독립지사 후손 이항증(석주 이상룡 선생 증손) 선생과 김중생(일송 김동삼 선생 손자) 선생과 함께 중국 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1999년 8월 4일 오전, 동포 서명훈 사학자의 안내로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을 답사했다. 다시 서 선생의 안내로 안 의사가 한동안 구금된 옛 일본총영사관으로 갔다. 그 무렵 싸구려 여인숙(지금은 화원소학교)으로 변한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방을 둘러본 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동북열사기념관이었다.
▲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 ⓒ 박도
동북열사기념관
동북열사기념관은 중국 동북 헤이룽장성 일대에서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 관동군 및 위만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항일열사 100여 분의 유물과 영정, 모형들을 진열한 곳이었다. 서명훈 선생은 거기 모셔진 열사 가운데 허형식, 양림, 리추악, 리홍광, 박진우, 차순덕 등 32분이 조선족 열사들로, 기념관에 모셔진 동북항일 열사 중 삼분의일이나 된다고 했다. 그때 동행한 이항증 선생은 나에게 부연 말씀을 했다.
"허형식(許亨植) 열사는 박 선생 고향 분이에요."
"네?"
나는 깜짝 놀랐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 허형식이란 인물을 몰랐다.
"허형식 열사는 임은동 태생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상모동과는 철길 사이로 이웃 동네지요."
"네에?"
이 선생은 나를 두 번 놀라게 했다. 이 선생의 어머니는 허은 여사로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녀였다. 내가 어찌 구미 임은동과 상모동을 모르겠는가? 두 마을은 같은 금오산 자락으로, 밤마실을 다니는, 부르면 대답할 거리다.
순수한 독립전사
대부분 작가들은 유년시절 이야기나 고향이야기를 평생 우려먹으며 산다. 그래서 나는 젊은 날 고향 출신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를 쓰다가 아버지한테 충고를 받았다. 예로부터 살아있는 인물은 함부로 글로 쓰지 않는다는 말씀과, 그분은 만주군 출신이라는 점 등을 부적절한 예로 드시면서 좀 더 의로운 인물을 찾아 먼저 그런 분 얘기부터 쓰라고 말씀하셨다.
▲ 헤이룽장성 경성현 청봉령에 있는 허형식 희생비를 찾아간 필자(2000년 8월) ⓒ 박도
더욱이 대학도서관에서 찾은 동북아 장세윤 연구위원의 <허형식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읽었다.
"1940년대 초 동북항일연군 지도자(김일성·최용건·김책 등)들은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해 러시아로 월경했다. 그러나 허형식 장군은 한 번도 국경을 넘나든 적이 없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만주 땅을 지키다가 위만 토벌군에 장렬히 산화했다.
그는 그 어느 독립전사보다 순수하고 투쟁정신이 앞섰다. 그런 분들의 희생으로 동북의 조선족들은 중국 해방 후, 땅과 자치권을 얻을 수 있었다."
두 여인
▲ 허로자 할머니. 그의 아버지가 구미에서 일제 등쌀에 쫓겨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 1936년 10세 때 스탈린의 강제추방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84세 처녀할머니가 되어 2009년 고국에 돌아왔다. ⓒ 박도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언저리 사람들에게 부끄러웠다. 그런 가운데 세계 여기저기에서 부평초처럼 떠도는 임은 허씨 후손들을 만났다. 그들 중 일부는 친지들의 도움으로 고국으로 귀화는 했지만, 고국에서 생계대책이 없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시 중앙아시아로, 러시아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 한 모임에서 만난 왕산 선생 손녀의 초라한 모습은 나에게 다시 붓을 잡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마이뉴스> 연재라는 배수진을 치고 시작했다. 45회 정도를 목표로 현재 19회 연재를 마쳤다. 이번만은 끝까지 쓰고자 독한 마음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이즈음 나는 두 여인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웃 마을에서 만주로 간 두 집안 딸들의 오늘 사는 모습이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극명하다. 한 사람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만주로, 연해주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유랑하다가 2010년 귀화하여 구로동에서 생활보호대상자로 살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전 청와대 위민관 영상국무회의실에서 열린 청와대-세종청사 간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산 사람뿐 아니라 죽은 이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은 동작동 가장 높은 곳에 묻혔고, 다른 한 사람은 북만주 외진 산골에서 위만군의 총탄에 쓰러진 뒤 목은 효수되고, 나머지 시신은 짐승에 의해 훼손된 뒤 뼈만 수습돼 그 자리에 초라한 희생비만 남아 있다.
나는 2000년 조촐한 그 희생비를 찾아가 들꽃을 바쳤다. 더불어 그분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게 최소한의 작가적 양심으로 여기며 이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역사가들은 승자의 기록을 중시할지라도 작가는 패자의, 땅에 묻힌 양심을 되살리는 게 그 소명일 것이다. 내 부족한 점은 후일 누군가 메워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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