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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해외입양... 자긍심 갖기 어려웠어요"

[인터뷰] 친부모 찾아 모국 방문한 미국입양인 김효진씨

등록|2015.01.20 11:01 수정|2015.01.20 20:48
지난 14일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한국 입양인, 왜 모국으로 돌아가는가'라는 제목의 장문의 기사를 통해 한국 입양인들이 미국가정에 해외입양 보내진 후 겪는 각종 인종차별, 양부모와의 갈등, 문화적 단절문제 등을 심층 보도했다.

아울러 NYT는 미국으로 해외입양 보내진 제인 정 트랜카, '진실화해를위한해외입양인모임(TRACK)' 대표의 사례를 상세히 보도하면서, 트랜카씨 같은 해외입양인들이 성인이 된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해외입양 반대운동을 적극 펼치고 있다고 전했다.

해외입양인들이 해외입양 반대운동을 펼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가난해도 친모와 함께 살 때 사람은 행복하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들 해외입양인들은 "한국정부는 해외입양보다는 친모가 자녀와 이별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며 해외입양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 입양 보내지기 전 김효진씨 ⓒ 김효진


한국 이름 김효진, 미국 이름 로라 왁스(Laura Wachs)씨는 한국계 미국입양인이다. 그는 지난 1989년 1월 13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석촌동 임경희조산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날 오후 그는 동방사회복지회로 인계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7개월 후인 지난 1989년 8월 3일, 그는 미국으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그리고 지난 2014년 6월 13일, 김씨는 해외입양 보내진 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모국을 방문했다.

지난해 한국에 왔을 때 김씨는 6개월만 머무르며 친부모를 찾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김씨는 친부모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원래 계획을 바꾸어 향후 2~3년을 더 모국에 머무르며 친부모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은 지난 2주간 김씨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사연을 정리한 것이다.

"친부는 경북 울진 출신 이명호씨, 친모는 경기도 평택 출신 김혜경씨"

▲ 현재 김효진씨 ⓒ 김효진


- 기록에 따르면 1989년 1월 13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석촌동 임경희조산소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는데 친부모나 그 가족에 대해 아는 정보가 있는지?
"기록에 의하면 친부 성함은 이명호, 친모는 김혜경씨로 되어있다. 두 분은 1988년 친구 소개로 교제를 시작하셨다. 1989년 1월, 내가 출생 당시 친부는 24세 친모는 23세였다. 지금 현재 나이는 친부가 50세 친모가 49세로 추정된다. 당시 친부는 키 168cm에 조용하고 내성적인 분이었고, 친모는 키 155cm 체중은 54kg의 준수한 외모를 가지신 분으로 기록되어있다.

친모 김혜경씨는 경기도 평택에서 1남 3녀의 둘째로 태어나셨다. 친모의 부친(외할아버지)은 친모가 어려서 돌아가셨고 1989년 내가 출생 당시 친모의 모친(외할머니)만 살아계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친부는 경상북도 울진에서 2남 2녀의 둘째로 태어나셨다. 기록에 의하면, 친모는 친부와 사귀다가 서로 마음이 안 맞아서 헤어지셨는데 헤어지고 나서 내가 임신된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 친부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모르실 것이다."

- 출생 당시 모반이나 신체특징이 있었는지?
"출생 당시 우측 엉덩이 아래쪽에 사마귀가 있었고 목 뒤에 작은 점이 있었다. 친모가 나를 조산하셨기에 체중도 1.9% 밖에 안 되었고 입양하기에 '위험이 높았다'고 기록되어있다."

- 한국 이름 '김효진'은 누가 지어준 것인가?
"입양기관에서 지어준 것이라고 추정된다."

- 자신이 해외입양 보내지게 된 사연을 아는가?
"나는 1989년 8월 3일 미국으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친모가 친부와 헤어지고 나서 나를 출산하셨기에 친모 홀몸으로 나를 양육할 능력과 자신이 없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친모가 나를 출산한 당일 날인 1989년 1월 13일 나는 곧 동방사회복지회로 인계되었다."

- 미국 입양부모와 형제들은 어떤 분들이었나? 사이는 좋았나?
"내가 미국에 입양 보내지기 전 입양부모는 친아들 둘을 키우고 계셨다. 양부모는 미국 중산층이셨고 양부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양모는 전업 주부셨다. 입양부모는 지금 두 분 다 68세이고, 미국 오빠들은 38세와 39세, 나는 26세다. 오빠들은 지금 독립했다.

나는 지금 양부와는 친하게 지내는데 양모와는 사이가 안 좋다. 나는 17세 때 양부모 집에서 쫓겨났었다. 지금 양부와는 화해해서 사이가 좋지만 양모와는 그 이후로 9년째 전혀 접촉이나 연락을 서로 안 하고 지낸다.

미국오빠도 한 오빠와는 가깝게 지내지만 또 다른 오빠하고는 전혀 교류가 없다. 전체적으로 입양가족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양부에게는 자주 연락을 드리고 싶어도 양모와내 사이가 안 좋아서 양부와도 교류를 잘 안하게 된다."  

- 미국에서 해외입양인으로 자라면서 느낀 점이 있었을 텐데, 특별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시절에?
"나는 워싱턴주의 시애틀에서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는데 내가 양부모님에게 많은 부담을 드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졌고 나 스스로를 경멸하게까지 되었다. 그 후 잊고 지내다가, 지난 2~3년 전 부터는 '해외입양인'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내가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혼동될 때 많았다"

- 해외입양인 신분으로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힘든 경험은 무엇이었나?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 해 줄 수 있나?
"가장 힘든 경험은 아무래도 내 정체성에 관한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스스로도 혼동될 때가 많았다. 어떨 때는 내가 두 나라 다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길 잃은 집시처럼 느껴졌다. 나는 마치 '집 없는 아이' 같은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두 나라 다 각각 다른 종류의 인종차별이 있고 나 스스로 이런 인종차별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산 것 같다."

- 입양 보내지고 나서 25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6월 한국을 방문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내가 태어난 나라 한국에 대해 궁금했다. 한국은 내가 입양 보내지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살 수도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한국문화가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한국문화를 많이 배우면서 친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으로 무작정 한국을 방문했다."

- 한국 부모를 찾고 싶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는지?
"그냥 친부모 찾기를 시도해 보고 싶었다. 인생은 짧다. 해외입양 과정에 입양기관의 부패와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친모도 나를 입양보내기로 결정하신 것에 대해 슬퍼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모를 찾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첫째, 친모를 만나서, '저는 잘 있습니다. 전혀 엄마를 미워하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 해드리고 싶었다. 둘째는, 그래서 엄마가 나를 입양 보낸 것에 대해서 슬퍼하지 마시고 엄마 스스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셨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셋째는 한국에서 엄마가 나를 불가피하게 입양 보내셨지만 그래도 나를 보고 싶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에서다. 마지막으로는 혹시 내가 무슨 유전적인 질병이 있는지 알고 싶은 것도 있다."

- 처음에 한국에는 6개월만 머무를 생각으로 방문했지만 방문기간을 2~3년으로 연장했는데, 친부모를 찾는 일 이외에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나는 미국에서 시인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일종의 창작시 낭송대회인 '시애틀 포이트리 슬램'(Seattle Poetry Slam)이나 '에버렛 포이트리 나이트'(Everett Poetry Night) 등에 참가했고, 미국에서 한 상담센터를 위해 시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자선쇼를 열어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처럼 한국을 방문한 한인 해외입양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시로 쓸 예정이다. 아울러 한국에 있는 해외입양인들에게 글 쓰는 방법이나 연기를 가르치는 워크숍을 열 계획이다. 가능하면 시 발표회도 마련해서 여기서 모은 성금을 입양인단체에 기부할 계획도 있다.

10대 때 특히 입양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친부모나 양부모 양쪽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많이 방황했다. 그런 방황 중에 시를 통해 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시는 내 마음의 갈등과 정서적인 문제를 해결해가는 도구가 되었다. 즉 내가 시를 쓰는 일은 곧 나의 '트라우마'와 '정신건강'을 치료하는 작업이다."

"친부모님에 대해 아무런 분노나 적의가 없다"

- 친부모를 만나면 꼭 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나는 친부모님에 대해 아무런 분노나 적의가 없다. 나는 지금 행복하고 잘 있다고 전해 드리고 싶다. 친부모님도 내가 그런 것을 아시면서 평안하시고 행복하시면 좋겠다."

- 해외입양인으로서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해외입양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 입양서류의 많은 부분이 한국정부와 한국의 어른들에 의해 조작, 위조되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많이 받았다. 나는 한국정부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나처럼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해외입양인들은 자신에 대해 자긍심을 갖기 어렵다. 또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한국을 방문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한국인들 중에 내가 해외입양인 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내 고향에서 '이민자' 취급을 받는 것 또한 서글펐다. 나는 한국정부와 사회가 좀 포용력을 갖고 나와 외모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마지막으로 입양기관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나는 '입양기관' 이라는 용어보다는 차라리 '아동밀매기관'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입양기관'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가슴에 차분하게 손을 얹고 정말 '내가 이 일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하는지 아니면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지' 자문해 보셨으면 한다.

나는 입양기관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정말 해외입양인들의 입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또 입양기관에서는 해외입양인들과 정기적으로 간담회를 갖고 해외입양인들의 다양한 제안과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반영해 주셨으면 한다. 입양기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과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김효진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02- 3210-2451)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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