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이 선생이다. 문학비평가, 불문학자인 황현산 산문집 ⓒ 문학동네
나는 밤이 되면 감각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야행성 인간이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산문집을 낸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문장을 빌어 밤의 상상력을 선생에 비유하여 찬양했다.
법과 제도의 폭력에 찢기고 상처난 시대적 어둠의 희생자들이 문학과 상상력이 빚어낸 역사의 말과 미래 말을 통해 진정한 치유를 맛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밤은 낮의 분주함으로부터 벗어난 치유와 안식의 시간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자기와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괴테의 <파우스트> 가운데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성 그 자체를 불신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 -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 중
문학평론가의 산문집 이어서일까 글의 깊이가 남다르다. 산문집 전체에 부드럽고 품격있는 언어로 분석하고 짚어낸 사회 곳곳의 부조리와 병리 현상이 예리하다. 산문집은 이성을 빙자한 사회적 횡포와 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팽개쳐진 채 신음하던 시간들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만든다.
글마다 시대의 폭력이 남긴 상처가 그대로 드러난다. 필자가 존경하던 김지하나 친일 문인들의 미화될 수 없는 행적, 인문학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탄광촌의 기억,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업 시인으로 문학을 붙들고 산다는 것, 유년 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의 시대적 통찰과 기억의 조각들은 씨실과 날실처럼 정교한 문체로 잘 엮여 있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시작된다.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봉합이 아닌 제대로 된 치유와 화해와 용서를 바라는 간절한 몸짓일 것이다. 산문집을 통해 시대와 사건과 문학과 철학과 자연을 넘나들이 하는 맛, 밤의 창조적 자아가 이 회복시킬 새로운 미래에 대한 즐거운 상상력은 야행성 기질을 지닌 나의 감각을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박정희 시절의 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전에 못 살았던 흔적을 시멘트로, 슬레이트로 덮는 일부터 시작했다. 청계천을 복개하여 그 시궁창을 거기 그대로 남겨둔 채 감추었다. 모든 것이 환해졌다. 그 후 청계천은 다시 열렸지만 그것이 감춰진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개천이 긴 어항으로 바뀌었을 때, 거기 등을 붙였던 중소 상인들의 삶도, 한국 예술에 새로운 감수성을 불어넣던 언더그러운드 예술의 터전도 함께 사라졌다.
정부는 이제 모든 강을 빈틈없이 다스리겠다고 전 국토에 토목공사를 벌이고 있다. 이른바 4대강 사업이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강은 이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구불구불한 뱀이 삶에 미치던 위험은 아마 사라졌을 것이다. 그 전에 강의 삶도, 거기 몸 붙였던 생명의 삶도, 사람의 삶까지도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말이다. 뱀이 없는 곳에는 산딸기도 없다. -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중
개발을 빙자한 자연 파괴는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을 규격화된 직선으로 폭력적 기계적으로 변형했다. 구불구불한 강은 운하용 직선이 됐고, 둥근 초가지붕이 슬레이트와 시멘트로 덮여 사라졌다. 사람들의 유연한 마음도 공동체 정신도 사라졌다. 자연의 순환고리를 벗어나 삭박한 도심의 무한 경쟁에 뛰어든 우리 앞에 지속 가능한 삶의 희망은 없어 보인다.
뱀처럼 구불구불하던 강이 지닌 위험이 단순히 삶의 수많은 위험 요인 중 하나였다면 그 강을 곧게 펴 다스리겠다는 4대강 사업은 생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죽음의 재앙이다. 개발의 경제성과 타당성을 빙자한 자연을 거스른 무자비한 폭력이 가져 온 필연적 결과다.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상처 받은 이들이여, 자기 안의 상상력과 창조적 자아와 대면할 수 있는 밤의 침묵 속으로 고요히 침잠하라. 무자비한 이성의 칼날에 찢긴 자아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주어라. 그리고 소리 없는 자장가로 상처 난 자기 영혼을 달래주어라. 밤은 오롯이 당신 자신으로 돌아가 자기의 내면을 치유하는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산문집/ 문학동네/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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