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닭고기보다 비싼 채소... 여기 필리핀 맞나

[팔팔한 팔라완 기행 11] 평화로운 오지의 섬마을

등록|2015.01.08 21:27 수정|2015.01.08 21:27

▲ 니파야자 잎으로 지붕 이엉 만들기 ⓒ 강은경


"아얏!"

검지 끝이 따끔했다.

"강, 다쳤어요?"

핼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 아니... "

나는 도리질을 치며 활짝 웃었다. 작업을 그만 두라 할까 싶어, 거짓말을 했다. 왼손 검지 끝에 핏방울이 몽글 솟았다. 핼린이 눈치채지 않게 얼른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다. 일곱 살 그레이스가 커다란 눈망울을 또랑또랑 굴리며 앞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웃어 보이자, 아이는 수줍은 듯 얼굴을 외로 뺐다.

니파야자 잎으로 이엉을 엮는 중이었다. 깃 모양의 가늘고 긴 니파 잎을 접어, 가늘게 짼 대나무로 박음질하듯 니파 잎을 2미터쯤 이어 붙이는 작업. 지붕에 얹을 이엉이었다. 집주인 제인과 핼린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척척 니파 잎을 이어갔다. 난 아무래도 느렸다. 삐뚤빼뚤...

두 번째 장부턴 내가 만든 것도 그냥저냥 볼 만했다. 속도도 붙었다. 그러다가 뾰족한 대나무 끝으로 진초록 빳빳한 니파 잎을 찌른다는 게, 연분홍 말캉말캉한 내 손가락을 찌르고 말았다. 다행히 상처가 얕았다. 피 두어 방울 빨자 말짱해졌다.

이런 집에서 살면 삶이 '소풍' 같으려나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아침에 칼라윗 야생사파리 보호구역에 다녀온 후 잠깐 쉬고, 시작한 작업이었다. 밖의 공기는 열대의 태양열로 사정없이 달궈졌는데, 니파 헛(nipa hut. 필리핀 전통 오두막 집) 안은 더운지 모르겠다.

▲ 코코넛 야자나무 숲 가운데에 있는 제인의 집 ⓒ 강은경


▲ 니파 헛 오두막집 부엌 모습 ⓒ 강은경


니파 헛은 팔뚝 굵기만한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1미터쯤 공중에 띄워 대나무로 벽을 세우고, 대나무로 바닥을 깔았다. 얇은 대나무 바닥과 벽이 그물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통풍이 잘됐다. 지붕은 시원하고 튼튼한 니파야자 잎으로 덮었다.

건축 재료가 다 자연에서 취한 것들이었다. 비바람에 취약해 보였지만, 환경과 잘 어울렸다. 나중에 고스란히 흙으로 돌아갈 것들이었다. '이런 집에서 살면 '소풍'처럼 삶이 가볍고 단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는 부엌과 방과 거실로 나뉘어져 있었다. 외벽처럼 대나무쪽을 엮어서. 옷가지와 부엌용품 등 속의 살림살이가 아주 단출했다.

제인의 집은 코코넛 야자나무 숲 가운데 있었다. 해변에서 300여 미터 안쪽으로 들어간 자리에. 바랑가이(마을)에서 가장 크고 번듯해 보였다. 마당도 넓었다. 어젯밤 나는 이 집의 작은 방에서 잤다. 옷가지 몇 개가 벽에 걸려 있고 널빤지로 만든 침대가 있었다. 나는 잠깐 등잔불을 켰다가 껐다. 일찍 누웠다.

발치 위에 뚫린 창문을 통해 초승달과 별들이 숱하게 보였다. 오랫동안 뒤척이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중얼거리며. 혹, 유성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강은교의 '별똥별'도 주문처럼 읊었다.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

닭 우는 소리만 높았다. 염려했던 모기는 다행히 달려들지 않았다. 침대 모서리를 타고 바글바글 줄지어가던 개미가 신경 쓰였지만. 나는 야영을 할 때처럼 별과 눈 맞추며, 쉬이 잠들지 못했다.

오늘밤은 바닷가로 나가 별을 봐야지, 생각하며 니파야자 잎을 엮어갔다. 작업에 능숙해질만 하자 미셀과 메이아가 점심 먹자고 부엌에서 불렀다. 니파 잎을 내려놓고 핼린과 부엌으로 갔다.

밥과 구운 생선 한 토막. 그런데 삶은 게 한 마리가 내 접시에만 놓였다. 나는 얼른 그 손바닥만한 게를 네 쪽으로 찢었다. 세 아가씨들 밥 접시에 한 쪽씩 놓아 주었다. 다들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밥을 얻어먹고 있는 사람은 난데...

이곳 주민들이 나보다 정말 가난할까?

점심을 먹은 후 핼린이 동네를 돌자며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가무잡잡한 얼굴이 둥글고 통통한 핼린은 열여덟 살, 쾌활한 아가씨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이 섬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코론 시에서 한국 드라마를 텔레비전으로 몇 번 봤단다. 한국 남자들이 정말 멋있단다. 어제 저녁에는 배우고 싶은 한국말이 있다며 내 옆에 한참 붙어 있었다. 그녀는 내게서 종이와 볼펜을 빌려 한국어를 큐오논어로 받아 적었다. 여러 번 읽어가며 진지하게 발음을 수정했다.

'안녕하세요. 보고 싶어요. 내 사랑 어디 있어요? 사랑해요.'

핼린을 따라 바랑가이를 돌았다. 50여 가구, 가까운 친인척들이 모여 사는 '씨족마을'이라 핼린은 이집 저집 무람없이 들랑거렸다. 내게 경계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수줍음을 좀 탈뿐.

▲ 핼린의 사촌오빠와 아내, 아이들 ⓒ 강은경


▲ 핼린의 사촌오빠가 코코넛나무 위로 올라가 코코넛을 따다. ⓒ 강은경


핼린의 한 사촌오빠가 코코넛을 따준다고 하여 따라갔다. 사촌오빠의 아내랑 어린아이 둘도 같이. 사촌오빠는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벌겋게 그을린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가 근사했다. 그가 십수 미터 까마득하게 뻗어 오른 코코넛 나무를 척척척 타고 올라갔다. 와우! 탄성이 절로 터졌다. 그는 허리춤에서 긴 무쇠 칼을 빼 휘둘렀다. 쿵! 쿵! 코코넛이 지축을 흔들며 떨어졌다.

핼린이 단단한 코코넛 껍질을 무쇠 칼로 탁탁 베어냈다. 코코넛 꼭지 부분에 구멍을 냈다. 대나무 줄기를 잘라 빨대를 만들어 꽂아 주었다. 나는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즙을 단숨에 쪽쪽 빨아마셨다. 갈증이 가시는 게, 속이 좀 시원해졌다.

▲ 코코넛 ⓒ 강은경


날이 뜨거운 오후였다. 바닷바람이 간간이 불어오는데도,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제저녁에는 달랑 물 한 컵을 받아 얼굴을 씻고, 오늘은 아예 그것도 못했는데.

바랑가이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을 우물을 내려다보니 바닥이 깜깜하게 말랐다. 두 마지기쯤 되는 근처의 논바닥은 딱딱하게 굳었다. 여기저기 농작물을 가꿀 만한 땅은 많아 보이는데, 채소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어떤 채소가 이런 기후에 배겨내겠나. 타죽거나 녹아내릴 게다. 팔라완에선 채소가 비싸고 귀했다. 생선이나 돼지고기, 닭고기보다 더.

오지의 섬마을은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주민들의 표정은 조용하고 평온해 보였다. 가난이나 욕망, 불행에 찌든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숙명에 순응하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처럼.

특별히 빈둥거리는 사람도, 아득바득 일에 쫓겨 사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열대과일을 따고, 아이를 낳고... 오두막집을 보수하고, 물을 길어오고... 큰 아이들은 도시로 나가 상점이나 식당의 종업원이 되기도 했다. 자연에 기대 사는 이곳 주민들의 삶이 문명 속에 사는 나보다 정말 가난할까, 불행할까? 문득, 그런 질문이 일었다.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더위 탓인지, 코코넛 탓인지...

오두막집은 망고, 잭 푸르츠, 칼라만시, 파파야같은 열대과일나무 아래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었다. 집집마다 빨래가 널려 있는 마당에는 개, 닭, 돼지들이 돌아다녔다. 누렁개들은 짓지도 않고 조용히 어슬렁거렸다. 대신 닭들이 목청이 찢어지게 소리쳤다. 훌쩍, 홰에 올라타서는.

우리는 코코넛을 마시며 그늘에 앉아 노닥거렸다. 나는 더위 탓인지 코코넛 즙을 많이 마신 탓인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풍경과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꿈처럼 아련해질 시간들.

즙을 다 마신 코코넛 껍질을 핼린이 반으로 쪼갰다. 맨질 맨질 하얀 속살을 대나무 칼로 긁어먹었다. 고소하고 신선했다. 핼린이 또 젤리와 코코넛 과육을 섞어 샐러드를 한 그릇 만들었다.

"쿨리온 섬에도 갈 건가요?"

사촌오빠 아내인 싸라메이가 내게 물었다. 쿨리온은 팔라완의 칼라미안 제도에서 나환자 촌으로 유명한 섬이었다. 며칠 후에 갈 거라고 내가 대답했다. 싸라메이는 그 섬에서 3년 전에 시집왔다고 했다.

"여기서 먼데... 저 멋진 남편을 어떻게 만났어요? "
"코론 시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싸라메이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리고는 부모와 동생들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들에게 눈길을 던지며.

▲ 돼지 먹이를 만드는 할아버지와 아이들 ⓒ 강은경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새끼 돼지들을 쫓아 마당을 빙빙 돌고 있었다. 아랫도리를 벗은 채 맨발로. 십여 마리 점박이 새끼 돼지들이 꿀꿀꿀 아이를 피해 내달았다. 서로 주둥이로 들이박어 가며. 마른 흙먼지가 살짝 피어올랐다. 잠시 후 아이가 싸라메이에게 달려오고, 새끼돼지들도 나무 그늘에 누워 있는 암퇘지에게 몰려갔다. 암퇘지의 젖꼭지를 다퉈 물었다.

▲ 자넷이 문어를 들고와 내게 먹을 줄 아냐고 묻는다. ⓒ 강은경


핼린의 사촌언니 쟈넷이 문어를 가져와 보여 주었다. 남편이 오늘 새벽에 잡아온 거라며, 먹을 줄 아냐고 내게 물었다. 물론,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원래 나는 극피동물, 연체동물, 갑각류, 생선, 가리지 않고 어패류라면 환장했다.

얼마 후, 쟈넷이 우리를 불렀다. 언덕바지를 조금 올라 가 쟈넷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 거실은 시멘트 바닥이었다.

▲ 쟈넷의 집에서 ⓒ 강은경


쟈넷의 남편이 문어를 요리해 내왔다. 문어 아도보였다. 문어를 잘게 토막 쳐 마늘, 간장, 식초, 설탕을 넣고 조린 거였다. 쫄깃쫄깃 맛있다. 내 몫의 문어 한 접시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어느새 쟈넷의 거실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헤어졌던 미셀과 메이아도 왔다. 미셀은 수다쟁이였다. 그녀는 자갈이 구르는 듯한 큐오논어로 뭐라 뭐라 끊임없이 조잘댔다. 무슨 재미있는 얘긴지 사람들이 계속 폭소를 터트렸다.

얼마 후 그들은 시멘트 바닥에 담요를 깔고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나는 쟈넷이 준 베개를 베고 대나무 의자에 누었다. 금세 오수에 빠져 버렸다.

낮잠에서 깼을 땐, 나 혼자였다. 깔깔깔 웃으며 카드놀이 하던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빈 집에 혼자 누워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오후의 햇살 속에서. 바다를 날고 있는 나비 꿈을 꾼 것 같았다. 순간, 나도 '장자'처럼 어리둥절해졌다. '여긴 어디지? 나는 뭐지?'

▲ 마당가에서 방카(배)에 페인트칠 하고 있는 동네 주민. ⓒ 강은경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