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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꾼 같았던 마왕... 이젠 영원히 안녕

[올드걸의 음악다방 18]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등록|2015.01.20 11:11 수정|2015.01.21 11:34
밤을 잊은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를 가슴에 품고 음악을 들었다.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노래 가사를 받아쓰고, 가슴 졸이며 녹음을 하고, 마음에 오래오래 담아 두었다. 요즘은 클릭과 스킵을 하면서 음악을 빠르게 구하고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은 다 쓰면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쉽게 소비한다. 한때는 소녀였고 지금도 소녀라고 믿고 싶은 우리는 [올드걸의 음악다방]에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마음 깊숙한 곳에 소장했던 노래를 꺼내 듣고, 누군가는 새로 알게 된 노래를 즐겼으면 좋겠다. - 기자 말

▲ 무대에서 노래하는 신해철 일러스트 ⓒ 반지윤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앞에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티켓을 살까? 말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직접 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활은 어떻게 하지? 과감하게 티켓을 사지도 못하고 라이브 공연에 대한 미련도 쉽게 버리지 못하던 내 마음이 널뛰었다.

'이 돈이면 떡볶이가 몇 접시이고 버스 토큰이 몇 개인데… TV에서 보면 되지 뭐.'
'그래도 이런 기회는 또 오는 것도 아닌데, 언제 대구에서 공연을 또 하겠어?'

'신해철 마이셀프 투어 콘서트' 포스터가 붙었던 1991년, 나는 대학원생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를 딱 1년 다니고 그만 두었다. 입사하자마자 붓기 시작한 적금과 재형저축을 부모님이 대신 내어주고, 용돈과 등록금은 내가 벌기로 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달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학생이 된 나는 점점 알뜰하고 소심해졌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면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창한 철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부할 시간을 확보해야 했고 과외도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풍족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콘서트도 편하게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때는 하루 1000원이면 왕복 차비를 내고 점심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티켓가격이 부담스러웠던 나, 결국엔 쓸쓸하게 돌아섰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그때 보면 되잖아.'

돈이 없어서 못 봤던 그의 콘서트... 영원히 볼 수 없게 됐다

대학가요제에서 처음 보자마자 '대상'을 받을 거라고 확신했던 '무한궤도'의 보컬, 신해철은 내 청춘의 추억이다. 밴드 구성원 대부분이 있는 집 자식들이고 곱상한 외모에서 풍기는 귀티에 반감을 가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노래가 너무 좋아서 그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386세대들의 영원한 청춘 찬가 '그대에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애절한 가사의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현대인의 똑같은 일상을 꼬집는 '도시인', 아버지의 자리를 되새기게 하는 '아버지와 나', 초등학생들도 따라했던 영어 랩이 인상적인 '안녕' 등등 멋진 노래가 많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나에게 쓰는 편지'이다. 막연한 불안에 떨던 1991년의 나를 토닥토닥 위로해준 노래이다.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 '나에게 쓰는 편지' 노랫말 중 일부

신해철 본인이 랩이라기보다 염불에 가깝다고 말한 후렴구를 중얼거리다보면 저절로 생각에 빠지게 된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돈은 얼마나 필요한가? 차는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돈, 큰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등등 이런 것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었는데… 나름 노력도 했다고 자부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내가 잘 살고 있기는 한 것일까. 돈 많이 벌면 보려고 했던 신해철의 라이브 콘서트.

이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불가능하다. 막연한 미래의 평안을 위해 내가 미뤄놓았던 소소한 행복은 얼마나 많을까. 삶과 자아, 관계,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라고 하는 신해철의 잔소리 같은 노래를 20년 넘게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이제 그가 없다. 마음이 헛헛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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