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 넘치는 국경... 여기서 사진 찍었다간
[당신에게, 실크로드 ⑭] 중앙아시아 비자의 섬 - 나린 1
▲ [당신에게, 실크로드 14] 중앙아시아 비자의 섬- 키르기스스탄 나린 01 ⓒ 정효정
"키르기스스탄은 꼭 섬 같아. 비자가 필요한 나라들 사이에 섬처럼 떠 있잖아."
스웨덴에서 온 샘이 말하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는 운전 기사, 나, 프랑스 커플, 스웨덴 커플 이렇게 6명이 타고 있었다. 카스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한 차는 토르갓 패스를 넘어 키르기스스탄 나린으로 향하고 있었다.
중국 카스에서 국경을 넘어 키르기스스탄 나린으로 가기 위해선 차를 빌려야한다. 여행사에 알아보니 지프 한 대당 500~600달러가 든다고 한다. 그래서 차를 함께 빌릴 동행을 알아보던 중, 이들을 만났다. 다정다감한 스웨덴 커플과 까칠한 프랑스 커플. 이들도 나처럼 나린을 지나 수도인 비슈케크로 먼저 가서 다른 중앙 아시아 나라들의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중앙 아시아 여행의 최대 복병은 '비자'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대부분의 중앙 아시아 나라는 외국인에게 까다로운 비자 발급 조건을 제시한다. 가장 악명 높은 나라는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이다.
두 나라 다 초청장이 필요한 데다, 비자 받는 소요 기간도 오래 걸린다. 오직 키르기스스탄만 한국인을 포함한 44개국에게 관광 무비자를 내주고 있다(60일 방문 비자 기준). 때문에 많은 여행객이 일단 키르기스스탄으로 가서 우즈베키스탄이나 타지키스탄 등 다른 나라의 비자를 발급받고 있다.
▲ 키르기스스탄 국경국경은 걸어서 넘어야했다. 사진 찍다가 군인한테 걸려서 혼났다. 어느 나라든 국경은 사진찍으면 안된다. ⓒ 정효정
중앙 아시아 국가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통령의 장기 집권이다.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카리모프와 카자흐스탄 대통령 나자르바예프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 권좌에 앉아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006년 전 대통령 니야조프가 20년째 집권 중 돌연 사망한 후,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이 권좌를 물려받아 지금까지 앉아있다. 타지키스탄 대통령 라흐몬도 1994년부터 쭉 변함없이 대통령이다.
그래서인지 특히 작가나 미디어 관련 직종, 저널리스트들에게는 비자 발급이 까다롭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한 독일 친구는 직업이 작가지만, 비자 신청 시 직업을 회계사로 바꿔서 냈다고 한다. "독재 국가는 외국 '글쟁이'들을 환영하지 않거든" 비단 글쟁이들 뿐 아니라 모든 여행자에게 중앙아시아 비자는 여행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중국 국경을 넘기 전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우루무치에 다시 폭탄 테러가 났다는 소식이다(지난해 5월 22일의 일이다). 뉴스를 확인해보니 30여 명이 죽었고, 90여 명이 부상당했다. 한국 정부는 신장 위구르 자치 지역에 특별 여행 주의보를 내렸다. 가슴이 무겁다. 벌써 중국은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 차장 밖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천산 위 국경을 넘다
▲ 국경 넘기전 환전 키르기스스탄에서 환전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중국에서 환전을 하고가는게 낫다. 단 당일 환전 확인 후 흥정은 필수 ⓒ 정효정
국경으로 향하는 길은 황무지다. 저 멀리 모래 돌풍이 부는 것이 보인다. 차문을 닫고 달리고 있지만 차 안까지 모래 냄새가 났다. 결국 바람이 심해 차가 잠시 멈췄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이러다 뒤에 오는 차가 우리 차를 박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까지 든다.
차는 점점 산을 향해 올라가고, 경치는 점점 하얗게 변한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땅이 얼어있는지 차 바퀴에 얼음이 부서져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동화나 신화 속 세계로 향하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어졌다. 마치 온 세상이 난리 굿판인데 이 차안의 나만 안전한 것 같다.
이 험한 고갯길을 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을 오고가는 대형 트럭들은 쌩쌩 달린다. 코너를 돌 때마다 기우뚱하는 게 보기에 불안해 보였다. 해발 3752미터의 토르갓 패스는 천산을 넘는 가장 낮은 고개였다. 지금의 도로는 1881년 러시아와 중국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 이제 이 천산도 '톈산'이 아닌 키르기스스탄 어로 '알라따우'라고 불러야 한다.
길을 나선 지 4시간 후 키르기스스탄 국경에 도착했다. 키르기스스탄 시간은 중국보다 두 시간 느리다. 입국 신고를 하러 차에서 내리는데 눈보라와 세찬 바람에 절로 비명이 나왔다. 주위 눈치를 보며 비명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시원한 바람에 해방감을 느낀다는 듯이. 하지만 곧 다시 비명이 새어 나오게 추웠다.
나를 제외한 커플들은 벌써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고 있었다. 혼자 덜덜 떨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입국 심사를 받았다. "쿵쾅-" 비자 스탬프 찍는 소리는 언제나 명쾌하다. "웰컴 투 키르기스스탄" 얼어붙은 뇌를 재빨리 가동해 러시아 단어를 찾아냈다.
"스파시바(감사합니다)."
국경은 걸어서 넘어야 했다. 두어 번 여권 검문을 거치면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국경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풍경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중국 쪽이 광막하고 광활했다면 키르기스스탄부터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풍경이 이어진다. 중간 중간 유르트(중앙아시아 키르기스 지방의 유목민이 사용하는 천막)가 보이고,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다들 카메라를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풍경은 하얀색에서 이번엔 연초록으로 바뀌고, 회색이던 하늘도 파랗게 변한다. 구름이 초원에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산을 내려가면 갈수록 초록이 짙어진다. 양떼가 길을 막자 다들 감탄사를 내뱉는다. 차보다 우선인 양떼, 자연을 앞서지 않는 문명. 이게 우리가 키르기스스탄에서 원했던 풍경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시간으로 오후 4시, 나린시에 도착했다.
천산을 넘은 당신을 위한 숙소, 타쉬라밧
▲ 차를 막아선 양떼이때만 해도 도로에서 말이나 양떼를 보면 마냥 기뻤다... 이때만 해도. ⓒ 정효정
나린은 해발 2030m의 고원 도시다. 도시 북쪽에는 천산에서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흐른다. 나린강이다. 이 강이 시르다르야가 되고, 우즈베키스탄 아랄해까지 흘러간다. 산자락에 둘러싸인 도시 자체는 아담하다.
거리는 한산하고, 낡고 색이 바랜 구소련의 선전물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큰 슈퍼마켓은 없고, 러시아어로 상점을 뜻하는 '마가진'들만 있다. 페인트를 두껍게 바른 낡은 러시아산 차도, 오래된 트램도 여행객들 눈에는 '빈티지'스럽다. 물론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낡고 불편한 유물이겠지만.
▲ 트램나린시는 아직도 구소련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사실 키르기스스탄 전체가 그랬다. ⓒ 정효정
▲ 차종은 only one "지굴리"페인트질로 빈티지한 멋을 살렸다. ⓒ 정효정
숙소는 작고 아담한 러시아 스타일 아파트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후 한 번도 새 건물이 지어진 적이 없다고 한다. 1인당 하루 11불, 아침 식사가 포함된 가격이다. 아침 식사도 빵과 버터, 잼, 오믈렛, 홍차 등 소박한 서양식이다. 다들 중국을 오래 여행했기에 레이스 커튼 한 장에도, 깨끗한 침대보에도 지나치게 감동했다.
물가도 저렴하다. 특히 술값이 싸다. 보드카 가격이 인상적이다. 750ml 짜리 한 병에 한국 돈으로 2천 원 정도였다. 낮부터 불콰한 아저씨들이 많이 보이는 건 이 이유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또 하나 저렴한 것은 탄산수다.
구소련권에서는 과거에 생수라는 개념이 없었고, 다들 탄산수를 마셨다고 한다. 생수에 대해 키르기스스탄 친구가 한 말은 "수도를 틀면 맑은 물이 나오는데 생수를 왜 사마셔?"였다. 하긴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지금은 생수도 팔고 있지만 탄산수와 가격이 동일하다. 300원 정도면 탄산수 1L를 살 수 있다.
▲ 천산을 넘어 눈 덮힌 천산을 넘어 키르기스스탄으로 ⓒ 정효정
▲ 나린강천산의 눈 녹은 물이 나린강이 된다. 이 강물은 우즈베키스탄 아랄해까지 간다. ⓒ 정효정
나린시 자체에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나린에서 한 시간 반 떨어진 곳에 실크로드 유적지가 있다. 바로 15세기 대상들의 숙소였던 타쉬라밧이다. 타쉬라밧에 가기 위해선 앗바시라는 지역으로 가야한다. 나린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다. 앗바시는 '말 머리'라는 뜻이다. 옛날 이곳은 카자흐스탄과 중국 카슈가르를 연결하는 무역 통로였다고 한다.
타쉬라밧은 돌로 만든 성채다. 정문을 통과하면 복도를 따라 양 옆으로 직사각형의 방이 있고, 중앙에 돔형 지붕의 홀이 있다. 중앙 홀과 이어진 공간에 들어가면 통로를 따라 작은 방들이 줄지어 있다. 또 큰 공간에 여러 명이 묵을 수 있게 돌로 된 마루가 있기도 했다. 군인 막사 같은 구조다.
전체적으로 창문이 없고, 천장에 구멍을 뚫어놔서 그쪽으로 빛이 들어온다. 5월 말이지만 아직도 이곳엔 눈이 내린다. 바닥에는 천장을 통해 들어온 눈이 쌓여 있었다. 어두침침한데다 춥다. 날 좋은 날엔 차라리 바깥에 천막치고 자는 게 나을 듯하다.
▲ 타시라밧옛 카라반 사라이(대상들의 숙소)로 알려져있다. ⓒ 정효정
▲ 타시라밧 내부군인막사처럼 구조가 되어있다 ⓒ 정효정
워낙 폐쇄적인 생김새 때문에 여기가 대상들의 숙소가 아니라 네스토리아교나 불교의 수도원 혹은 감옥이었다는 설도 있다. 뭐가 됐든 춥고 우울한 공간이긴 하다. 하지만 토르갓 패스에서 만났던 눈보라를 생각해보면 바람 피할 벽이 있는 게 어딘가 싶다. 천신만고 끝에 토르갓 패스를 넘었던 대상들이 이곳에서 겨우 눈보라를 피해 짐을 풀고 불을 지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일행들은 가져온 빵을 먹으며 각자 산책을 했다. 어느 정도 산에 올라 앞에 있는 경치를 보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내가 이런 곳에 있다니. 가슴이 부풀어 올라 터질 거 같다. 단 하루 사이에 모든 것은 중국과 달라졌다. 음식도 공기도 사람들도.
▲ 타시라밧 인근경치가 너무 좋아서 실감이 안 날 정도였다. ⓒ 정효정
▲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커플 여행자들 사이에 끼인 외로운 마음을 새끼양 한마리에 투영해 보았다. ⓒ 정효정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레스토랑이었다. 저녁을 먹는데 한 무리의 키르기스스탄 언니들이 우리 테이블로 보드카를 들고 나타났다. 서양인도 동양인도 컵 하나로 보드카를 돌려 마시면서 '강남스타일'에 맞춰 춤을 췄다. 술에 취한 키르기스스탄 언니들은 거칠었다.
자리로 도망가려는 내 허리를 들어 못 가게 잡더니 내 볼에 뽀뽀를 해가며 춤을 췄다. 언니들이 적극적인 것에 비해 키르기스스탄 남자들은 우리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 거친 키르기스스탄 언니들110솜(한화 2천원정도) 보드카 한 병에 우리는 친구~ ⓒ 정효정
술에 취해 밤 늦게 돌아오는 길, 다들 들고 있던 손전등을 껐다.
"세상에, 저 별 좀 봐."
미세하게 가슴이 떨리면서 따뜻해졌다. 보드카를 마셨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나는 내가 떠나온 곳이 이곳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생각해봤다. 나를 설명해주는 모든 정체성과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차가운 밤 공기를 타고 기분이 깃털처럼 날아 올랐다.
키르기스스탄 여행 정보 |
중국에서 키르기스스탄 국경 넘는 법 중국 카스에서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쉬케르탐 패스를 통해 키르기스스탄 서쪽 국경 도시인 오쉬로 가는 방법, 또 하나는 토르갓 패스를 넘어 남쪽 국경 도시인 나린으로 가는 방법이다. 1. 카스 - 오쉬행 버스(이쉬케르탐 패스) : 매주 월요일, 목요일. 아침 9시 30분 출발, 다음날 새벽 3시(키르기스스탄 시간) 도착. 20~24시간 소요. 요금은 570RMB (2014년 기준) 2. 카스 - 나린행(토르갓 패스) : 지프 대절 (500~600USD), 오전 9시 출발, 오후 4시 (키르기스스탄 시간) 도착. 7~9시간 소요. 존스 카페에 문의하면 함께 출발할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준다. (이메일: johncafe@hotmail.com 연락처: +86-998-2581186) |
덧붙이는 글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블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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