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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격동하는 한반도와 미국①] 북한 체제 내 변화를 유인해라

등록|2015.01.06 21:26 수정|2015.01.07 10:41
새해 벽두부터 남북 정상회담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정상회담과 2007년 정상회담 모두 한미관계와 북미 관계가 좋아지면서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습니다. 2015년 한반도 정세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롯하여 미·중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사단법인 코리아연구원과 공동으로 '2015년 격동하는 한반도와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5회 연속 글을 내보낼 예정입니다. 신년 기획특집에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합니다. - 기자말

▲ 미얀마 테인 세인 대통령과 아웅 산 수 치 여사가 악수하고 있는 장면. ⓒ 연합뉴스


미얀마 개혁개방 이후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차원에서 '미얀마 모델'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조명을 받고 있다. 미얀마 변화의 강도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은 테인 세인 대통령이 그들 대표를 대통령궁으로 초청해 개혁을 약속했을 때, 그의 진정성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렇지만 테인 세인 신정부가 들어선 2011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개혁과 개방은 가히 '혁명적'이다.

미국이 선호하는 미얀마 모델

주목할 것은 '미얀마 모델'이 '능동혁명'과 '수동혁명', '급진'과 '점진'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미얀마 모델'은 자력갱생형 사회주의 실험에 실패한 군부가 외부세계와 접촉의 폭과 밀도를 높이는 이행전략과 연관된 것이다. 이는 군부주도하의 통제된 개방(controlled opening)에 해당한다.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1988년 8월 8일에 일어난 이른바 '8888 시민항쟁'이었다. 8888 시민항쟁은 국제사회에서 미얀마가 최빈국으로 분류되면서 한때는 아시아의 선진국 대열에 끼었던 미얀마를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바닥에 이르게 한 사회주의 지향의 군부체제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었다.

2년 후인 1990년 5월 군부의 유화책으로 실시한 총선에서 미얀마 대중들은 아웅 산 수 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에 표를 압도적으로 몰아줌으로써 28년 군사통치에 선거혁명으로 맞대응하였다. 이에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변형된 고립주의'(modified isolationism)의 길을 선택했다.

이때 변형된 고립주의는 예기치 않은 선거패배로 권력 이양이 가져올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군부가 선거결과 무시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고 뒤이어 미국을 위시한 서방 외교 제재, 경제제재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중국과 인도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교 및 경제 활로를 찾았다. 이는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물론 1997년 창설 30주년을 맞은 동남아국가연합(ASEAN, 아래 아세안)이 '하나의 동남아시아'라는 기치 하에 서방 반대에도 미얀마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것 역시 봉쇄 상황에 있던 미얀마의 소중한 활로가 되었다.

미얀마 모델의 본질

요컨대 미얀마를 고립적 상황에서 이끌어낸 아세안, 중국, 인도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미얀마에 대한 제재결의를 방어하면서 미얀마에 대한 투자를 급속도로 늘려왔다. 인도도 8888 시민항쟁 직후에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했으나 이후 미얀마와의 군사물자 거래, 경제교류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아세안은 오랜 서방 강대국들의 식민지 경험 속에서 축적된 주권동등, 내정불간섭과 같은 '아세안 방식'(ASEAN way)을 통해 미얀마 문제 해결을 위해 포용이라는 변화에 '건설적 관여'(constructive engagement) 전략을 구사하였다.

일례로 아세안은 미얀마 군부가 1990년 5월의 선거혁명과 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마련한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의 다른 이름인 '규율민주주의로의 이행' 로드맵을 암묵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특히 아세안 내에서도 미얀마와 1천 마일이 넘게 국경을 접하고 있는 태국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갈등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태국과 미얀마는 종종 긴장관계로 돌입하곤 했다. 그러나 8888 시민항쟁 이후 외국자본을 간절히 원하던 미얀마 군사정부가 티크 삼림 개발을 제안한 태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양국 관계가 개선되었다.

미얀마는 새로운 환경법 때문에 국내에서 벌목이 금지된 태국 사업체들에게 연간 120만 톤에 이르는 벌목을 허가했다. 또 1990년대부터 태국 정치인들과 군 고위 인사들이 교역, 마약퇴치, 해양 석유탐사 등의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얀마를 방문했다. 2008년 5월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미얀마를 강타했을 때도 미얀마 군 수뇌부는 태국으로부터의 사이클론 피해자들을 위한 구호 성금을 가장 먼저 승인하였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직후인 2012년 테인 세인 대통령과 잉락 수상은 미얀마의 첫 경제지대인 다웨이 항구(Dawei Deep Seaport)와 특별경제지대(Special Economic Zone)를 설립하는 데 같이 합의했다. 물론 태국 이외에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이 미얀마와 경제교류를 활발히 했다.

그중에서도 수하르토 군사정부 통치하의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 좌파 정부하에서 최악의 경제상황에 있던 인도네시아를 동남아시아 신흥공업국 반열에 올려놓은 집권 여당 골카르(Golkar) 지도하의 개발독재 모델을 수출했다. 군부가 만든 연대발전단결당(USDP)은 바로 이 골카르의 복사판으로서 20년 만에 치러진 2010년 총선에서 선거의 불공정 시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당이 되었다.

집권당 통합단결발전당(USDP)의 등극은 군부에 의해 규율되는 민주주의 서막이었다. 마침내 2011년 3월 규율민주주의로의 이행 로드맵의 마지막 단계인 '현대적이고 발전된 민주국가' 수립 차원에서 테인 세인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때 이 '현대적이고 발전된 민주국가'는 그 수장인 테인 세인이 군 장성 출신일 뿐만 아니라 의회 역시 선거와는 무관하게 의석의 4분의 1을 군인들이 차지하도록 한 2008년 헌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미얀마의 변화가 북한의 본보기?

이러한 규율민주주의의 본질에도 개혁개방의 폭은 과거 매우 점진적인 변화의 보폭과는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2012년 11월 버락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미얀마를 방문하여 테인 세인 정부를 지지하면서 북한을 향해 미얀마의 변화를 본보기로 하라고 촉구했다. 이듬해 테인 세인은 근 반세기 만에 미국을 방문한 첫 미얀마 대통령이 되어 스스로 옛 소련에서 개혁개방을 주도한 고르바초프에 비유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은 미얀마의 변화에 얼마나 기여하였나? 테인 세인 주도의 개혁개방이 있기 직전까지만 해도 서방 일각에서는 강대국들 경제제재가 그들의 목적하였던 체제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폭정의 전초기지'와 같은 독설이 외국인혐오증(xenophobia)과 같은 국수주의적 반응을 고조시켰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한 서방 강대국들의 봉쇄조처가 스스로 도덕적 우월성을 드러냈을 수는 있어도 어떠한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다.

싱가포르의 저명한 사회학자 추아벵화(Chua Beng Huat)는 '동아시아에서 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제약하는 요인'에 대한 역사주의적 접근을 강조한 바 있다. '버마(미얀마)식 사회주의'를 실험한 미얀마 군부의 경우 영국 식민주의, 식민 종주국의 분할지배와 무관하지 않은 종족 간 내전, 서방 강대국들의 '신식민주의적' 간섭을 경험하면서 서방의 가치를 거부하고 고립을 선택했다.

이들의 고립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더라도 집단적 사회성, 자주권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극단적 국가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북한의 노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귀결은 미얀마의 경우 국내 시간을 정지시킨 약탈국가(predatory state)로의 추락이었다.

이러한 미얀마의 추락은 탈식민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서방 강대국들의 민주주의가 이들의 식민지가 된 약소국들에서는 차별과 억압에 기초한 전체주의 원리로 둔갑했기 때문에 그 위선을 경멸하면서 '비자본주의 발전노선'을 선택한 제 3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의 운명과 동일하다.

미얀마와 북한

이렇듯 자유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고 있는 아시아의 시각에서 보자면 미국을 위시한 서방과의 돈독한 신뢰관계가 없는 중국, 인도는 차치하더라도 애초 반공-친서방 그룹이 중심이 된 아세안의 방식이 미얀마 모델이 가시화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들의 포용전략은 경제교류, 자본투자로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쌍방 간 이익의 균형에도 부합했다. 미얀마 군 수뇌부에서 보자면 교류와 투자는 개발독재체제의 업적 정당성(performance legitimation)을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한반도 내의 평화적 변화의 관점에서는 미얀마에 대해 서방 강대국들이 행한 '고립을 통한 변화' 전략의 비효과성과 '포용을 통한 변화' 전략을 구사한 아세안 방식의 효과성에 유념하면서 북한에 대해 '체제변화'(change of regime)가 아닌 '체제 내 변화'(change within regime)를 유인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미얀마처럼 북한을 정치적으로는 교도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교도 자본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개발독재의 다른 이름인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면서 체제전반의 억압성을 완화시키는 방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접근은 북한에서 개혁개방의 물꼬가 트이는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중국이 테인 세인 정부에 대한 오바마 정부의 적극적인 접근을 미국의 아시아 중시전략의 맥락에서 이를 경계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으나 이 역시 극히 미국적이다. 미국이 진정 아시아 중시전략에서 성과를 얻으려면 추아벵화가 강조했듯이 오랜 기간 서방 강대국들의 식민지 경험을 한 아시아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미국은 '미얀마 모델'과 닮은 꼴이 되길 바라는 '폭정의 전초기지' 북한식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덧붙이는 글 *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knsi.org)에도 함께 실립니다.
* 박은홍님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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