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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내가 죽어야 이런 고생 안 하는데"

사회복지시설의 설날 풍경

등록|2015.02.19 16:21 수정|2015.02.19 16:58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흔넷의 수산나 할머니께 새해 인사를 올리자 내뱉는 말씀이다.

"오늘 같은 날 출근한다고 마누라한테 구박받는 것 아이가? 우리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오히려 음력 설날 출근한 나를 걱정하신다.

▲ 설날 아침 6시 30분, 현관문을 열고 집은 나섰다. 내가 일하는 장애인 생활시설 경남 산청 성심원에 도착했다. ⓒ 김종신


설날 아침 6시 30분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내가 일하는 장애인 생활시설 경남 산청 성심원으로 가는 40분 출근길.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에도 불을 밝힌 편의점이 있고 택시들이 물고기처럼 여기저기 다녔다. 차례를 지내기 위한 마지막 행렬인지 큰길에서는 차들이 꼬리를 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5분. "까까까"하며 반기던 까치 인사가 없다. 바람 한차례 머리를 지난다. 근무 시작 7시 30분보다 일찍 온 동료가 벌써 설날 음식을 식당에 챙겼다. 세 가지 나물과 조기, 청주, 딸기. 올 초 떡국이 나와 정작 설날에는 떡국이 없다. 식당으로 오는 어르신이나 반기는 직원이나 모두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라는 덕담이 오갔다.

▲ 설날, 요양원 성당으로 손 맞고 함께 갔다. ⓒ 김종신


아침 식사 도움이 끝나고 당직이라 식당에서 밥을 챙겨 사무실에서 먹었다. 밥을 다 먹을 즈음 미사에 참석하려고 나선 어르신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손 맞잡고 함께 성당으로 모시기도 했다.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를 찾은 가족들 덕분에 원내 성당이 모처럼 북적였다. 평균 연령 78세인 성심원에서 성가(聖歌)는 착 가라앉는다. 오늘날만은 아니다. 가족들의 목소리가 더해져 성가에 힘이 실려 마음마저 경건하게 한다. 돌아가신 어르신들과 조상께 위령미사를 올렸다.

"글라라, 안나, 시몬, 요아킴..." 제대에서 한명 한명 불리는 이름에 잠시 잊고 있던 고인들이 떠올랐다. 기억하고자 이들의 이름은 서 있기 불편할 정도로 불렸다.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된 위령미사는 "이들을 기억하소서"로 끝이 났다. 그만큼 잊지 말아야 할 이들이 많다. 미사 중에 수도자, 직원들이 연단 앞으로 나와 새해 인사를 드렸다.

▲ 설날, 성심원 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중에 전체 직원과 수도자들이 어르신들께 세배를 올렸다. ⓒ 김종신


미사를 마친 어르신들과 가족들은 대성당 뒤 납골묘원으로 가기도 하고 방으로 들어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모처럼 요양원 곳곳에 사람들의 훈기가 넘친다. 한자도 잘 하고 영어도 잘 한다고 늘 자랑하는 증손자 태윤이 왔다가 갔느냐고 여쭈자, 여든 아홉의 율리아나 할머니는 "오늘은 그래도 2시간이나 있다가 갔다"라며 신세 한탄을 먼저 한다.

"아들네가 봉고 차를 빌려 서울에서 밤중에 6시간 걸려 여기 왔어. 새해 인사 지내고 김해 큰 집에 갔다가 대구에 있는 처가에 가지"라면서 "내가 죽어야 이런 고생 안 할낀데…"라고 말끝을 흐린다. 그럼에도 환갑 지난 아들과 손자, 귀여운 증손자 본 즐거움에 말씀 중에도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 설날 점심이 끝나자 썰물처럼 가족들이 떠난다. 가족이 떠난 자리에 바람이 싱그럽다. ⓒ 김종신


점심이 끝나자 썰물처럼 가족들이 떠난다. 가족이 떠난 자리에 바람이 싱그럽다. 바람이 지나간 곳에 다시 바람이 분다. 가만히 바람을 만졌다. 언제 이만큼 왔을까. 모두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떠난다. 떠나는 아들과 딸에게 어서 가라 손 흔들던 어르신. 바람 타고 떠난 가족들이 체온처럼 따스한, 고향처럼 포근한 추억을 안고 여기를 다시 올 것을 기대하며.
덧붙이는 글 해찬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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