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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최 읽을 수 없는 논개의 시비, 아쉽네

[진주성 사진 여행] 김시민 장군과 의기 논개에게 막걸리 한 잔을 바치다

등록|2015.01.31 20:28 수정|2015.01.31 20:30

▲ 논개시비 ⓒ 추연창


지난 1월 17일, 대구에서 버스를 타고 진주에 갔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진주가 아니라 진주성에 갔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바로 그 진주성이다. 1차 진주성 싸움 때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의병과 관군 1만여 명이 3만여 왜군을 물리친 곳이다.

그 바람에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 전쟁은 근본적으로 뒤틀렸다. 풍신수길은 진주를 거쳐 전라도를 점령, 곡창지대에서 얻을 수 있는 조선의 곡식으로 군량미를 삼으려 했는데, 진주성에서 패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1차 진주성 싸움을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치는 것이다.

진주성 앞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논개 시비'가 답사자를 기다린다. 성문 왼쪽에 있다. 논개는 2차 진주성 싸움 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의기(義妓)다. 그래서 진주성 안에 세워져 있는 사당에도 의기사(義妓祀)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시비의 위치가 별로라는 점이다. 그리고 비바람으로 돌에 얼룩이 심해진 탓에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이 시비를 논개가 뛰어내려 죽은 의암(義巖)과 촉석루의 중간쯤에, 잘 읽히도록 만들어서 다시 세워주면 좋겠다.

▲ 촉석문 ⓒ 추연창


진주성 성문 앞에 선다. 단체 답사자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하다. 한참을 기다려 '찰칵' 하려는데 그 새 누군가가 들어와 등을 내 사진기 앞으로 밀어넣는다. 서양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보여준 예의가 생각난다. 물론 좁은 도로이기는 했지만, 길 건너편의 건물을 찍으려고 사진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오던 차량들이 멈춰섰다.

왜 저 차들이 저렇게 멈췄나 싶어 차가 지나가면 찍으려고 사진기를 내리고 바라보니, 차 안의 서양인들은 내게 사진을 찍으라고 웃으며 손짓을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내가 사진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앞으로 가리지 않고 선 채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도무지 사진 한 장 찍기가 이렇게 힘이 든다.

성문에는 '촉석문(矗石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촉'이라는 한자가 '곧을 직' 셋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촉석은 돌들이 곧게 서 있다, 즉 절벽이라는 뜻이다. 이 절벽에 논개가 뛰어내렸고, 끝까지 싸우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김천일 장군도 뛰어내렸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으로 촉석루의 옆면이 보인다. 거대하다.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누각을 이룬 그 유명한 촉석루다. 3대 누각 중 다른 하나는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각 지방 사람들이 서로 자기네 것이 3대 누각 중 하나라고 자화자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촉석루 역시 밀양의 영남루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누각 위에는 많은 답사자들이 올라 남강을 완상하고 있다. 나도 올라가 남강을 내려다 본다. 저 아래로 논개와 김천일이 뛰어내려 자진한 바위 하나가 강물 속에 반쯤 잠긴 채 눈에 들어온다.

▲ 촉석루 ⓒ 추연창


논개초상논개초상 ⓒ 추연창


그러나 바로 의암으로 내려갈 일은 아니다. 논개를 모시는 사당 의기사부터 먼저 보아야 한다. 촉석루 옆에 있는 의기사를 보고 나와서 의암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여로다. 응당 사당을 찾아 참배부터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예의인 까닭이다.

사당 안에는 논개의 초상이 찾아온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조선 시대에는 통통한 여인을 미인으로 쳤다더니 과연 논개도 달걀 같은 미인이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내 옆으로 오더니 논개를 바라보며 절을 한다. 그 아가씨도 예쁘다. '얼굴이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비단같이 고와야 정말로 예쁜 여자'라고 말한 어떤 유행가가 생각난다.

의기사를 나와 촉석루 뒤편으로 가면 남강으로 내려가는 좁은 문이 있다. 그 문으로 내려가면 의암에 닿는다. 길이 과연 촉석답다.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없더라도 씩씩하게 걷기에는 저절로 몸이 움츠려지는 무서운 절벽길을 걸어 이윽고 의암 앞에 닿는다.

경상남도 기념물 235호인 의암과 절벽 사이는 50센티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로는 강물이 흐른다. 조금 용감한 답사자들은 뛰어서 의암 위에 올라 기념 사진을 찍는다. 나도 그렇게 멋진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었지만, 찍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 의암 ⓒ 추연창


의암에서 돌아나와 다시 촉석루 경내로 들어섰다가, 이윽고 김시민 장군 전공비로 간다. 이 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호다. 대구의 유형문화재 1호는 경상감영 청사였던 선화당이다. 조선 시대에 경상감영이 거의 대부분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 울산 등에는 선화당이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선화당이 대구의 유형문화재 1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선화당은 그저 건물일 뿐이므로 김시민 장군 전공비와 같은 역사성을 자랑하지는 못한다.

진주성 안에는 또 하나의 대단한 비석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호인 이 비의 이름은 '촉석정충단비'다. '정'은 기린다는 뜻이고, 충은 충성, 단은 제단을 뜻한다. 2차 진주성 싸움 때 순국한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황진, 장윤 등의 행적이 비에 새겨져 있다. 고종후는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고경명 의병장의 아들이고, 황진은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와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농후하니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무장이다.

경회는 김천일과 더불어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 중 한 사람이다. 진주성이 함락되면 왜적들이 호남으로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당시 진주성 싸움에는 호남 의병들이 대거 참전했다. 그러나 최경회도 이곳에서 순국한다. 특이한 것은 그가 논개의 정인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논개는 최경회가 죽자 의도적으로 왜장에게 접근하여 그를 끌어안고 촉석 절벽에 뛰어내렸던 것이다. 안타까운 두 사람, 오늘 진주성을 찾아 잠깐 묵도한다.

김천일 장군비를 본 뒤 왼쪽으로 계단을 오르면 '진주성 대첩 순의단'이 나온다. 대첩은 1차 진주성 싸움, 순의는 2차 진주성 싸움을 가리킨다. 진주성 싸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비의 뒷면에 새겨져 있다. 물론 읽기에는 곤란하다. 그래도 이 단은 볼 만한 것을 답사자에게 제공한다. 양 옆에 새겨져 있는 부조들이다. 우리 장졸들이 왜적과 싸우는 장면들을 새겨놓았다. 그 중에서 특히 논개가 왜장을 안고 뛰어내리려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 김시민 장군비 ⓒ 추연창


진주성 싸움 때 풍신수길은 조선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군대를 결집시킨다. 결국 진주성으로 몰려든 왜적은 10만에 육박했다. 부산 주둔군 1만을 제외한 일본군 전체가 몰려왔던 것이다. 게다가 풍신수길은 10만 군사를 진주성으로 보내어 그곳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죽이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하기까지 했다. 풍신수길은 1차 진주성 패배 때문에 조선 정벌에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진주성만은 꼭 함락시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작정했었다.

하지만 조선의 조정과 도원수 권율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물론 권율 본인도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 그에 비하면 통신사로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했던 김성일은 진주성에 와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정치 지도자가 어떤 방식으로 백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잘 증언하고 있는 것이 바로 2차 진주성 싸움이다.

나와 성문 바로 앞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식당 안에는 진주성 관련 사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식당 안 풍경은 답사자에게 '과연 이곳은 진주로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다. 사진 중에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있는 벽화 부조도 빠짐없이 걸려 있었다. 논개가 죽은 진주성에서 밥을 먹으며 나는 먹걸리도 한 잔 곁들였다. 그것을 스스로 나는 논개와 김천일 등 이곳에서 죽은 1만 군사와 5만 백성들에게 바치는 술이라고 합리화했다.

논개부조논개부조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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