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 하마터면 '동정댁' 될 뻔했다
[우리 마을을 찾아서①] 4·3의 아픔과 전원생활의 낭만이 공존하는 '소길리'
제주도에는 제주시 115개, 서귀포시 105개 등 모두 220개의 마을이 있다. 마을의 규모가 크고 작음만 다를 뿐 마을별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제주신문>은 3일자 신문부터 도내 각 마을들을 하나씩 선정해 마을의 역사와 전통, 특산물, 풍물 등을 살펴보고 이장과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마을의 자랑거리와 계획 등을 알아보는 특별기획 '우리 마을을 찾아서'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한다.... 기자 주
질곡의 역사를 딛고 소생하다
소길리는 행정구역상 제주시 애월읍에 속해 있는 제주도 중산간 마을이다. 제주시내에서 서쪽으로 일주도로를 따라 약 12Km를 가면 애월읍 하가 2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한라 쪽으로 약 5Km쯤 남서쪽으로 가면 주위가 약간 높은 지대로 둘러 쌓인 분지에 180여 가구(지난해 말 기준)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조용하고 평화스런 마을 '소길리'를 만나게 된다.
소길리는 북동쪽에 장전리, 서북쪽에 용흥리, 동쪽에 유수암리, 남동쪽에 거문덕이 등 4개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웃동네와 알동네로 구성되어 있고 3분의 2정도의 주민이 알동네에 거주하고 있다.
최근 들어 가수 장필순씨에 이어 '소길댁' 이효리씨 등 외지(육지부)에서 전원생활과 귀농의 꿈을 안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소길리의 설촌 연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치 않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년 전 지금의 속칭 좌랑못 부근과 신산마루 부근에 이미 산발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300여 년 전 함씨, 송씨, 허씨와 그 외 선조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마을 형태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소길리의 호칭은 뚜렷하지 않으나 제주목에 의하면 조선 인종 31년(1831), 철종 7년(1856), 고종 4년(1867)까지는 소길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다 고종 10년(1873) 3월 제주목에는 신우면 신덕리로, 고종 19년(1882)에는 신우면 동정리로 고쳤다가 다시 1890년부터 다시 소길리로 개명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앞서 1709년 편찬한 <탐라지도>와 1770년대 제작한 <제주삼읍도총지도>에서는 우로촌(牛路村)이 확인된다. 이들 지도의 우로촌은 소길리의 옛 이름 '쉐길(쉐질)'일대에 들어섰던 마을의 이름을 한자 차용 표기해 기록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우로를 뜻하는 소길리의 옛 이름을 좋은 뜻의 한자로 표기하고자 '길함을 부른다'는 뜻을 가진 '소길(召吉)'로 표기하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
소길리는 1978년 마을 주민이 서로 돕고 뜻을 한데 모아 마을 자체에서 향약을 제정해 몸소 실천해 전국 최초로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제주도민의 고유정신인 삼무정신(도둑·거지·대문이 없는 것)을 실천하는 일에 주민들이 한 뜻을 모으고 있다.
이밖에도 ▲ 2006년 북제주군 쓰레기 없는 그린빌리지 시범마을 지정 ▲ 2008년 체납액 없는 마을 선정 ▲ 2011년 녹색농촌체험마을 선정 등에서도 소길리는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소길리의 지질은 다양한 암석의 용암류가 넓게 분포하고, 대부분 반정휘석 용암류가 한림읍까지 흘러서 표면에 유출됐다. 용암의 함몰지역이 없고 용암구조가 치밀하며 장석·반정휘석 용암분출로 대규모 계곡이 없으며 하천발달이 미약하다.
중산간 마을로는 월등히 토질이 비옥해 금비(화학비료)가 없던 때는 다른 마을에 비해 농작물이 잘 자랐으며 따라서 소득 또한 주변 마을에 비해 높았다. 마을 사람들은 풀이나 나무, 곡식대 등을 연료로 사용했으며 해안가 마을에 비해 교통이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주를 거의 자급하는 평범한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나 1948년 4·3 사건으로 인해서 마을 전체가 소개하게 되어 주민들은 해안가 마을로 뿔뿔이 흩어졌고 같은 해 11월에는 무장대들에 의해 마을 전체가 전소되면서 폐허의 마을이 됐다. 흩어졌던 주민들은 뼈를 깎는 아픔과 고생 끝에 1949년 마을로 돌아와 먼저 마을 방어를 위한 축성을 쌓았고 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는 등 마을 재건에 온 힘을 쏟으면서 마을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하지만 주민들의 생활고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주민들은 무장대에 의해 소각 당하기 이전의 평화스러운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절약과 근검, 이웃을 돌보는 인보의 정신으로 굳게 뭉쳐 오늘에 이르게 됐다.
현재 소길리 주민들의 생업은 대부분 1차 산업인 농업이다. 농가 중에서 90% 이상이 감귤을 재배하고 있으며 농가 중 일부는 보리·콩·참깨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밭작물을 재배한다.
질곡의 역사를 딛고 소생하다
▲ 소길리 마을 전경. ⓒ 소길리
소길리는 행정구역상 제주시 애월읍에 속해 있는 제주도 중산간 마을이다. 제주시내에서 서쪽으로 일주도로를 따라 약 12Km를 가면 애월읍 하가 2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한라 쪽으로 약 5Km쯤 남서쪽으로 가면 주위가 약간 높은 지대로 둘러 쌓인 분지에 180여 가구(지난해 말 기준)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조용하고 평화스런 마을 '소길리'를 만나게 된다.
소길리는 북동쪽에 장전리, 서북쪽에 용흥리, 동쪽에 유수암리, 남동쪽에 거문덕이 등 4개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웃동네와 알동네로 구성되어 있고 3분의 2정도의 주민이 알동네에 거주하고 있다.
최근 들어 가수 장필순씨에 이어 '소길댁' 이효리씨 등 외지(육지부)에서 전원생활과 귀농의 꿈을 안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소길리의 설촌 연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치 않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0년 전 지금의 속칭 좌랑못 부근과 신산마루 부근에 이미 산발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300여 년 전 함씨, 송씨, 허씨와 그 외 선조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마을 형태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소길리의 호칭은 뚜렷하지 않으나 제주목에 의하면 조선 인종 31년(1831), 철종 7년(1856), 고종 4년(1867)까지는 소길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다 고종 10년(1873) 3월 제주목에는 신우면 신덕리로, 고종 19년(1882)에는 신우면 동정리로 고쳤다가 다시 1890년부터 다시 소길리로 개명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 소길리 경로당 앞 퐁낭(팽나무). ⓒ 소길리
앞서 1709년 편찬한 <탐라지도>와 1770년대 제작한 <제주삼읍도총지도>에서는 우로촌(牛路村)이 확인된다. 이들 지도의 우로촌은 소길리의 옛 이름 '쉐길(쉐질)'일대에 들어섰던 마을의 이름을 한자 차용 표기해 기록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우로를 뜻하는 소길리의 옛 이름을 좋은 뜻의 한자로 표기하고자 '길함을 부른다'는 뜻을 가진 '소길(召吉)'로 표기하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
소길리는 1978년 마을 주민이 서로 돕고 뜻을 한데 모아 마을 자체에서 향약을 제정해 몸소 실천해 전국 최초로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제주도민의 고유정신인 삼무정신(도둑·거지·대문이 없는 것)을 실천하는 일에 주민들이 한 뜻을 모으고 있다.
이밖에도 ▲ 2006년 북제주군 쓰레기 없는 그린빌리지 시범마을 지정 ▲ 2008년 체납액 없는 마을 선정 ▲ 2011년 녹색농촌체험마을 선정 등에서도 소길리는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소길리의 지질은 다양한 암석의 용암류가 넓게 분포하고, 대부분 반정휘석 용암류가 한림읍까지 흘러서 표면에 유출됐다. 용암의 함몰지역이 없고 용암구조가 치밀하며 장석·반정휘석 용암분출로 대규모 계곡이 없으며 하천발달이 미약하다.
▲ 소길리 마을 표지석. ⓒ 신용철
중산간 마을로는 월등히 토질이 비옥해 금비(화학비료)가 없던 때는 다른 마을에 비해 농작물이 잘 자랐으며 따라서 소득 또한 주변 마을에 비해 높았다. 마을 사람들은 풀이나 나무, 곡식대 등을 연료로 사용했으며 해안가 마을에 비해 교통이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식주를 거의 자급하는 평범한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나 1948년 4·3 사건으로 인해서 마을 전체가 소개하게 되어 주민들은 해안가 마을로 뿔뿔이 흩어졌고 같은 해 11월에는 무장대들에 의해 마을 전체가 전소되면서 폐허의 마을이 됐다. 흩어졌던 주민들은 뼈를 깎는 아픔과 고생 끝에 1949년 마을로 돌아와 먼저 마을 방어를 위한 축성을 쌓았고 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는 등 마을 재건에 온 힘을 쏟으면서 마을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하지만 주민들의 생활고는 말할 수 없이 비참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주민들은 무장대에 의해 소각 당하기 이전의 평화스러운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절약과 근검, 이웃을 돌보는 인보의 정신으로 굳게 뭉쳐 오늘에 이르게 됐다.
현재 소길리 주민들의 생업은 대부분 1차 산업인 농업이다. 농가 중에서 90% 이상이 감귤을 재배하고 있으며 농가 중 일부는 보리·콩·참깨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밭작물을 재배한다.
마을 주민 위해 기타 치는 한홍수 이장 |
"소길리에 가면 문화적인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을 외부인들에게 전해 주고 싶습니다. 소길리가 아름다운 마을이 되도록 더욱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 한홍수 소길리 이장. ⓒ 신용철 한 이장은 2000년 초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예기치 않은 화재로 큰 손실을 입고 몸과 마음을 회복 할 곳으로 제주를 택했다. 전세 기간이 맞지 않아 잠시 머물 곳을 찾다가 소길리에 들어선 것이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후반전을 달리는 계기가 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을을 청소하고 마을 발전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 마을 주민들은 차차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텃새가 강하다고 인식되는 제주에서 그에게 이장직을 맡겼다. 이장 2년이 연임 돼 올해 3년차에 접어든 것을 보면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그를 신뢰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상순·이효리 부부가 소길리에서 잘 정착 할 수 있었던 것도 제주 토박이 이장이 아닌 '육지출신 이장'이 그들을 많이 이해해주고 보호해 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노인정에서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직접 기타 치며 노래도 부르는 한 이장은 때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분들과 생활하면서 손발 주무르는 일도 마다치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한 이장은 인근 장전리의 부인이 운영하는 음악학원에서 아이들에게 무료로 국영수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다. 한 이장은 "시골 깊숙한 곳에서도 아이들은 배워야 하지 않나. 우리 자식인양 가르치고 있다"며 "내게 주어진 모든 일에 댓가나 요행을 바라지 않고 진심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애월읍 정착주민지원협의회 회장까지 맡은 한 이장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고려시대 지배 계층 묘로 추정되는 '석관묘' |
▲ 석관묘. ⓒ 소길리 지금부터 약 600년 전 호릿군에 의해 좌랑못 남쪽에서 석관이 발견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1961년 석관 보존의 가치가 인정되어 오늘날 소길리 명덕동산 북쪽에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석관묘가 위치하게 됐다. 이 석관묘는 오래전에 도굴을 당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판들을 1970년대 초 소길리 주민들이 수습해 현재의 위치 (소길리 명덕동산 북쪽 772-1번지)에 보존하고 있다. 석관묘는 현무함 판석을 이용해 직육면체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좌우 판석과 앞뒤 판석 2개, 윗판석 1개로 되어 있고 밑판석은 수습 당시 찾지를 못해 아직까지 없는 상태다. 길이 232cm, 너비 90cm, 높이 72cm의 규모로 석관묘를 구성하는 돌판의 밖은 거칠게 다음어져 있고 안쪽은 세밀하게 다듬어져 있다. 맞물리는 면은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맞춰 놓았다. 석관의 안팎에는 특별한 문양이나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피장자와 관련된 구전이나 문헌 등의 자료도 없고 또한 이와 비슷한 분묘가 아직까지 제주도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분묘가 어떤 형태로 이뤄졌는지,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향토사학자들은 현무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축조된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배 계층의 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지역일간지 <제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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