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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청산' 위해 홍길동이 등장한다면?

[서평] 독립운동가 자손 변재환 유작 소설 <비상도>

등록|2014.12.24 16:23 수정|2014.12.24 16:23

▲ 변재환 의협소설 <비상도> 겉 표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의협소설이 도대체 뭐야? 변재환이 쓴 <비상도>라는 낯선 제목의 책을 처음 받았을 때 가장 먼저 품었던 의문입니다. 듣보잡 작가에 듣보잡 제목의 소설책이었는데다 '의협소설'이라는 수사도 약간 싸구려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두어 달 전 블로거 모임에서 선물로 받은 책이었는데 평생 교육운동을 해오신 김용택 선생님이 "무협지보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저도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현실보다 통쾌한 내용입니다"하는 소감을 이야기 해주지 않았으면 펼쳐보지도 않았을 책입니다.

김용택 선생님이 좋은 평가를 해주셨는데도 한 달 이상 책상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다보니 저 역시 무협지보다 재미있고 현실보다 통쾌하다는 평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저자가 말하는 의협소설은 '홍길동', '임꺽정' 같은 그런 소설입니다.  소설의 제목 <비상도>는 홍길동, 임꺽정 같은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인 친일청산...비뚤어진 역사

비상도의 어린시절 이름은 동해였으나 독립운동가의 자손인 스승에게 비상권법을 전수 받은 후 '비상도'가 됩니다. 어린 시절 우연히 길을 잃고 정토 스님의 손에 길러진 비상도(동해)에게는 암자에서 함께 자라며 친형제처럼 지내던 세 살 위 남재라는 형이 있었는데, 그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입니다. 

"형의 조부는 독립운동가로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난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배움의 기회를 잃은 탓에 해방 후 노동판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오다 오래 전에 폐병으로 고인이 되었다. 작은 아버지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백구하라는 이름만 남았을 뿐 행방을 감춘지 오래 되어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본문 중에서)

비상도의 스승이었던 정토 스님 역시 상해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부친을 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었습니다. 정토 스님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 이후 기세가 올랐던 임정의 노력으로 중국 왕가에 전하는 '비상권법'을 전수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지요.

가야산 인근에 터를 잡은 정토 스님은 마을 황소가 눈을 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고 미쳐 날 뛸 때 단번에 제압하는 절정의 무예를 선보입니다. '비상권법'은 원래 고려의 무예였으나 조선왕조가 들어선 후 박해를 받아 청나라로 도피하여 중국에서 전해내려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소설의 배경이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비상도>를 쓴 저자 변재환이 실제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2013년 1월 9일 작고한 저자는 <비상도>를 유작으로 남겼으며, 그의 할아버지 변상태는 3.1운동 당시 경남지역 책임자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일왕 암살 계획을 세우고 일본으로 건너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아버지 변지섭이 남긴 <경남독립운동소사>는 한국독립운동 역사의 일부를 정리한 중요한 사료라고 합니다. 저자가 유작으로 남긴 원고는 그의 친형인 청강 스님의 손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출판사를 만나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남긴 유작 소설 '비상도'

아무튼 무협지 같은 얼개를 가진 이 소설에 따르면 '비상도'는 조선 건국 이후 한반도에서는 맥이 끊긴 고려왕실 무예 '비상권법'을 600년 만에 이어 받은 적통자입니다. 비상권법은 급소를 타격하는 공격으로 일격에 미친 황소도 쓰러뜨리는 엄청난 무술입니다. 

비상권법은 인명살상은 금기하지만 혈(급소)을 공격하여 상대를 일시에 무력화시키고 제압하는 권법입니다. 바람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지만 순간적인 빠른 공격으로 상대를 일시적으로 기진하게 하는 비살생 권법이기도 합니다.

"비상권법의 요체는 사람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물론 사람을 단숨에 절명시킬 수 있는 가공할 무예지만 그 요체는 인체에 두루 퍼져 있는 급소를 일거에 제압하여 상대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하는데 있다. 인체에는 700여 군데의 급소가 있다. 흔히 혈 또는 경혈이라 하는 곳으로 대개 그중 70여 군데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본문 중에서)

비상도는 10년 이상 수련 과정을 거쳐 스승에게 비상권법을 전수 받습니다. 스승이 떠난 후에도 암자를 지키던 비상도는 군대에서 폭발사고로 장애인이 된 남재형과 재회합니다. 하지만 암자에서 함께 지내던 남재형은 큰 스님의 가족사를 말해주고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지뢰를 밟아 장애인이 된 줄 알았던 남재형은 불만을 가진 신참병이 막사 안에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내다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사실은 유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당연히 국가유공자가 되어야 할 형은 부대가 사건을 단순사고로 처리하는 바람에 군으로부터 버림 받게 되었던 것이지요.

미친 황소도 일격에 쓰러뜨리는 '비상권법'

비상도는 형과 스승이 떠난 후에 친일파와 매국노들을 단죄하는 일에 나섭니다. 친일파 척결을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스승인 큰스님 가족을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친일 형사 조운태의 아들에게 사과를 받는 일입니다.

"애국자로 둔갑한 그는(조운태) 경찰 요직을 두루 거치며 재산을 불렸다. 그의 외아들인 조천수는 아비의 후광으로 장관까지 지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가난을 대물림하며 고단하게 살 때에도 조씨 부자는 대를 이어 부와 권세를 누렸다." (본문 중에서)

친일파 조운태는 죽고 없지만 그의 아들인 조천수를 만나 부친의 친일 행위를 사죄 받겠다며 비상도는 나섭니다. 조천수는 쉽사리 비상도를 만나주지 않았지만, 그가 고용한 조직폭력배 50여 명을 한자리에서 해치웠다는 언론 보도가 터져나오자 만남을 피하지 못합니다.

비상도와 조천수가 주고 받는 이야기를 보면 일제강점기 친일파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친일 행위를 어떻게 변명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회장님의 선친께서 그 분의 어른을 고문하여 옥사시킨 사실을 알고 계실 텐데요?"
"그럴 리가 있는가? 동포들끼리..."

"선친이 일제강점기 형사였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직업이었지."

"독립투사를 잡아 고문하고 죽인 것도 직업이오?"
"나는 모르는 일이네.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보네. 당사자가 죽으면 그 죄 또한 없어지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그분의 선친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모든 것을 잃은 분이고, 회장님의 선친은 그분들이 흘린 피 위에서 권력과 부를 틀어쥔 사람입니다. 선친이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면 응당 그 자식된 자가 선친의 잘못에 용서를 구해야겠지요."

"꼭 못난 자들이 과거 운운하며 남이 애써 모은 재산을 시샘하고 공짜로 얻어먹으려 달려드는 법이지."

사과를 받기는커녕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억지논리에 상처만 깊어지게 됩니다. 결국 비상도는 '비상권법'을 펼쳐 혈자리를 공격하여 조천수가 병원신세를 지게 합니다. 동시에 언론을 통해 이 일이 알려지도록 만들어 조천수와 그 가문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폭로해 버립니다. 

친일 행위 폭로는 명예훼손이 아니다

비상도의 무예 솜씨가 알려질수록 비슷한 방식으로 친일파들을 혼내는 일은 점점 더 쉬워집니다. 비상도는 친일파의 자손인 국회의원 김백일도 단죄합니다. 대표적인 친일파의 아들인 김백일은 국회 국방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아들은 병역 회피를 위해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이중국적자입니다. 

김백일 가문의 친일행적을 폭로한 비상도는 명예훼손 재판에 불려나가서 안중근 의사 어머니가 남겼다는 일화를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에게 들려줍니다.

"아들의 사형 확정 소식을 들은 안 의사의 어머니는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다.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면서 항소를 한다면 남들이 살고자 몸부림친다고 비웃을 것이니 당당하게 처신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에 격려를 받은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의연하게 사형을 당한 것이지요."(본문 중에서)

저자는 비상도가 친일파들을 단죄하고 국익을 해치면서 국내 기업의 최신 기술 정보를 팔아먹는 신매국노들을 처단하는 이야기를 통해 반민특위의 와해와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자손들이 겪고 있는 안타깝고도 비참한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아울러 신매국노들이 일본 극우세력들에게 포섭되어 놀아나고 있다는 설정을 통해 우익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국사교육 폐지와 관련있는 정치인들이나 폭력조직인 일진회 등의 배후에 일본 극우파가 있다는 소설적 설정입니다만, 전혀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진회를 조종했던 배후가 일본의 극우단체 흑룡회였습니다. 우치다 료헤이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지요." (본문 중에서)

소설의 설정은 흑룡회 혹은 흑룡회와 유사한 단체가 한국 아이들에게 퍼져있는 '일진회'라는 폭력조직의 배후라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런 주장들에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적 상상력으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진회보다 심각한 '일베'의 배후는?

다만 저자가 주목한 일진회라는 청소년 폭력조직보다 오늘날 인터넷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테러 활동까지 벌이는 '일베' 같은 모임이 더 위험해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와 같은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일베' 뒤에는 어떤 배후 세력이 숨어있을지 더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비상도>는 친일 청산이라는 실타래처럼 꼬인 역사를 홍길동, 임꺽정 같은 의인을 등장시켜 해결한다는 상상을 그려낸 소설에 불과합니다. 가공할 무예를 지닌 비상도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현실에서 풀지 못한 친일파 처단과 친일 청산에 나서는 '통쾌한' 이야기입니다.

아울러 비현실적인 소설적 활약을 통해 독자들에게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부터 비롯된 우리사회의 온갖 부정과 비리 그리고 부정의한 세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소설적 재미를 위해 비상도의 연애이야기나 젊은 친구들이 '썸 타는'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또 소설에는 주인공 비상도의 기구한 운명과 출생의 비밀도 그려집니다. 기구한 나라의 운명처럼 그 나라 사람들의 운명도 누구하나 순탄하지 않지요. 비상도의 기구한 운명과 출생의 비밀은 책을 직접 읽을 독자를 위해 비밀로 남겨둡니다.

친일파 후손들이 빼앗긴 재산을 되찾으려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혹은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이 여전이 어렵고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대체 '나라'는, '정부'는 뭘하는 걸까 하고 울분을 삼켰던 독자들을 위로하는 소설입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울분이 일었다가 통쾌하게 해소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끝내 안타까운 것은 현실에는 '비상도'와 같은 걸출한 영웅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남긴 유작 <비상도>를 통해 매국노와 그 자손들의 삶에 대한 분노와 독립운동와 그 자손들이 품었을 울분에 공감해 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포스팅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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