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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 안 입어"... 알몸이 된 남자 1만 2천명

[전쟁포로 11] 비극의 시작 76 포로수용소

등록|2015.01.06 08:16 수정|2015.01.06 08:16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 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 말

▲ 포로들의 급식을 만드는 거제수용소의 취사장 모습 ⓒ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나는 가끔 보급소에 가 일하면서 중공군이 일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네들이 일하는 모습에 놀랐다. 중공군은 도리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사상 교육이 확고해선지 몰라도 농땡이를 피우거나 물건을 도둑질 하지 않고 시키는 일을 꼬박꼬박하였다.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우리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과의 민족의 척도를 재는 데 재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족의 수준과 양심을 어떻게 볼까 생각하며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단체 행동에 순응해가는 것이 대륙 민족의 기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둑질을 하고 농땡이를 부리면서도 도리어 '이것이 요령이며 이것을 못하는 것이 바보이므로 나는 너보다 낫다'라며 양심의 뉘우침이 없는 동포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미군들은 보급소 일을 중공군이나 자신들이 직접 했지, 한국 사람에겐 잘 안 시켰다.

새벽 동이 튼 뒤에도 주변은 깜깜했지만, 일어나서 천막 내부와 주위 청소를 했다. 분대별로 인원 파악을 한 후 식사시간이 되면 식판을 들고 밥을 타러 광장에 나가 다섯 줄로 길게 늘어섰다. 그리고 차례차례 밥을 타가지고 자기 천막에 와서 밥을 먹었다. 

앞에 선 사람들은 "밥을 왜 조금씩 푸냐?"라고 하였고 또 남으면 "누구에게 주려고 하냐?"라며 욕을 했다. "밥을 많이 퍼! 많이!"라고 소리를 질러 밥을 조금이라도 많이 주면 "야! 아무개"라며 "밥을 잘 푸네, 잘 퍼"하고 칭찬하며 좋아했다.

맨 뒷줄에 선 사람들은 "밥을 조금씩 퍼줘라, 모자란다"며 야단이었다. 만약 밥을 퍼주다 모자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밥을 퍼주는 사람이나 줄을 섰다 밥이 모자라 먹지 못한 사람은 한 끼를 굶어야 했다. 배식하는 데만 한 시간 이상 걸렸다. 수용소에 있을 때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철조망 밖에 있는 중공군에게 '당신들도 배가 고프냐'고 물었더니 그들도 항상 배가 고플 정도의 배식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어딜 가든 총을 들고 따라다닌 군인들

밥을 먹고 나면 일동 점호를 했다. 다들 나와서 오열 종대로 앉았다가 구령에 맞춰 운동도 하고 행진 연습도 했다. 그리고 영내나 밖에서 일이 있으면 동원되었다. 수용소에서 먼저 500명, 1000명을 요구하면 그 수만큼 세어서 미군에게 인도하였다. 포로 인계가 끝나면 모두 50명씩 나누어 걸어갔는데, 총을 든 군인이 두 사람씩 따라다녔다. 그들은 우리가 어딜 가든지 옆에서 거총을 한 채로 따라 다녔다.

우린 병원 건축하는 데 쓰이는 돌을 산에서 주워 마대에 담아 어깨에 메고 걸어서 돌아왔다. 이렇게 오전에 10번 정도하면 오전 일과가 끝났다. 점심 때가 되면 모두 모여서 점심을 먹고 한 시간을 쉰 뒤 다시 오후 일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고 영내로 돌아오면 영내에서 다시 인원수를 센 뒤 인수인계하였다. 그 후 저녁밥을 먹었다.

밤이면 동료들끼리 모여 각자 자유 시간을 보냈다. 고향 얘기도 하고 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나 동료들이 죽은 이야기, 이북에서 살던 이야기 등등. 별별 이야기가 다 오갔다. 나는 황해도 사람과 평북 사람들과 매우 친해졌다. 철산과 선천, 정주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자유 시간이 지나 오후 10시가 되면 전부 고요히 꿈나라로 갔다.

어떤 날은 일이 없어 종일 영내에 있었는데, 그때는 앉아 노는 게 일이었다. 날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예수교를 전도하였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가서 성경 말씀도 듣고 찬송가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5월 하순이 됐고, 날은 몹시 더워졌다. 수용소 건설도 어느 정도 다 되어 갔고 부족했던 식수 공급 사정도 조금 나아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의정부 근방에서 시도했던 미군의 1, 2차 총공세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수만 명의 병력 손실만 보았다고 했다. 언젠가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맥아더 원수가 워싱턴 공항에 내릴 적에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를 받는 벽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맥아더가 있었으면 아마도 철원까지도 너끈히 밀고 올라갔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루는 똥통을 둘러메고 제방 둑에 있는 똥 버리는 장소에 가게 되었다. 드럼통 반을 자른 똥통에 철사로 끈을 만들어 묶고 막대기를 끼워 짝과 함께 나란히 어깨에 멨다. 똥이 7부 정도 찼기 때문에 짝과 발을 잘 맞추어 걸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한눈을 팔고 걸으면 똥이 출렁 넘쳤다. 똥이 넘치면 땅에 쏟아지고 옷에도 묻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했다.

다른 사람과 짝을 맞춰 걸어가는 건 매우 힘들었다. 나는 땀을 흘리며 간신히 2km 떨어진 제방 둑에 도착했다. 그곳에선 배가 똥을 싣고 있었다. 오전 9시께 출발했는데 수용소로 돌아오니 낮 12시가 다 되었다. 나는 그날 똥지게 일이 힘들어 아주 혼쭐이 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앞으로 될 수 있다면 똥통 메는 작업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미군이 나눠준 붉은색 옷 거부한 한국인들

▲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의 모습. ⓒ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그러던 중 휴전회담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유엔 소련 대표 말리크가 휴전 회담을 제의했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전쟁이 어떻게 되나 하고 결과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며칠 있으니까 미국 측에서 협상을 원산항 미주리함상에서 하자고 제의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소련 측에서는 개성에서 회담하자 제의했다고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개성서 휴전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을 때마다 과연 앞으로 회담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기대를 하면서 소식을 기다렸다.

하루는 76포로수용소 전원을 광장으로 모이라고 하더니 현재 입은 옷을 벗으라고 한 후 붉은 색 옷을 한 벌씩 주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주는 대로 빨간 옷을 입고 들어왔으나 나중에는 기분이 상했다. 어떤 사람이 먼저 "나는 이런 옷은 안 입어!"라고 소리 지르며 옷을 훌훌 벗어 마당에 내던졌다. 그러자 너도 나도 뒤질세라 붉은 색 옷을 다 벗어 던져 버렸다. 1만 2000명이 넘는 사람이 모두 옷을 벗어 던지니까 천막 밖에는 붉은 색 옷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다음날 미군들이 붉은 색 옷을 모두 실어갔다. 수용소 안에서 우리 모두가 속옷도 없이 알몸이 되어 홀딱 벗고 지냈다. 처음에는 볼썽사납고 흉측하여 다소 서먹서먹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전부 벗고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져 어색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들 나체가 된 서로를 보고 웃으며 "아프리카 깜둥이가 따로 있나"라며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러던 그날 오후였다. 모두 입을 옷을 줄줄이 찾았지만 아무 옷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반미 구호를 외치며 인민군 행진곡을 불렀다. '장백산 붉은 깃발' 등 온갖 군가가 쏟아져 나왔지만 철조망 밖에 있는 한국군 군인들은 개입을 못했고 단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들은 날마다 발가벗고 살았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하고 수용소 안에서 밥 먹고 노는 게 일이었다. 어떤 천막에서는 공산군 노래도 흘러나왔다. 중공군 포로들은 북한군 포로와 달리 발가벗지 않고 미군이 배급한 빨간 옷을 잘 입고 다니며 미군에 잘 순종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공군이나 인민군이나 같은 포로 처지인데 왜 우리는 빨간 옷을 입기 싫어하고 중공군은 왜 빨간 옷을 입고 좋아할까?'라고 생각하며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우리는 빨간 옷을 거부한 이래 옷이라곤 전혀 입지 않았으므로 날이 좋으나 비가 오나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몸 생활을 했다. 우리는 벌거벗은 몸을 바라보다 심심하면 서로 불알 잡기를 했다. 서로 "요이 땅!" 하면 재빨리 상대방의 고추나 불알을 먼저 잡으면 이기는 것이다. 나는 동작이 느려 먼저 잡히기 일쑤였다.

수용소로 꽉 찬 거제도 수월리 넓은 벌판

나는 이천군 동면에 사는 '윤아무개'라는 사람과 무척 친해졌는데 그는 치안 사업을 하다 남으로 월남하는 도중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산내면 수월리에 사는 나보다 초등학교 1년 후배인 김아무개와도 자주 만나 이야기하며 놀았다. 그는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사람과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은 직접 겪어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밤이면 철조망 밖에서 기도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에도 이 나라에서 전쟁이 빨리 끝나고 통일이 되어 그리운 부모 형제를 만나게 해달라고 힘을 모아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거제도는 여름 기후는 내륙 지방보다 덥지 않았다. 그 때는 1951년 7월이어서 논의 모내기도 마치고 보리농사도 이미 모두 끝냈다. 나는 농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길에 나는 풀, 나무, 산과 들에 있는 돌까지 고향 땅과 비교하곤 하였다. 

거제도 수월리 넓은 벌판은 어느새 수용소로 꽉 찼다. 수용소 밖에 있는 냇가에서 인부들이 돌로 제방을 쌓고 있었다. 이는 수용소에서 나오는 오수를 처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나는 이 때 사람이 싸는 오줌의 흐름에 놀랐다. 수용소에서 나오는 오줌이 큰 논도랑에 물 흘러가듯 꽉 차서 냇가로 흐르는 것을 보고 "사람의 오줌 양이 굉장하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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