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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처단에 젊음 바친 독립투사 박희광

금오산 자락 박희광 애국지사의 동상을 보다

등록|2014.12.11 15:20 수정|2014.12.11 15:21

금오산 아래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 동상 조형물에 쓰여있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다 바친 위대한 투사의 생애를 확인할 수 있다. ⓒ 김도형


금오산 주진입로에 들어서면 금오산을 바라보고 있는 백운교 옆 한 남자의 동상을 보게 된다.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의 동상이다.

사실, 지난해 까지는 금오산을 오며가며 박희광 애국지사의 동상을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동상의 주인공이 구미출신의 독립투사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리어 태어난 고향이 구미인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기린 동상이려니 막연히 생각해 왔다.

지난해 11월 박희광 애국지사와 한 집안인 구미시 봉곡동 박세진 시의원은 '항일독립투사 박희광 선생 동상 옆 일본향나무 교체에 관한 청원서'를 구미시의회에 제출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구미지역 문화창작집단 '공터다'에서는 '그 남자의 자서전'이란 제목의 박희광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작품화해 구미시민들에게 박희광 애국지사의 업적을 알리기도 했다.

어디에서나 있을법한 동상이려니 하며 별다른 의미로 와닿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한 날 독립투사 박희광 선생 동상의 주변에 새겨진 그의 업적과 연보들을 유심히 살펴 보게 된 이후로 위대한 독립투사의 일대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상 아래에 있는 엄지를 편듯한 조형물에는 박희광 애국지사의 업적이 기록되 있다. . ⓒ 김도형


대다수의 독립투사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인들에게 숱한 고문과 박해 속에 목숨을 잃거나 끔찍한 옥고를 치렀다.

동상의 아래에 새겨진 박희광 선생의 업적과 더불어 인터넷을 통해 박희광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옥고를 치루며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힘겨운 삶을 살아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부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그의 업적이 밝혀져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하 박희광 의사로 지칭한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1968년도 사진 . . ⓒ 박희광 의사 기념사업회


박희광 의사는 1901년 2월 15일 현재 지명인 구미시 봉곡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으로 경주 부윤 수홍공의 11세손이자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항일 의병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 부친 박부윤을 따라 1912년도에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만주 봉천성에 있는 남성자학교를 졸업 후 조선 독립의 의지를 다지며 18세 되던 해인 1922년도에 만주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에 자진 입대, 특공대원으로서 항일의거와 암살 대원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대한통의부 제5중대에 배치되어 약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마친 뒤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만철연선과 한만 국경지대에 잠복하여 관동군 진로 봉쇄작전에 최초 투입된다. '만철'이란 당시 일제가 만든 남만주 철도 주식회의 명칭이며 연선은 철길을 의미한다.

이후 박희광 의사는 암살과 테러에 필요한 승마와 수영, 사격, 폭탄제조법, 독침, 변장술 등의 교육을 받고 신분을 감춘채 대한통의부의 암살전문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요즘 흔히 거론되는 북파공작원(HID 특수임무수행자)의 훈련처럼 정신력과 육체가 고도로 단련된 요원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가 있다.

1924년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등은 3인조 암살 특공대를 결성하여 임시정부로 부터 만철연선의 친일파를 토벌하라는 특명을 받고 숙청 작업을 하였다. 1924년 6월 1일에 윤영기 동지의 안내를 받아 무순방면의 고등계 찹자로 활동하며 여순조선인회 서기였던 악질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현장에서 사살하였다.

친일파 처단 3인조 암살특공대를 상징하는 조형물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등 젊은 의혈남아들은 초개와 같이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 김도형


이 때 암살 현장의 대문에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라고 사형선고문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보민회 습격, 친일파 거두 최정규 암살 시도,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 배정자(다야마 사타코) 암살 시도,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이용구 암살 시도 등 친일파를 한겨울에 사시나무 떨듯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 활동을 해오다 1924년 7월 22일, 봉천 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과 함께 그날 저녁 일본고관들이 드나드는 금정관을 침입해 군자금 탈취 과정 중 격렬한 총격전 끝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때 3인조 암살특공대의 한 분인 김광추 의사는 순국하셨다.  

체포된 박희광 의사와 김병현 의사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킬 정도의 혹독한 고문으로 수차례 기절하면서도 조직과 조직원 및 그동안의 활동상 등의 비밀을 지켜냈고, 이로 인해 함께 체포되었던 거사의 공범인 조직원 윤영기와 조선일보 봉천성 기자 신명구가 풀려나게 되었다.

이들의 결연했던 의지는 "모든 책임은 우리 세 사람에게 있소. 오직 조국을 위한 일념으로 그 일을 했을 뿐 배후는 없소"라고 말했던 사실이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기록에 남아 있다.

박희광 의사는 1924년 대련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27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일본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에 감형을 받아 20년 세월을 복역한 뒤 1943년 43세의 나이로 출옥했다.

젊은 시절 오로지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웠던 대가로 인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모두 보내버린 박희광 의사의 삶이 참으로 서글프고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출옥후에 그는 1945년 만주에서 광복을 맞이했고 백범 김구 선생과 측근들을 암살로 부터 보호하는 활동을 했지만 백범이 안두희에게 암살 당한 뒤 모든 것을 접고 칠곡군 왜관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문화유씨와 가정을 꾸리며 형무소에서 배운 기술로 양복점을 운영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쉬는 날이 많아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고를 겪었다.

다행히 박희광 애국지사는 정부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신문기사와 여러 증거 자료들이 모아짐으로서 행적이 증명되었고, 1968년 3월 1일 삼일절 행사 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게 되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업적이 상세히 기록된 동아일보 기사 1925년도의 기사며 8회에 걸쳐 연속으로 보도되었다고 한다. ⓒ 박희광 의사 기념사업회


그로부터 2년 뒤 1970년 1월 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보훈병원에서 조국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구국애족의 삶을 마감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자 묘원에 안장되어 있으며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박정용(64세)씨는 현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한편 구미마라톤클럽의 같은 회원이기도 한 매일신문 전병용 기자에 의해 2013년 10월 12일 추모관 건립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지만 그로인해 박희광 애국지사의 구국정신과 나라사랑의 뜻을 알리고자하는 기념사업회의 의지가 만방에 알려지는 계기도 되었다.

구미 금오산에 있는 동상은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이라는 친필휘호를 써서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건립하지 못하다가 1983년 9월 5일 구미문화원에서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시보조금, 시민성금, 문화원 이사와 유족측에서 비용을 모아 1984년 12월 28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금년 3월 1일 열린 박희광 애국지사 추모식 현장 구미에서는 3월 1일과 8월 15일 일년에 두번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 박희광 의사 기념사업회


이처럼 목숨을 다 바쳐 이 나라를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업적은 늘 되새겨야만 할진데, 아직까지도 사회 곳곳에 잔존해 있는 친일세력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

지난 4일 한국의 한 복판인 서울 그랜드하야트 호텔에서 일본 국왕의 생일파티가 열렸다. 일본국와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는 한국인 차량들에 대해 한 여인은 욕을 퍼부어 이슈가 되었지만 친일 성향을 가진 자들은 이에 아랑곳 않고 떳떳이 파티 현장을 오갔다.

대한민국의 실체는 독립투사들과 6.25 참전 용사들의 피와 숭고한 희생으로 이룩되어졌다는 말이 가슴 뭉클하게 와닿는다.

자라나는 새싹들과 나이 어린 후손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과거에 어떤 시련과 고난을 딛고 지금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뿐만아니라 역사 교과서에서 아무리 우리의 한국사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독립운동은 과거속의 사건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 현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뜨거운 애국심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의 부재가 안타깝다.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들의 웅대한 기상이 사라져 가는 오늘날,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비록 친일파 후손들에 비해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없을지라도 그들이 어디에서나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선친들의 고결했던 정신과 마음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 한일합방 이후 우리 민족이 겪었던 과거 일제시대의 잔제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민족의 얼을 되새기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만 할 시대적 사명이다.

금오산을 바라보며 늘 한자리에 서 있는 박희광 애국지사의 동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가의 치열했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구미마라톤클럽 회원들에게 박희광 선생을 알리며 기념사진 촬영.일요일 아침마다 금오산을 달리는 구미마라톤클럽 회원들에게 이따금씩 박희광 선생이 누구인지 아냐고 물어본다. ⓒ 김도형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유통신문>과 <한국유통신문>의 카페와 블로그에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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