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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절집 이름이 '뜬 돌'을 뜻하고 있을까

부석사 돌계단은 극락으로 향한다

등록|2015.02.14 14:58 수정|2015.02.14 14:58

▲  부석사 안양루의 공포와 공포 사이에 부처님이 앉아 계셨다. ⓒ 김연옥


겨울이 가기 전에 그리움이 되어 늘 마음 한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부석사를 찾기로 했다. 오래전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에 갔었던 부석사와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하면서 길을 나섰다.

지난달 14일 오전 8시에 경남 창원 월영마을서 출발하여 영주 부석사(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주차장에 이른 시간은 11시 40분께. 우리 일행은 연세가 여든일곱 되는 어르신을 포함하여 세 명. 먼저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근처 음식점에 들어갔다. 뜨끈한 손두부와 취나물, 고사리, 시금치, 볶은 무채, 산나물 등을 넣은 산채비빔밥을 맛나게 먹고서 오후 1시 10분쯤 부석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건물이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동시에 가지다니

▲ 범종각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건물이다. 맞배지붕 쪽 모습이다. ⓒ 김연옥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한가한 걸음으로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당간지주(보물 제255호)가 나왔다.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기를 달아 두는 장대가 당간인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부른다.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을 거쳐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30호) 앞에 도착했다. 동서로 서 있는 쌍탑이다. 서탑이 17cm가량 조금 높을 뿐 형식은 같다. 부석사에서 200m쯤 떨어진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을 1966년에 옮겨 세웠다 한다. 서탑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에서 나누어 온 부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해서 지난해 11월 익산 여행길에 들렀던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의 추억에 잠시 젖었다.

▲  범종각과 삼층석탑.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30호)은 부석사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옛 절터서 옮겨 세운 것으로 쌍탑이다. ⓒ 김연옥


▲  범종각에서 내려다본 천왕문. ⓒ 김연옥


▲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오르면 극락에 이르게 된다. 돌을 생긴 대로 이용하여 자연스레 쌓아 올린 부석사 석축, 그리고 돌계단은 구품만다라를 형상화했다. ⓒ 김연옥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범종각은 마치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을 주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거의 9년 만에 찾게 된 절집이라 감회가 깊었다. 또다시 봐도 범종각의 지붕 구조는 재미있고 놀라웠다. 한 건물이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니 어찌나 신기한지 옛 장인의 뛰어난 솜씨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범종각에서 올려다보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자태 또한 한 폭의 수려한 한국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잔잔한 떨림이 밀려왔다. 석축에도 절로 눈길이 간다. 일정한 크기로 반듯하게 다듬은 돌이 아니라 크고 작은 돌이든 모나고 둥근 돌이든 생긴 대로 이용하여 자연스레 쌓아 올렸다. 더욱이 부석사 석축과 돌계단은 구품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으로 이 절집을 찾는 사람들은 석축과 돌계단을 지나고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오르면 극락에 이르게 되는 거다.

무량수전 아미타불은 중앙이 아니라 서쪽에 모셨다

▲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동쪽으로 삼층석탑(보물 제249호)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탑은 법당 앞에 있는데, 부석사 삼층석탑은 법당 동쪽에 세워져 있다. ⓒ 김연옥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주심포 양식에 아름다운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하다. 고려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해 불타 버린 것을 우왕 2년(1376)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에 봉안된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이 다른 불전들과 다르게 중앙이 아니라 서쪽에 마련된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것도 참 인상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무량수전이 모시고 있는 아미타불이 서방극락의 주불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은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세운 절집으로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그런데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절 이름이 '뜬 돌'을 의미하는 부석사가 되었을까? 부석사 창건에 얽힌 설화에는 선묘라는 낭자가 등장한다. 선묘는 당나라에 건너가 화엄을 공부하고 있던 의상스님을 연모했던 여인으로 무량수전 뒤쪽에 그녀를 기리는 선묘각도 있다.

▲  범종각에서 올려다본 무량수전과 안양루. ⓒ 김연옥


▲ 무량수전 뒤쪽으로 선묘 낭자를 기리는 선묘각이 있다. 부석사는 선묘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절집이다. ⓒ 김연옥


전해져 내려오는 선묘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의상스님이 10년 동안의 수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그가 탄 배를 안전하게 호위해 주었다. 선묘의 공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의상스님이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 했을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를 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서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그들을 물리쳤다. 그 후 선묘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 한다. 이런 연유로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부르게 되었고 이 '뜬 돌'은 무량수전 왼편으로 가면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작은 규모의 조사당이 국보로 대접 받는 까닭은

▲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 김연옥


우리는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249호)으로 갔다. 부석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이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석탑이다. 탑은 일반적으로 법당 앞에 위치하는데 법당 동쪽에 세워져 있어 특이하다.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보러 계속 걸어 올라갔다. 조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 크기로 주심포 양식에 맞배지붕이다.

건물이 참 소박하면서도 이쁘다. 이 작은 크기의 건물이 어떻게 해서 국보 대접을 받고 있는 걸까. 고려 우왕 3년(1377)에 지은 건물로 고려 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더군다나 조사당 안쪽 벽면에 6폭으로 그려진 사천왕, 제석천, 범천의 벽화가 있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건물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 선비화의 전설을 품고 있는 조사당(국보 제19호). ⓒ 김연옥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는 1916년에 벽화가 있는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내어 지금은 부석사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흰색, 황색, 금색 등으로 채색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되기도 하고 후대에 덧칠도 하여 본디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웠다.

조사당 선비화는 재미있는 전설을 품고 있다. 의상대사가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지팡이를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었다는 이야기다. 향명이 골담초인 이 선비화가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 1300여 년을 살아왔다는 게 쉬이 수긍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퇴계 이황의 시구처럼 스님의 지팡이가 신령스러운 나무가 되어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의상대사의 화엄 사상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 같다.

부석사를 내려오는 도중에 안양루를 뒤돌아보았다. 멀리서 보니 안양루의 공포와 공포 사이로 부처님이 앉아 계셨다. 가까이 가서 올려다보면 공포와 공포 사이의 그저 빈 공간일 뿐인데. 헤아려 보니 여섯 분이다. 부석사를 지키는 부처님이 저기에도 계시다니. 그렇다면 극락세계도 내 마음속에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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