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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광주'가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

[서평] 한강의 <소년이 온다>

등록|2015.02.14 09:56 수정|2015.02.14 09:56

<소년이 온다>표지. ⓒ 이민희


벽에 부딪친 느낌이다. 나는 지금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활자의 감옥'에 갇혔거나, 넘어설 수 없는 '이야기의 벽' 앞에서 절망 중이다.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과연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나의 글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반역과 비인간성의 장막을 걷어내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을까.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이렇게 나에게 왔다.

15살 소년 동호는 시위대에 가담했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친구 정대를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다.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사격이 이루어지고 공포에 질린 동호는 정대를 차마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라'는 엄마와 작은형의 부탁을 뒤로한 채 상무관에 간 동호. 그곳에서 소년은 자원해 온 형, 누나들과 함께 밀려드는 시신을 수습해 관속에 안장하는 일을 하게 된다. 마침내 최후의 날. 40만 광주시민 전체 숫자보다 더 많은 80만발의 실탄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화려한 휴가'가 벌어진 날, '미성년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시민군의 방침을 어기고 동호는 끝까지 도청에 남는다.

또 한 명의 소년이 있다. 동호의 친구 정대. 5·18을 다룬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감히 그 모든 작품을 넘어서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정대의 시선에서 학살을 응시하는 대목 때문이다. 소설 전체가 아팠지만 특히 이 부분이 아팠고, 소설 전체가 읽기 힘들었지만 특히 이 부분을 읽어 넘기기 어려웠다.

소설 속에서 정대는 트럭에 실려 구덩이에 쳐 넣어진 수많은 '몸'들과 함께 '원혼의 대화'를 나눈다. 휘발유가 부어지고 '몸'들이 다 타서 없어지기 전에 정대가 붙잡고 싶었던 것은 '기억'이었다. 미처 여름을 건너지 못하고 핏덩어리 속에 박제되어 버린 기억. 정대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이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의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57~58쪽)라고 소리없는 절규를 뿜어낸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102쪽)

학살에서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삶의 시계가 80년 5월에 멈춰버린 사람들도 있다. 동호와 함께 상무관 시신을 지켰던 은숙 누나는 보안사 군복의 기세 서슬퍼런 '검열과'를 오가며 출판사 직원으로 살아간다. 동호를 남겨둔 채 도청을 빠져나와 살아남은 은숙 누나는 뜨거운 고름같은 눈물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군인들에게 끌려가 지옥과도 같은 고문의 나날을 보냈던 김진수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앳된 소년에 불과한 김영재는 정신병원을 전전한다. 이들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135쪽) 기다린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 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쪽)

소설은 묻고 있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테제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관찰한 결과,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생각의 무능'이 학살을 저지르게 했다고 분석했다. 전체주의 체제하에서의 악은 인간의 보편적 판단 능력을 앗아가며 비범한 형식 대신 체제 순응성, 평범성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의 평범성'은 폭력과 학살에 대한 '생각없는' 동참을 이끌어낸다.

이상호 기자의 영화 <다이빙벨>에서도 이종인 대표가 세월호 실종자 수색과 구조에 소극적인 당국을 향해 절규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들은 악마야, 악마집단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광주에서 어린 동호와 정대를 처참하게 죽였던 '악의 평범성'은 2015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5·18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뼈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되죽임을 당하는 국가적 폭력의 대명사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79쪽)

도청에서의 마지막 날,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오는 군인들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213쪽) 거기에 남았다. 때문에 5·18은 추모와 기념의 이름이 아니라 여전히 복원과 심판의 이름이다. 얇은 옷을 입은 채 무덤 사이 눈 덮힌 길을 걷고 있는 동호가 말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213쪽)

동호와 정대가 그 해 여름을 건너지 못했듯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저녁의 시간을 살고 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시간은 어둠과 밝음의 '경계'다. 그 경계에서 '더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덧붙이는 글 <소년이 온다>(한강 지음/창비 펴냄/2014.5.19./215쪽/1만2000원)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 에도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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