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너머로만 보는 아들... 가슴이 먹먹했다
[팔팔한 팔라완 기행 13] 보육원부터 감옥까지... 그들의 슬픈 흔적
▲ 1700년대 지어져 스페인의 요새였던 콘셉시온 교회 ⓒ 강은경
"현주씨에게 3시간 후 숙소에서 만나자고 했어. 혼자 걷고 싶다고. 내가 이래. 변덕이 죽 끓듯 해. 동행이 생겨 좋다고 환호한 지 24시간도 안 지나 마음이 변했어. 혼자 있는 게 편해. 현주씨하고 무슨 문제가 있었냐고? 그건 절대 아니야.
그렇다니까. 나는 여행 중에 고독, 침묵, 사색 따위를 찾아 즐기는 경향이 있어. 배낭 여행을 혼자 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겠지. 휴대폰도 없이 말이지. 완전히 자유롭고 싶어서. 몸과 마음이 홀가분하고, 생각이 깊어지거든. 그렇다고 내가 무슨 은둔자도, 구도자도 아니잖아. 중뿔나게 혼자 고고한 척 하기엔 정신 세계가 한참 바닥이란 거 인정해.
게다가 나는 전형적인 '사회적 동물'이야.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걸 또 엄청 좋아하잖아. 까놓고 말해, 어떨 땐 그 변덕 때문에 나도 혼란스러워. 곁에 아무도 없으면 외롭고, 누가 다가오면 귀찮고. 여행할 때 뿐만 아니라, 나의 그런 이중성, 이기적인 마음이 평소에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한센인 모여 살았던 섬, 쿨리온
쓰던 여행 일지를 덮었다. 더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현주씨는 아침 일찍 먼저 쿨리온 시내구경을 나갔다. 오후에 다시 코론 시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전날 오후 4시께 쿨리온 섬에 도착했다.
코론 시 항구에서 하루 한 차례 이 섬으로 뜨는 정기선을 타고 왔다. 1시간 30여 분 걸렸다. 숙소를 정해놓고 해지기 전 부리나케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한센병 환자촌의 역사를 보여주는 오래된 건물을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시내 중앙 언덕에는 조개 껍데기로 만든 독수리 형상이 누워 있었다. 1926년 필리핀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감사 표시로 한센인들이 조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갔다.
주변에서 놀고 있던 섬 아이들 대여섯 명이 현주씨를 따라다녔다. 현주씨가 타갈로그어로 농담을 던지는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계단을 오를 때는 '빠또빠또삐!(가위 바위 보!)'로 계단을 오르는데, 현주씨가 계속 이겼다. 나중에 그 비결을 물어보니, 아이들은 대개 '가위'를 낸단다.
▲ 언덕에서 내려다 본 쿨리온 시내 풍경. 만 끝으로 빨간지붕이 콘셉시온 교회이다. ⓒ 강은경
우리가 언덕을 다 올라갔을 때는 석양이 깔리는 시각이었다. 만 끝에 콘셉시온 교회의 붉은 지붕과, 시내의 건물들과 바다와 섬들이 석양을 받으며 눈 아래 펼쳐졌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광이었다. 한 때 5천여 명의 한센인들이 격리되어 살았던 아픔의 흔적들은 아직도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지만.
쿨리온 섬에 처음 한센인이 들어온 건 1906년 5월 27일이었다. 세부에서 출발한 370여 명의 환자들이었다. 스페인 통치 시절이었다. 1898년 미국 통치가 시작 되면서 한센병 치료 시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쿨리온은 필리핀의 식민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섬이 됐다.
현재의 섬엔 한센인은 없고, 당시 수용소와 진료소로 유명했던 병원이 남아 있다. 병원 시설이 좋고 의사가 많아 주변 섬에서 환자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언덕에서 내려와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우리가 잡은 싼 숙소는 바다 쪽으로 식당이 딸려 있는 수상 가옥이었다. 샤워를 한 뒤 우리는 식당에서 닭고기를 시켜놓고 산미구엘 맥주를 마셨다. 나는 이제 필리핀식 맥주를 마시는 방법에도 익숙해졌다. 시원한 맛으로 맥주와 얼음을 섞어 마시는 거다.
▲ 쿨리온 병원 ⓒ 강은경
코론 시에서 커피숍 '커피 콩'을 운영하는 현주씨는 오랜만에 나온 여행이라며 한껏 들떠 있었다. 쿨리온 섬의 분위기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나는 모국어를 거침없이 뱉을 수 있으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술이 술술 넘어갔다. 여행 얘기와 사변을 털어놓으며 밤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간밤에 마신 술이 덜 깼나. 머리가 약간 몽롱했다. 거리로 나오니 아침 햇살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뜨거웠다. 항구에서 왼쪽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애써 그늘 속을 찾아 걸었다. 그 길 중앙쯤에 있는 '아래 문(Lower gate)'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콘크리트 문 아래로 트라이시클(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륜 자동차)이 부릉부릉 오가고 있었다. 문 옆에 세워진 영어 표지판을 읽어보았다.
'... 격리지구는 leproso와 sano라는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두 문은 아래 문과 윗문이... 아래 문을 지나는 모든 의료인과 의료 보조원들은 소독제에 손을 담그고 신발이나 슬리퍼를 닦아야 했다...'
오래 전 고향 시골 동네에서 한센병 환자에 대해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열 살 전이었다. "문둥이가 아이들의 간을 파먹는다"는 소문. 보리밭을 지날 때도, 진달래꽃을 따러 산에 갈 때도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소문. 조무래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서정주의 '문둥이'라는 시를 굳은 표정으로 읊던 동네언니도 기억났다. 무서운 주문처럼 들렸던 시.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나는 당시 그 시의 뜻도 몰랐고, 서정주가 누군지도 몰랐다. '문둥이'가 아기를 먹고 운다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그 소문을 사실로 믿게 만든 시였다. '문둥이'가 무서웠고, 서정주라는 시인도 무서운 사람 같았다. 그 언니도 피해 다녔다.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오르자 다시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다. 나는 재빨리 걸음을 뗐다.
'아래 문'을 통과한 뒤엔 곳곳에서 목조 건물 앞에 서 있는 표지판들을 볼 수 있었다. 한센병 환자 격리 시절 사용했던 건물들이었다. 낡고 헐린 채 폐허가 되어 비어 있거나 식료품 가게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경찰 본부였던 '센도발의 집', '감옥', 결혼한 환자들이 살았던 '주택', 모임 장소, 댄스 홀, 경기장 등등. 나는 윗길의 '발라라 보육원'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표지판을 들여다보며.
'발라라 보육원은 한센병 어린이 환자들을 위해 1916년에 지어졌다. 처음엔 출생 6개월 된 아이부터 나중엔 출생 직후의 아이들까지.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해, 부모들로부터 격리된 400여 명이 넘는 아기들이 보육원에서 자라야 했다. 부모들은 주중에 방문해 유리를 통해서만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1970년대에 보육원은 점차 폐지되어...'
▲ 발라바 보육원 건물 ⓒ 강은경
쿨리온 돌아보니 소록도가 떠올랐다
소록도의 '수탄장'을 떠오르게 하는 건물이었다. 천형을 짊어진 부모와 아이들의 생이별 같은... 가슴 먹먹한 장면이 자꾸 눈앞에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쿨리온 섬과 소록도, 두 섬의 역사가 많이 닮았다.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날은 뜨겁고 목이 탔다. 나는 뒤로 돌아오던 길로 돌아갔다. 걸음이 축축 늘어졌다. '레오나르드 우드 기념비'가 서 있는 작은 공원을 지나 '그랜드 계단'을 올라갔다. 광장에 농구 골대가 있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멍하니 농구하는 아이들을 지켜봤다. 현주씨랑 헤어진 지 두 시간 쯤 지났다. 농구공을 쫓던 눈길을 거두고 여행일지를 꺼내 펼쳤다.
"현주씨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이 작은 시내에서 두어 시간 배회하다 보면 부딪칠 만도 한데. 거리에 외국인이라고는 나 혼자... 아, 또 뭐야? 그녀가 보고 싶어. 마음이 또 홀랑 뒤집어졌네. 혼자 있겠다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변덕쟁이! 그녀랑 대화하면 기운이 솟을 것 같아. 본 것, 느낀 것들을 나누고 싶어. 여행의 동반자가 그래서 필요하잖아. 세상과 길에 대해 서로 교감을 나누는 것. 끈끈해지잖아. 덜 외롭고. 여행은 활기차지고."
전날 현주씨가 코론 시 항구에 불쑥 나타났을 때, 나는 얼마나 반갑고 놀랐는지 모른다. 그녀는 쿨리온 섬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사업 파트너이자 애인인 연호씨가 기꺼이 지원해줬다며. 4년여 동안 연호씨랑 어디든 늘 붙어 다녔는데, 혼자 떨어져 여행하는 건 처음이라고도 했다.
현주씨는 유독 피부가 하얀 게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필리핀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분간 못 하게, 다들 새카맣게 타서 다니는데. 나 역시 팔라완에 온 지 며칠 만에 완전히 그을렸다. 아무튼 그녀는 하얀 피부에 균형 잡힌 늘씬한 키, 세련미 넘치는 30대 여자였다. 게다가 가식 없는 태도와 말투가 친근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멋진 동반자가 생겨 여행에 활기가 솟는 것 같았다.
그랬는데... 1박 2일, 이 짧은 여행에서 나는 혼자 걷겠다고 했다. 그녀를 혼자 내보냈다. 그리고는 두어 시간 만에 그녀를 다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행일지를 접고 서둘러 숙소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스페인 풍의 '라 임마클라다 콘셉시온 교회'를 잠깐 들렀다. 교회 옆 성곽 요새에 올라가 1700년대 모로 무슬림의 공격을 방어하던 대포도 훑어보았다.
숙소에서 현주씨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하마터면 나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꼭 안을 뻔 했다. 그녀는 그동안 병원과 학교를 둘러봤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갈 방카(필리핀 배)를 섭외해 두었다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그녀는 몇 걸음 앞서 가 숙소를 알아보고 안내를 하고... 그녀의 친절이 마치 프로 여행 가이드를 동반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난다.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밴 사람들. 나의 이기심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
우리는 서둘러 '쿨리온 박물관'으로 달려갔다. 한센병 환자촌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이었다. 1906년 처음 문을 열어 한때 세계적인 규모로 운영됐다고 한다. 쿨리온에서 마지막 코스로 한껏 기대하고 달려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보수 작업 때문에 당분간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닫힌 문에 붙어 있었다.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우리는 마치 이 박물관을 보기 위해 이 섬에 온 것처럼 낙담했다. 나는 생각 끝에, 간곡히 부탁을 하든, 떼를 써보든지 하겠다며 관리 사무소를 찾아갔다. 네다섯 명의 사무원들이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불쑥 들어온 우리를 보고 다들 무슨 일이라며 눈길을 던졌다. 나는 처음엔 박물관 구경을 꼭 하고 싶으니 잠깐만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했다. 씨도 안 먹히는 분위기였다. 사무실의 고참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공문서를 들고 왔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문을 닫고 보수 작업을 하라는 지시 사항이 적힌 공문서였다. 결국,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 오늘이 며칠이죠?"
▲ 쿨리온 박물관 ⓒ 강은경
▲ 한센병 격리지구 시절 흑백사진들 ⓒ 강은경
현주씨가 물었다. 공문서에 기재된 박물관 폐쇄 날짜는 오늘이 아니라 이틀 후부터였다. 현주씨가 그걸 지적하자 사무실 직원들은 당혹한 표정으로 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며,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박물관에 들어갔다. 사진 촬영 허가까지 받아냈다. 출입구 정면에 박물관의 역사가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193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필리핀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지역과 태평양 지역의 한센병 연구의 중심지였다...'
박물관은 방방마다 의료기와 사진, 고문서, 화폐, 악기, 그림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한센병 환자들의 결혼 금지 등 인권 침해 상황, 레크리에이션, 의식주, 장례, 노동 생활 등을 빛바랜 흑백 사진과 문서로 살펴볼 수 있었다.
이 섬은 당시 한센인들에게 천국이었을까, 지옥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불현듯 일었다. 십수 년 전에 갔었던 소록도의 풍경과 오래 전 읽었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도 기억났다. 소록도가 '그들의 천국'이 아니고 왜 '당신들의 천국'인지, 지옥 같은 그 실상을 파헤친 소설이 말이다. 박물관 한 쪽에서 이런 글귀를 읽었다.
'한센병은 쿨리온에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의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한센병은 이 섬을 '사라진 낙원'이나 '산 송장들의 섬'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오늘날 쿨리온은 한센병과 사회적 오욕을 정복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이 섬을 다시금 '되찾은 낙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섬'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 쿨리온 박물관 ⓒ 강은경
▲ 쿨리온 박물관. 의료기기들 ⓒ 강은경
되찾은 낙원, 살아있는 사람들의 섬
박물관을 다 돌고, 밖으로 나올 때, 나는 한센병에 걸려 '천형의 시인'이라고 불린 한하운의 '보리피리'의 한 구절을 중얼거렸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누구나 격리된 지역에서 살다 보면, 또 혼자 오랫동안 여행을 하다 보면, 고향도 사람도 그리워 사무치게 되는 걸까. 옆에 있는 현주씨를 바라보며 미소를 보냈다.
점심을 먹고 코론 시로 돌아가기 위해 방카를 탔다. 바다는 바람이 불고 너울이 크게 일었다.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잎처럼 두어 시간 바다에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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