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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답사 1번지, 그간 많이 변했구나

전남 해남 녹우당 해송숲

등록|2015.01.29 10:19 수정|2015.01.29 10:19

▲ 전남 해남 녹우당 해송숲 ⓒ 이상훈


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남도에 다녀왔습니다.

대학동기 모임인데, 그 이름은 우정이 변치 말고 한결같이 지내자는 의미로 '늘벗회'라 불립니다. 1년에 한 차례씩 여행을 다녀오는데, 올해는 목포 유달산, 해남 윤선도 유적지인 녹우당, 대흥사 그리고 강진의 다산초당과 백련사 길, 영랑 생가 등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소위 남도 답사 1번지란 곳입니다.

20여년 만에 찾은 녹우당이나 다산초당 주변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20년여 전에 시행된 지방자치제는 지역의 문화, 유적을 남다르게 관심을 기우려 주었습니다. 녹우당 입구에는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다산초당 근처에는 다산기념관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습니다.

녹우당(綠雨堂)은 해남 연동마을의 해남 윤씨의 종택을 말합니다.

녹우는 녹음이 우거진 때 비가 내린다는 뜻과 동시에 선비의 변치 않는 기상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합니다.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의 4대 조부이자 해남 윤씨의 득관조인(得貫祖人) 어초은 윤효정이 백연동(현 연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은 것으로 전하여 지고 있으나 당시의 문헌이나 문기가 없어 그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녹우당은 손을 벌려 포근하게 안아주는 모습을 한 덕음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머니 품속 같은 느낌을 주는 덕음산을 병풍삼아 세워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덕음산 중턱에 500여년 된 비자나무 숲이 있는데 이는 어초은이 "뒷산의 바위가 노출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에 따라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비자나무 숲 조성은 덕음산 중턱이 바위산이면 갑작스런 폭우에 그 아래 자리 잡은 어초은 무덤과 녹우당을 보존할 방책으로 남긴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비자나무숲은 문화적,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2년에 천연기념물 제 24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또한 안산(案山)은 벼루봉이고 그 바른편에는 필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터에서 자리 잡은 윤씨 일가에서 윤선도가 배출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윤선도와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입니다.

남인 계열이었던 윤씨 집안은 정치적으로 많은 핍박을 받게 됩니다. 공재는 벼슬길을 포기합니다. 공재는 서양화법을 도입한 사실주의 작품으로 최고로 평가받는 자화상(국보 240호)을 남깁니다. 공재는 천문지리학,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공재는 다산 정양용의 외증조부로 다산에게 학문적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다산이 바로 이웃한 강진 다산초당에서 많은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약용은 친가, 외가, 사돈 모두 남인계열에 속합니다. 남인은 조선후기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당파입니다. 특히 남인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수용하는데, 정약용 집안도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순교하게 됩니다.

이때 조카인 윤지충도 순교하게 됩니다. 윤지충은 윤선도의 후손입니다. 당시로서 진보세력이었던 남인계열은 천주교란 이념을 추구함으로써 정치적 박해를 받게 됩니다. 이런 역사가 오늘에 이르러서도 반복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녹우당 입구에는 백련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어초은, 고산이 조성했다고 전해집니다. 백련지는 '흰 연꽃이 피는 마을'이라고 불린 백련동에서 유래합니다. 인공 연못인 백련지 조성은 풍수적인 면을 고려하여 조성된 듯합니다. 백연동 입구가 허(虛)하기 때문에 좋은 기운을 묶어 두기 위함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백련지에 해송 숲이 조성된 점도 마찬가지로 훤히 터진 마을 입구의 지형을 보완하기 위함입니다. 해송 숲은 30여 그루 정도로 층층이 띠를 이루며 백연동을 품어주고 있습니다. 해송 숲 밖으로 널따란 뜰이 펼쳐집니다. 풍요로움이 느껴집니다. 이런 풍요로움 속에서 문학과 예술이 태어났을 거란 생각도 해봅니다.  

덕음산 품속에 자리 잡은 녹우당은 백련지와 해송 숲 조성으로 보다 온전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 터전에서 윤씨 14대 손에 이르기까지 온전하게 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늘벗회' 친구들도 모임 이름처럼, 녹우당의 편안한 땅처럼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기원을 하면서 따뜻한 남도를 뒤로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새전북신문(2014.1.27)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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