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마음껏 여유 부려도 된다... 규슈올레니까
[규슈올레 ①]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 유혜준
지난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일본 규슈올레 도보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도보여행에는 김운용 고양시 녹지과장, 정창식·최한범 주무관이 동행했습니다. 이들은 고양시에서 고양힐링누리길을 담당하고 있어 벤치마킹을 하러 간 것이지요. 우리 일행은 규슈올레 3개 코스를 걸었습니다. 오이타현의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오쿠분고 코스와 사가현의 다케오 코스입니다.
제주올레에서 일본에 수출한 규슈올레는 제주올레와 길 표시가 같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간세와 리본, 화살표가 똑같아 전혀 낯설지 않았고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지요. 때문에 걸으면서 자주 제주올레를 떠올렸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걸었던 규슈올레, 길은 아름다웠고 걷기 좋았습니다. 우리나라와 다른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날씨까지 좋아서 걷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지요. 코스마다 특색이 있어 걷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 기자 말
날씨, 맑았다. 햇빛은 밝았다. 매서운 추위가 한창인 한국에 비해 규슈의 겨울은 포근했다. 굳이 날씨를 비교하라면 우리나라의 늦가을 정도? 하지만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건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너무 포근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얇은 옷을 입었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날씨라고나 할까.
12월 27일,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를 걸었다. 이 코스 전체길이는 12.2km, 소요 예상시간은 4~5시간이다. 걷기 전에는 점심을 먹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4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난이도가 '중'이라고 하던데, 길이 예상보다 험했던 것일까?
그건 절대로 아니다. 길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길에 홀려서,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서 자꾸만 걸음이 더뎌졌던 것이다. 확실히 길은 좋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봐야 소용이 없다. 직접 걸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래야 내 길이 된다. 마음 속에 길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규슈올레 필수 준비 아이템은 바로...
▲ 제주올레를 걸어본 사람들은 안다. 이 화살표가 어떤 의미인지. ⓒ 유혜준
규슈올레를 걸을 때 가장 먼저 챙겨야 하는 건 점심이다. 특히 우리가 규슈올레를 걷던 시기는 일본이 아주 긴 연말연시 연휴에 들어간 때였다. 12월 27일부터 1월 1일까지 9일동안 연휴란다. 식당이나 상점이 문을 닫을 가능성이 높아 먹을 것을 챙기지 않으면 쫄쫄 굶으면서 걷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규슈관광추진기구의 규슈올레 담당인 이유미씨의 조언이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를 걸을 때는 도시락을 준비해 굶지 않았지만 점심을 준비하지 못했던 오쿠분고 코스에서는 점심을 거른 채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던 것이다.
하긴 길을 걸으면서 끼니를 거른 게 한두 번인가. 도보여행을 나서면 끼니 시간에 맞춰서 식당이 나타나지 않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한적한 시골마을에 식당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그건 규슈올레도 마찬가지였다. 길은 숲을 지나 강줄기를 따라 이어지다가 고원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곳에 식당이 있을 리가 없다.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시작점은 '고코노에 꿈의 현수교'. 주차장에서 현수교가 얼핏 보였다. 우리 일행은 현수교를 보는 것보다는 규슈올레를 걷는 것에만 마음이 팔려 현수교에 들르지 않았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아쉬웠다.
길이가 390미터, 높이가 173미터라는 꿈의 현수교는 일본에서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로는 가장 높고 긴 다리란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주 좋다는데, 그런 다리를 걸어서 건너보지 못했던 것이다. 에이, 핑계김에 다시 한 번 더 걸으러 가지, 뭐. 봄꽃 피는 계절이나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 좋은 길은 한 번만 걷는 게 아니잖아. 이러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부처님이 파란색 털모자를 쓰고 있다. ⓒ 유혜준
올레 시작점에서 우케노구치 온천마을까지는 1km 남짓이다. 이 마을에서 소설 <설국>으로 유명한 일본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머물면서 집필활동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마을을 소재로 한 작품도 남겼다고 한다. 우케노구치 온천마을에서 오랜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떠올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기억하는 이라면, 이 마을을 지나면서 나처럼 한 번쯤은 그를 생각하지 않을까?
규슈는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규슈에 간다면 온천은 한 번쯤은 들러보자. 규슈올레를 걸은 다음이라면 피로를 풀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우케노구치 온천마을에서 대나무 숲을 만났고, 작은 신사도 지나쳤다. 파란색 털모자를 쓴 돌부처도 만났다. 털모자가 너무 커서 부처님 얼굴이 반쯤 가려졌다. 마을 안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가 있었다. 보이는 시골 풍경은 우리나라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조림정책... 감탄이 절로 나오네
▲ 오케노구치 온천마을에 있는 신세이칸 료칸의 온천탕 안내판. ⓒ 유혜준
울창한 삼나무 숲은 햇빛을 가려 응달을 만들었고, 길 위의 웅덩이 물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번에 규슈올레를 걸으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삼나무와 편백나무 그리고 대나무였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일본 정부가 정책적으로 조림을 했단다. 일본은 숲 가꾸기를 오래전부터 아주 잘해왔다고 한다.
화산 지역은 대부분 나무가 없어 민머리처럼 보인다. 그런 곳에 꾸준히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삼나무와 편백나무는 잘 자라 울창한 숲을 만들어냈고, 그 나무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잘라서 목재로 사용한단다. 베어난 자리에는 다시 어린나무를 심는다나. 그 덕분에 숲은 언제나 울창할 수 있었다.
김운용 과장은 일본의 조림 정책이 정말 잘 돼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개발보다는 자연을 보존하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빽빽한 삼나무 사이로 길은 나 있었고, 우리는 그 길을 걸었다.
밀크랜드 팜을 지나 길을 건넜다. 그곳에는 우유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정오가 조금 지나 우리는 길 위에 돗자리를 펼쳤다.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는 배꼽시계라던가.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은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도시락을 하나씩 차지하고 먹기 시작했다. 너른 들판에서 비록 편의점에서 산 것이기는 하나 도시락을 먹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도시락은 기대했던 것 보다 맛있었다.
개천을 따라 억새가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겨울 햇볕에 억새가 빛이 바랜 것일까? 억새는 빛깔이 유난히 옅어 보였다. 겨울이 깊어가기 때문이리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멀리 산봉우리가 보인다. 능선이 여러 개 겹쳐져 있다. 구쥬산이라고 했다. 추수가 끝난 논은 텅 비어 있었고,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었다.
▲ 고코노에 자연관은 고즈넉했다. 겨울이 나무 사이에서 머물고 있었다. ⓒ 유혜준
고코노에 자연관은 고즈넉했다. 여기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지난여름, 무성한 나뭇잎을 자랑했을 나무들은 이제 앙상한 가지만 남아 고원의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우리는 잠시 쉬었다. 작은 연못 주변을 서성였고, 나무 사이를 거닐기도 했다.
이곳에서부터 야마나미 목장까지 가는 길은 말길(馬道)이라 불린다고 했다. 말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인데, 이름 그대로 말이 다닌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신선한(?) 말똥 사이로 먼지가 돼 흩날리기 직전인 오래된 말똥들이 섞여 있었다. 말똥만 없다만 걷기 좋은 길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길인데, 말똥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걸어야 하는 길이 됐다.
이 길, 지금도 승마코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말을 타고 너른 한다고원을 달리는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길에서 우리는 단 한 마리의 말도 보지 못했다. 야마나미 목장에서 갇힌 채 사람들이 먹이를 주기를 기다리는 두 마리의 말을 봤을 뿐이다.
이 길 옆으로는 야마나미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한다고원의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이 고속도로는 규슈에서 가장 드라이브 하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보는 것보다는 걸으면서 보면 한다고원을 더 제대로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시작점에서 야마나미 목장까지의 거리는 8.5km.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장 센터 건물에는 식당과 마켓이 있었다. 그리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과 일본에 가면 어디서든 꼭 볼 수 있는 자동판매기가 있다.
▲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 유혜준
오후 2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야마나미 목장의 식당은 영업을 끝내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켓을 기웃거리다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었다.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아이스크림은 깊은 우유 맛이 났다. 마켓에는 우유와 요구르트, 치즈, 고기 등과 함께 관광기념품도 팔고 있었다.
목장 안을 기웃거리면서 연못도 구경하고, 연못 옆에 떼로 모여 있는 청둥오리 사진도 찍으면서 오래 쉬었다.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거 아냐? 걷는 길이 고작 12.2km밖에 안 되는데 여유 좀 부리면 안 되나. 이런 말들이 오갔다.
다시 걷는다. 한다고원의 아름다운 풍경은 이제부터 제대로 펼쳐질 참이었다. 제주의 오름을 연상하게 하는 완만한 능선이 보이고, 그 옆으로 파란색과 빨간색이 조화를 이룬 화살표가 나타났다. 길을 알리는 화살표와 리본 그리고 간세는 우리가 올레를 제대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규슈올레, 놀면서 쉬면서 여유롭게 걷는 길
▲ 규슈올레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 유혜준
표시가 없어도 사람들이 지나간 길은 흔적이 남아 있어 짐작으로 길을 가늠할 수 있다. 넓디넓은 한다고원에서 길을 잃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길 표시와 사람들의 흔적 때문이었다.
이 구간은 평지 같아서 우리는 해발 1000미터 가까이 되는 곳에 와 있다는 실감을 하지 못했다. 걷는 걸음이 그만큼 가벼웠다는 얘기가 되겠다. 구쥬산을 포함한 능선들이 멀리서 한다고원을 따뜻하게 감싸안아주고 있었다. 산들은, 능선들은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걷는 우리를 지켜봐주었다.
시라미즈가와 폭포는 폭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래도 쏟아지는 물길은 세찼다. 물이 고인 웅덩이 빛깔은 옥빛이었지만 쏟아져 내려가는 폭포 물은 우윳빛이었다. 그 주변 바위는 밝은 황토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물에도 유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알려줄 사람은 없었다. 폭포에 들렀다가 다시 올레 코스로 돌아왔다.
▲ 쵸자바라·다에하라 습원 ⓒ 유혜준
아, 숨이 막힐 것 같은 풍경이었다. 눈 앞에서 억새밭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억새밭이라니, 이런 풍경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창식씨와 한범씨가 억새밭으로 뛰어들었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머금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길은 억새밭 사이로, 옆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코스를 벗어나 걸어도 좋은 길이었다, 이 구간은.
억새를 지금 즐기지 않으면 언제 즐길 수 있을까. 10월에 억새가 절정을 이루는 제주의 오름이 생각났다. 규슈올레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제주올레를 자꾸 떠올리게 된다. 비슷한 게 많기 때문일까? 3월에는 이곳 주변을 죄다 태운단다. 그래서 봄에는 검은빛이 된다나.
길은 쵸자바라·다에하라 습원으로 이어졌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큰 습지로 2005년에 람사르 협약에 등록되었다.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는 이곳에 있는 한다고원 관광안내소에서 끝난다.
꼬박 다섯 시간을 길 위에 있었다. 물론 다섯 시간 내내 걸은 것은 아니었다. 놀면서, 쉬면서, 먹으면서,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면서 걸었다. 올레는 그렇게 걷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 유전자는 제주올레를 걸으면서 배웠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같이 걸었던 김운용 과장이나 정창식·최한범씨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좋은 사람과 걸으면 더 좋은 길, 규슈올레를 걸은 소감은 '행복 만땅'이었다.
▲ 김운용 고양시 녹지과장과 정창식, 최한범 주무관이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를 다 걸은 뒤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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